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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최고의 미인은 누구일까? 아무리 봐도 으뜸은 초요경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15. 00:59

     

    앞서 장희빈을 다루며 실록에 얼굴이 아름답다(頗有容色) 기록된 유일한 여자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후궁이 아닌 궁녀로서 궐에 들어와 왕의 비빈이 되었고 결국은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스토리도 물론 작용되었겠지만, 아마도 <숙종실록> 위 한 줄 기록이 희빈 장씨를 조선 미인의 대명사가 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어우동, 장녹수, 황진이 등이 꼽히는데 장희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생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궁중여인과 기생을 제외하고는 사회적 활동이 제한된 까닭일 터인데, 그 밖에도 실록에는 초요경, 옥부향, 자동선, 양대 등의 기녀 이름이 등장한다. (참고로 황진이는 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중 최고의 미인을 꼽자면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니 단지 실록의 출현 회수만을 들자면 조선 초기 기녀 초요경이 으뜸이다. 아울러 그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도 그녀가 단연 탑(Top)일 듯하다.
     
     

    광진교 입구로 이사온 도미부인상 /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2001년 문화재청에서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의 와이프를 '우리나라 역사속의 10대 미인'으로 선정했다는데.... 그런데 아이들은 이 스토리에서 대체 무엇을 배울까? (한국교육신문사진)

     
    초요경은 <조선왕조실록>에 단종·세조·예종·연산군조에 걸쳐 무려 45번이나 등장하는데,* <연산군일기>에 나오는 한 번은 그녀가 초요경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 초요경(楚腰輕)으로는 27번, 초요갱(楚腰䡖 혹은 楚腰輊)으로는 18번 검색되는데 모두 동일인이다. 
     
    ** 전교하기를, "운평에게 풍두무(豐頭舞)를 가르치되, 초요경 춤을 추듯이 하게 하라." (<연산군일기>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여기서 풍두무는 처용무(處容舞)의 다른 말이며, 초요경 춤(楚腰輕舞)은 허리가 가는 여자가 사뿐히 추는 춤으로,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허리 가는 미인을 좋아했다는 <후한서(後漢書)>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명을 달았다. 즉 초요경은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가는 허리를 지닌 빼어난 몸매의 소유자였으며, 또 기예(技藝)에도 매우 뛰어났던 미인임을 알 수 있다.

     
    그 나머지 44건은 모두 스캔들로서,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윤7월 4일의 기사는 초요경과 얽힌 종친과 대신들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즉 왕(세조)이 종친과 대신들을 불러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초요경이라는 팜므파탈이 도우미로 참석한 일과, 왕이 동생인 계양군 이증(李璔)에게 제발 좀 그런 기생과는 관계를 갖지 말라고 사정하듯 다그친 일을 적은 것이다. 
     
    임금이 육조의 대신들에게 경회루 누각 아래서 잔치를 베풀어 주니, 중추원사 최항, 동지중추원사 김수온, 예문 제학 이승소, 병조 참판 김국광, 공조 참판 성임, 행상호군 강희안, 중추원 부사 강희맹, 행상호군 아파와 여러 낭청(郞廳) 등이 잔치에 참석했다. 임금은 도승지 노사신에게 명하여 잔치를 감독하게 하고, 또 내녀(內女) 3인과 기녀(妓女) 4인을 내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4기녀(妓女)는 옥부향, 자동선, 양대, 초요경인데 모두 가무(歌舞)를 잘하여 여러 번 궁내(宮內)의 잔치에 불려 들어가니, 임금이 ‘기녀 사인방'이라고 불렀다. 
     
    옥부향은 일찍이 효령대군 이보(李補)사통(私通)하였는데, 뒤에 익현군 이곤(李璭)과도 사통하였다. 초요갱은 어려서 평원대군 이임(李琳)의 사랑을 받다가 평원대군이 졸(卒)하자, 화의군 이영(李瓔)과 사통하였는데, 임금이 이영을 폄출(貶黜)하고 초요갱도 쫓아냈다가 얼마 아니되어 초요갱이 재예(才藝)가 있다고 하여서 악적(樂籍)에 다시 소속시키니, 계양군 이증과 또 사통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이증과 독대하여 물었다.
     
     "바깥 소문이 네가 초요갱과 사통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어찌 다른 기생이 없어서 그 같은 계집과 놀아나는가?"
     
    이상의 내용을 보충 설명하자면, 초요경은 본래  세종대왕의 일곱 번째 아들인 평원대군 이임첩이었다. 놀기 좋아하던 평원대군은 어느 날 기방에 갔다가 얼굴도 예쁘고 가무도 뛰어난 과부 출신의 어떤 기생에게 반해 애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기녀라고 해서 그저 적당히 놀다 버린 게 아니라 그녀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가 궁중악사 난계(蘭溪) 박연에게 오디션을 보게 하였다. 오디션에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뒤를 봐줄 요량이었다.
     
    난계 박연은 1411년(태종 11)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궁에 들어온 후 시강원 문학으로 대군 시절의 세종을 가르쳤다. 이후 세종 치세에는 집현전 학자 등으로서 일했는데 특별히 음악에 조예가 깊어 궁중음악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중국의 음악에서 벗어난 조선의 아악을 완성시키니 악기의 조율(調律)을 넘어 편경과 같은 악기를 제작하기도 하고, 악보의 찬집(撰集) 및 12율관(律管)에 입각한 곡들을 작곡하였으며,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와 같은 가무를 창안해 기존 기생들의 춤과 차별화시켰다. 한마디로 악성(樂聖)의 칭호가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된 박연 부부 초상
    신윤복 퐁속화첩 속의 '씽검대무를 추는 기생'

     
    초요경은 박연의 까다로운 오디션에 합격했다. 뿐만 아니라 박연은 초요경의 기예에 탄복하였던 바, 그녀를 특채하여 자신이 만든 음악과 춤을 전수하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궁중음악의 유일 전수자가 된 것이었다. 즈음하여 평원대군은 그녀를 면천시켜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소실로 삼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로부터는 2년 후인 평원대군이 천연두에 걸려 급서하고 말았다. 향년 19세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데려와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앞서 '북한산 기슭에 남은 계유정난의 흔적들'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화의군 이영은 평원대군의 배 다른 동생이었다. 아울러 호색한이었으니 부인 밀양박씨의 큰아버지 박대손의 노비 출신 첩을 빼앗은 사건, 조관(朝官)의 첩을 빼앗은 사건, 여염집 여인들을 궁중으로 몰래 데리고 들어와 사통한 사건  등을 저지른 화려한 여성편력의 소유자였는데, 초요경과는 평원대군이 죽기 전에도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편에 서지 않았고 단종복위 운동에도 가담하였던 바, 전라도 금산으로 유배를 갔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노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초요경도 하방(遐方)으로 쫓겨났으나 박연의 음악을 전수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던 까닭에 다시 면천되어 징악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기다렸다는 듯 계양군 이증(李璔) 이 덤벼들었고,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그것이 사실인지를 따져 물었던 것이었다. 이에 계양군이 펄쩍 뛰었다. 
     
     

    서울 진관동의 화의군 사당과 무덤

     

    하니, 이증(李璔)이 울부짖으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여,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변명하였으나 이증은 이날도 초요갱의 집에서 묵었다. 뒤에 판사(判事) 변대해(邊大海)가 몰래 초요갱의 집에 묵었다가 이증의 종에게 매를 맞아서 이 때문에 죽었다. 임금이 매양 종친(宗親)과 재추(宰樞)에게 기생을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말도록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는 사람의 유(類)가 아니다."
     
    하고 잔치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기생의 무리들로 하여금 분(粉)을 사용하여 그 얼굴을 두껍게 바르게 하니, 그 모양이 마치 가면을 쓴 것과 같았는데, 이들을 천시하고 혐오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조의 퍼런 서슬에 계양군 이증은 울부짖으면서 극구부인하였다. 하지만 바로 뒤에 쓰여 있는 글이 재미있으니 이증은 이날도 초요갱의 집에서 묵었다. 뿐만 아니라 초요갱의 집에는 변대해라는 관리가 와 몰래 자고 간 적도 있는데, 이것을 알게 된 이증은 힘 센 자신의 종을 시켜 변대해를 심히 패주었고, 변대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세조가 잔치 때의 기생들에게 분을 두껍게 바르게 한 것은 천시하고 혐오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미모에 반해 이성을 상실하는 자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양군 이증은 무사하였으니 일찌기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1등공신에 오른 녹훈 때문이었다. 대신 초요경만 장악원에서 축출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또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출현하였다. 좌의정을 지낸 신개의 막내아들 예장도감 판관 신자형이었다. 신자형 역시 초요경을 첩으로 삼았는데, 걸레 같은 계집을 데리고 살면서도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할 정도였던 바, 급기야 초요경의 요구에 정실부인을 밀어내고 그녀를 안방마님으로 앉혔다.

     

    초요경의 미색은 이렇듯 사람을 홀리기까지 했으니 그 미색에 이성을 상실한 자가 줄줄이 출현하였다. 그중 안계담이 대표적이었다.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은 제 숙모에 반해 출입이 잦았는데, 어느 날 숙부가 출타한 틈을 초요경을 덮치려 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머슴들에게 발각되었고, 흥분한 안계담은 자신을 말리는 머슴 2명을 찔러 죽였다.

     

    이같은 기상천외의 이야기는 금방 장안의 특급 소문으로 떠돌았고, 그 불똥은 신자형에게 튀어 가정을 돌보지 못한 죄로 면직되었다. 그리고 초요경은 다시 천민으로 강등되어 평양의 관기로 보내졌다. 계양군 이증은 끝내 그녀를 잊지 못하고그리워 했다. 하지만 세조의 퍼런 서슬에 찾아 갈수도 없어 그저 슬픔에 술만 퍼마시다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초요경은 이후 어찌 되었는지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계양군 이증의 무덤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최근 발길을 해보았다. 위치는 남양주시 일패동 산 37-1로, 바로 옆으로는 남양주 동일자동차학원이 자리한다. 또 근방 길가에는 필시 계양군의 군호에서 비롯되었을 계양산이라고 쓴 아래 표석도 서 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찾기가 결코 쉽지 않으니 만일 찾아갈 일이 있다면 사전에 약도를 자세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 (내비도 정확치 않다) 그리고 주변 농가의 개들을 특별히 조심해야한다. 갑자기 짖어대거나 묶여 있지 않은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경춘로 691 길에서 보이는계양산 표석
    표석 바로 옆 정자 뒤로 난 길을 따라로 올라가면 먼저 아내인 정선군부인 한씨 묘를 만날 수 있다.
    남편 때문에 무척이나 속상했을 부인이다. 정선군부인 한씨는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이다.
    묘표 / 정선군부인 청주한씨지묘
    장대한 크기의 석등
    세장(細長)한 조선 전기 스타일의 문인석
    주변의 이름 모를 무덤
    주변의 버려진 문인석
    기록에는 홍문관 대제학 서거정이 쓴 신도비가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부인 한씨 무덤 앞 숲속에 있는 이 좌대가 신도비와 세트였는지도 모르겠다.
    한씨 무덤을 나와 공장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당을 지으려다 만 듯한 이 건물을 만날 수 있는데, 그러면 이미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왔던 길을 돌아나가야 한다.
    이정표가 되는 나무 / 그 다음 포장도로에서 밑둥이 구멍난 이 나무를 만나면 목적지 부근이다. 나무 밑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왼쪽 비포장도로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오히려 얘네들을 만나면 성공이다.
    그곳에서 이 나무가 보이면 바로 맞은 편 창고 건물 사이의 좁은 천변을 따라 길이 있던 없던 무조건 걸어간다.
    그러면 어느 순간 왕가의 계곡 같기도 하고
    이스트 섬 모아이를 모아 놓은 듯한 곳이 나타나며
    거기서 계양군 이증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혼유석과 묘표
    마찬가지로 슬림한 문인석
    그곳에 해가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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