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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의 육성 양심고백 자찬묘지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5. 17:45

     
    앞서 말한 진산사건의 여파는 컸다. 임금 정조는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천주교도 윤지충과 그의 외숙부 권상연을 공개 참형시키고 그 목을 5일 동안 효수하자는 형조의 의견을 가납하며, 나아가 천주학 일당들을 발본색원토록 하였다. 정조는 도중에 그들이 신주를 불태운 것이 아니라 땅에 묻었다는 정정 보고를 받았지만 그래도 명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당시 정조가 내뱉은 분노의 일성을 앞서도 소개한 바 있다.
     
    "그들이 신주를 불에 태웠건 묻었건 따질 것 없이 사당 가운데 있던 신주에 의도적으로 손을 댄 것만으로도 잘못이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사형에 처하는 것만도 오히려 헐한 처분이라고 하겠다."
     
    정조의 명이 전라감영에 도착한 즉시 윤지충과 권상연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친인척에 의해 고발당한 그 두 사람은 앞서 30대의 곤장을 맞고 하옥된 상태였는데, 결국 좋은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풍남문 밖 형장으로 가면서도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중얼중얼 설교를 해댔다. 그리고 망나니의 칼이 휘둘러지는 순간, 예수와 마리아를 외치며 최후를 맞았다.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의 일로, 먼저 죽임을 당한 윤지충은 32세, 권상연은 40세였다.
     
     

    전주 전동성당의 윤지충 권상연 상 / 두 사람의 순교지인 남문 밖 형장에 프랑스 보 두네 신부에 의해 1914년 호남 최초의 성당인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두 사람의 매장지에 대해서는 완산동 용머리 고개에 가매장되었다 옮겨졌다는 소문만 있을 뿐 오랫동안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021년 3월 호남 출신의 복자 유항검의 집터가 있던 전북 초남이성지 일대를 정비하던 중 거의 온전한  3구의 오래 된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에 천주교 전주교구는 유골에 대한 해부학적ㆍ고고학적 정밀 감식을 했고, 같은 해 9월 1일 그 유골이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윤지헌은 윤지충의 동생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유해가 발견된 곳

     
    천주교 전주교구 측은 이때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도 참여를 의뢰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국군 유해를 발굴해 DNA분석으로써 유족을 찾는 역할을 하는 부대로서, 이는 그만큼 발견된 유골 감식에 만전을 기했다는 방증일 터였다. 그리고 유골의 DNA 분석 결과, 모집단으로 선정한 해남 윤씨 친족 5명, 안동 권씨 친족 5명의 DNA와 대부분 일치하는 대조 결과를 보였다. 이에 유골은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것임이 판명되었는데, 그것을 더욱 확실히 해준 것이 유골과 함께 출토된  3점의 사기 사발이었다. 
     
     

    유해 감식 과정을 설명하고 전북대 의대 송창호 교수
    참수의 흔적이 남은 윤치충의 목뼈와 사발지석

     
    이 3점의 백자사발은 피장자의 신원에 대해 쓴 이른바 사발지석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직경 15㎝ 가량으로 윤지충의 분묘에서 발견된 사발지석 바닥에는 성균관 생원 윤공지묘, 속명 지충, 성명(聖名, 세례명) 보록(保祿, 바오로)의 글자가 적혀 있었고, 권상연 야고보 분묘에서는 세례명 대신 자(字)가 적혀 있었으며, 윤지헌의 분묘에서는 제(祭)자만 적혀 있었다. 더불어 그들이 매장된  날짜가 안쪽에 빙둘러 써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묻힌 날은 임자년(1792년) 10월 12일이었다. 
     
     

    윤지충의 백자 사발지석
    권상연의 백자 사발지석

     
    이렇게 피장자의 신원은 확인되었으나 그러면서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피장자를 묻은 사람과 백자 사발지석을 묻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기록이 없음에도 피장자를 묻은 사람은 유항검이라고 비교적 쉽게 판명이 났다. 유항검은 일찌기 조선 천주교도 자체 모임에서 사제로 임명되어 호남지역에 파견된 사람으로, 그의 고향이 바로 전북 완주군 이서면이었다. 그가 전주 완산동 용머리 고개에 아무렇게나 묻혔던 윤지충과 권상연의 시신을 은밀히 자신의 고향 선산에 옮겨 묻은 사실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음이었다. 사발지석을 묻은 사람도 유항검이나 그의 가족들일 것이었다. (유항검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정약용이 소환되었다. 모대학의 교수가 이 글씨의 주인공이 정약용이라는 주장을 <가톨릭평화신문>에 기고한 것이었다. 그는 사발의 글씨와 다산 문집 등의 글씨를 비교한 결과를 증거로서 제시했는데, (어쩌면 비슷하게도 보이는) 그밖에도 정약용과 윤지충과의 관계(두 사람은 내외종 사촌지간으로 다산의 모친은 윤지충의 고모이다) 및 윤지충의 순교에 대해 가졌을 정약용의 부채감 등을 사발 제작의 이유로 들었다.(윤지충은 정약전·약용 형제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했으므로) 정약용의 집이 있는 마재와 도요지였던 광주 분원(分院)이 가깝다는 것도 증거 중의 하나였다.
     
    이어 그러할 가능성이 주요 언론에 보도되며 대중에도 설왕설래하였다. 하지만 단언커니와, 사발지석의 글씨가 정약용의 것이거나, 그것의 제작에 정약용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이 무렵부터 정적(政敵)인 남인 공서파(攻西派, 노론 벽파와 결탁한 남인 벽파의 무리)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사발지석에 글씨를 쓰거나 제작을 돕거나 하는 무모함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특히 관요(官窯)인 분원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니 (너무도 위험스러운 행동이다) 사발은 이장(移葬)을 도왔던 천주교도이자 도공이었던 어떤 사람이 지방요에서 제작해 묻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어찌 됐든 당시 처형된 천주교도 무덤에서 사발지석이 발견된 것은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
     
    정약용이 남인의 요주의인물이 된 것은 성균관 유생 시절인 1787년 성균관 부근 반촌(泮村)에서 서학(西學) 강의를 하고부터였다. 이후 다산은 17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도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다. 하지만 성균관 시절부터 다산을 총애한 정조에 의해 10일 만에 풀려난 적이 있다. 이후 주문모 신부가 붙잡혔을 때도 연루의 혐의를 받았으나 정조가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성 발령을 내림으로써 비껴갈 수 있었다.
     
    이 무렵 정약용은 임금 정조에게 장문(長文)의 사직 상소를 올리는데 내용에서 무척 진솔함이 느껴진다. 아래는 그 상소의 맨 마지막 부분이다. 
     
    "애당초 서학에 물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치기(稚氣)와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조금 성장해서는 문득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이미 분명하게 하고 분별하기를 더욱 엄중히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當世)에 나무람을 당하여 입신한 것이 한 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왓장처럼 깨졌으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강등해 바꾸어 주시고 이어 내쫓으시오소서."
     
    그 장문의 상소에서 진실성을 발견한 정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한다.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이 싹트듯하고, 종이에 가득 열거한 말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마라."
     
    정조는 그처럼 정약용의 든든한 바람막이 역할이 되어주었으나 1800년 정조가 급서하자 그 이듬해 2월 남양주 마재마을에서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왔다. 
     
     

    《 태학계첩 》 속의 &lt;반궁도&gt; 1747 년 / 성균관 부근의 반촌(泮村)을 그린 그림으로 반촌에는 성균관 유생들과 성균관의노비인 반민(泮民)이 살았다.
    겸제 정선의 &lt;의금부도&gt;
    서울 종각 제일은행 본점 앞의 의정부 터 표석

     
    정약용은 이때도 자신이 천주교도가 아님을 주장했다. 그는 천주교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서학과의 무관함을 강변해왔던 바, 대표적으로는 위의 <자명소(自明疏)>로써 배교를 분명히 했고, 특히 1801년 의정부 국문 때는 주위의 신자들은 물론 제 가족까지도 고변했다. (☞ '정약전·정약종·정약용 3형제의 천주교') 이 같은 그가 인척인 윤지충에 부채감을 가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배교를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자찬묘지명(광중본)>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5년 후인 1822년 회갑년에 <자찬묘지명>을 지어 그간의 인생을 돌이켜 회상하는데, 그는 거기서 "정미년(1787년) 이후로 4~5년 동안 매우 열심히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으나 1791년 진산사건 이후 나라에서 엄중히 금지하자 마침내 천주교에서 마음을 완전히 끊었다(遂絶意)"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한 그가 그가 임자년(1792년) 10월에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발지석을 제작하였다는 것은 또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남양주 여유당 생가 옆의 자찬묘비명이 새겨진 비석
    비석 앞 안내판의 &lt;자찬묘비명&gt;

     
    특히 1801년의 황사영 백서사건은 정약용으로 하여금 천주교에 넌덜머리를 갖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도망쳐 다니다 충청도 배론 동굴에서 비단에 이른바 백서(帛書)를 써 청나라에 있는 프랑스 신부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 내용은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나라 자체를 없애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만들어달라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그해 9월에 붙잡혀 압송되고, 이어 10월에는 경상도 장기현과 전라도 신지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용과 정약전이 다시 서울로 불려올라와 문초를 당했다. 노론 벽파인 사헌부 홍낙안과 사간원 신구조가 이 사건의 배후에 정약용 형제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 기회에 정약용을 아주 제거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들 형제는 거듭되는 고문 속에서도 무고함을 주장하였던 바, 결국은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로마교황청 박물관의 황사영 백서 / 신유박해 후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옛 문서들을 파기할 때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의 손으로 넘어갔고 이후 1925년 교황청으로 건너갔다. 62X38cm의 비단에 1만3천 자를 깨알같이 썼다.

     
    지금 남양주 조안면 마재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대홍수 때 떠나려 가 없어진 것을 1986년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다행히도 동아일보 등에 옛 여유당 사진이 남아 있었던 것인데, 이때 복원 상량문 현판을 퇴계 이황의 14대손이자 한학자인 연민 이가원 선생이 지었다. (글씨는 초서명필 운암 조용민 선생이 썼다) 그 상량문은 다산이 천주학을 접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다산이 천주를 믿은 것이 어찌 천주의 신통함을 흠모해서였겠는가? 실은 문명의 찬란함을 부러워 했던 것이라네. 세상 일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없었기에 한번 하늘의 뜻에 의지해 본 것이기도 하지."
     
    앞서 말했듯 정조는 학문을 장려하고 문예부흥을 이끈 중흥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중국, 특히 서양의 선진학문을 배격하고 성리학에 관한 책이 아니면 일체 들여올 수 없게 만든 사람으로, 혹시라도 중국책을 몰래 들여온 사람에게는 그 상관까지 연좌시켜 엄히 죄를 물었다. 아울러 중국학자와의 필담도 법으로 금지시키고 홍문관의 서양 관련서적들도 모두 태워 없앴다. 이러한 마당의 정약용에 있어 서학은 실로 한줄기 빛이었을 터였다.
     
     

    남양주 마재의 여유당
    여유당 현판
    여유당 상량문
    동양화의 농담과도 같은 여유당 앞 산하

     
    그런데 그의 무덤에서 십자고상(고난의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이 발견되었다니 참으로 터무니없다. 앞서도 사진과 함께 잠시 언급했거니와,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2017년 8월 웬 작은 청동 십자고상을 공개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에 있는 그의 묘에서 발굴돼 4대 후손이 기증했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다산은 죽을 때까지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나아가 핵심 지도층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이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이 정약용 후손의 증언으로서 명명백백해졌다. 정약용 가문의  7대 종손이 "다산의 묘소는 처음 장례를 치른 뒤 지금껏 이장이나 파묘한 적이 없어 내용물을 확인한 바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증언이 다산연구소 박석무 선생에 의해 채록되었던 것이었다.
     
    이후 문제의 십자고상은 고심 끝에 그해 바티칸 박물관에서 전시된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한국 천주교회 230년 그리고 서울」이라는 특별기획전 전시품목에서 제외됐다. 다산은 천주교를 진즉에 떠났음에도 대학자 정약용을 천주교도로 만들려는 노력은 떠나지 않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 때 정약전과 정약종은 유배지에서 다시 피체돼 올라와 국문을 받았고 이때 정적들은 그들 형제를 죽이려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재유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를 끝내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결정적으로는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중(仲; 약전), 계(季; 약용)가 함께 천주교를 믿지 않음이 한스럽다(仲季之恨不同學)"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들 약전·약용 형제는 국가중흥의 일환으로써 서학을 공부하고 받아들였음이었다.
     
    * 이것으로 긴 남양주 겨울여행을 끝내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계절도 벌써 3월, 이제 겨울도 끝났다.
     
     

    마현 고개 마재마을 표석
    마현 고개 아래로 내려가면 나타나는 마재성지
    마재성지의 사람 따르는 고양이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 가족들을 기리는 마재성지
    주변의 옛 능내역
    호수 같은 조안면 풍경
    마재마을 예쁨주의보!
    때로는 버스를 타고. (여기는 버스도 예쁨!)
    내부도 유니크함!
    물길은 여전히 환상적이다.
    다시 찾아가본 정약용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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