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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쌍벽을 이루던 동호의 정자/압구정동 압구정과 응봉동 황화정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3. 21:20

     
    앞서 조선시대 한강 동쪽에 존재했던  10개의 유명 정자에 대해서 지금은 잊힌 그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를 살펴보았다. (☞ '독서당·압구정·수운정·익평위정·유하정·홍가정·쌍호정·사의정이 있던 동호') 오늘은 그중에서 가장 유명세를 누렸던 압구정(狎鷗亭)과 황화정(皇華亭)의 두 누정(樓亭)을 찾아볼까 하는데, 물론 그 정자들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울러 황화정은 앞서 말한 동호의 10개의 정자에도 없던 생소한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한명회의 압구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한명회는 조선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료로서, 세조~성종 3대에 걸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으며, 이에 역사 드라마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빈출도는 (왕이 아닌) 신료로서는 으뜸이니 무려 2,300여 건에서 그 이름이 검색된다. 내가 '신료', 즉 신하를 강조함은 그가 때로는 왕권 위에 서기도 했다는 역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고 사후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는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한 까닭에 관료사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다만 관료 집안이라는 배경 덕에 음서(蔭敍)로써 38세 때인 1452년 겨우 경덕궁지기가 될 수 있었다. 경덕궁(敬德宮)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개성의 집으로, 궁으로 부르는 것은 잠저(潛邸)에 대한 경칭일 뿐 그저 빈 집 지킴이에 불과한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하지만 야심가 수양대군의 책사로 들어가 그 이듬해인 1453년 저 유명한 계유정난을 성공시키며 일약 스타가 된다. 그리고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기필코 왕위에 올랐던 바, 또한 수양대군(세조)의 등극에 일등공신이었던 한명회는 왕의 최측근 관료인 도승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병조판서· 도제찰사 등을 거쳐 1463년 좌의정, 1466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종9품 경덕궁지기에서 10년 만에 정1품에 오르는 전대미문의 인물이 된 것이었다.

     
     

    역대 드라마 중 가장 한명회에 잘 부합되었던 탤런트 정진 / MBC 대하사극 <설중매>의 한 장면이다. 그는 지난 2016년 암으로 별세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된 <설중매>

     

    뿐만 아니라 그는 왕마저도 제 뜻대로 세웠으니, 수양대군의 적장손인 월산대군을 밀어내고 그의 동생인 잘산군을 조선 9대 임금 성종으로 등극시킨 한명회의 위력을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연산군이 큰엄마 월산대군부인을 범했다는 썰은 사실일까?' / '풍월정 이정의 마포범주') 아울러 그는 두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국구(國舅)가 되었던 바, 2대에 걸친 임금의 장인으로서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법도 했다.
     
    압구정은 이 무렵 한강변에 지어진 대저택에 버금가는 별서였다. 또한 그 무렵 자신의 호를 사우당(四友堂)에서 압구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압구정은 오리와 비둘기가 노니는 정자라는 뜻으로서, 그 정자에 걸려 있었다는 '벼슬살이를 하며 오리·비둘기와 노닐다'(宦海前頭可狎鷗)라는 한명회의 자필 글귀는 그의 무한 권력을 방증한다. 말년 은퇴 후 이곳 정자에서 오리와 비둘기를 벗하며 한가로이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관직생활을 하면서 여흥도 함께 누리겠다는 자만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압구정의 이름을 송나라 재상 한기·韓琦가 말년에 지은 정자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설도 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 앞의 입구정 터 표석 / 압구정은 원래 현대아파트 11동과 12동앞 강변 쪽에 있었으나 표석은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에 있다.
    겸제 정선의 압구정도 / 남쪽에서 북쪽을 보며 그린 그림이다. (간송미술관 소장본)
    또 다른 압구정도 / 위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다른 위치에서 그렸다. (경북 왜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겸제의 또 다른 압구정도 / 북쪽에서 강 건너를 그렸다. (화살표가 압구정이며 지금 현대아파트 자리에 민가가 의외로 많다. 신기방기)

     

    그는 그만큼 자신만만하였으니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압구정의 위치이다. 앞서 말한 동호(동쪽변의 한강)의 정자들 중에서 압구정은 사실 가장 접근성이 떨어진다. 배를 타고 동호를 건너야 하는 애로가 따르는 까닭이니 한강의 많은 정자들 중에서 강 건너의 정자가 희소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 권력을 가졌던 한명회에게는 그와 같은 것은 애로도 아니었으니 그는 배를 타고 건너서라도 가장 풍치 좋은 곳에 정자를 마련하고 싶었고 또 그것을 실현시켰다.  
     
    사실이지 한강 북쪽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강 건너 남쪽에서 본 전경에 비할 바가 못된다. 북쪽편의 정자 뷰는 밋밋한 너른 벌과 멀리 보이는 관악산이 전부이지만, 남쪽 압구정에서는 바로 강건너의 달맞이봉과 응봉, 그리고 매봉산과 목멱산(남산), 멀게는 삼각산(북한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명회는 그와 같은 경치를 배경으로 압구정을 지었던 것이니 정자의 풍광은 중국에까지 소문났을 정도였다.  
     

     

    압구정 위치에서 본 남산
    압구정 위치에서 본 매봉산
    압구정 위치에서 본 두모포 달맞이봉
    남산, 매봉산, 달맞이봉, 응봉이 보이는 사진
    달맞이봉, 응봉, 북한산, 도봉산이 보이는 1960년대 사진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를 부르는 사단이 됐다. 그와 같은 소문 때문인지 1482년(성종 13)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이 압구정에서 놀기를 청했다. 임금 성종은 중국사신이 궁궐 대신 개인 정자에서 노는 것을 마뜩지 않게 여겼다. 그리하여 정자의 공간이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허락지 않았으나 사신은 그래도 압구정을 고집했다.(헐~ 얼마나 소문이 났으면. / 압구정의 이름을 앞서 욌던 명나라 사신 예겸이 지어줬다는 말도 있다)
     
    그러자 기고만장해진 한명회는 압구정 연회 때 칠 대만(大幔, 대형 장막)을 내어달라고 요구했다.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아니 임금만이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이었다. 성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애써 진정시키며 완곡히 거절했다.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하였거늘 왜 또다시 말하는가?  잔치는 제천정(濟川亭, 용산에 있던 왕실 부속 정자)에서 열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 후 이번에는 다시 한명회가 보첨만(補簷幔)을 요구했다. 왕실 전용의 용봉차일이 안 된다면 처마에 잇대 쓰는 장막인 보첨만이라도 내달라는 주문이었다. 성종은 재차 거절을 하는데, 이번에는 분노가 드러났다. 
     
    "이미 잔치를 차리지 않기로 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처마에 잇댈 장막이 필요한가? 지금 큰 가뭄을 당한 마당에 제 흥대로 노는 것도 마땅치 않거니와, 내 생각으로는 오히려 그 정자를 허는 것이 마땅하다. 압구정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듯하나 이 사신이 중국에 가서 또 정자의 풍광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뒤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 거기 가서 놀려 할 것인즉 이런 폐단을 미연에 막으려 하는 것이다. 또 강가에 정자를 꾸며서 유관(遊觀)하는 곳으로 삼은 자가 많다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 내일 제천정에 주봉배(晝捧杯, 낮참에 대접하던 술)를 차리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도록 하라!"
     
    하지만 한명회는 계속 어깃장을 놓았다. 제 권력에 취한 나머지 자신의 사위인 젊은 왕이 안중에 들어오지 않는 듯싶었다. 
     
    "신이 장막을 청한 것은 압구정이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의 아내는 본디 고질병이 있었는데 요즘 병증이 심해져 만일 제천정에서 연회가 열린다면 신은 가기 힘들 듯합니다."
     
    한명회는 결국 제 뜻을 꺾지 않았고, 성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한명회가 나가자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한강변에 정자를 지은 자가 누구누구인가? 이제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면 반드시 강을 따라 곳곳을 두루 노닐고 난 후에야 그칠 것이고, 뒤에 사신으로 오는 자들도 다 이것을 본떠 유람할 것이다. 그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거둥하였다가 마침 기쁜 빗줄기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記文)을 지은 정자다. 까닭에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제천정은 지금 용산구 한남동 한남하이페리온 아파트 입구에 표석만 남았지만, 희우정은 마포구 망원동에 망원정의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안에 희우정 편액이 걸려 있다.
    망원정에서 본 한강

     

    이에 승지들이 맞장구를 쳤다.
     
    "한명회의 말이 지극히 무례합니다. 중국 사신이 가서 구경하려 하더라도 아내가 참으로 아프다면 충분히 사양거리가 되겠거늘 오히려 대만과 보첨을 청했습니다. 그러다 성상께서 거절하자 말을 바꾸어 아내가 아파 제천정에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압구정 연회가 거부된 것을 언짢게 여겨서 나온 말일 것인데, 마음에 분노를 품어 언사 또한 공손치 못했습니다. 신하로서의 예의가 빵점입니다. 신하가 임금의 명이라면 천리길이라도 사양하지 않고 가야 하거늘,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연회 참석까지 거부했습니다. 관계 기관으로 하여금 국문케 하소서."
     
    한명회의 꽃길은 거기서 끝이 났다. 한명회는 모든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렇지만 아주 끝은 아니었으니 유배지로 가는 도중 사면령이 내려 풀려났는데, 아직까지는 국구로서의 외력이 작용한 듯하였다. 다만 영화는 막을 내렸으니 아무 직책에도 복권되지 못한 채 1948년 병을 얻어 사망했다. 당시 나이 73세로서 살 만큼 살았다 할 수 있었으며, 또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간 복받은 삶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가  꿈꾸었다는 아래와 같은 여생은 없었을 성싶었다.  
     
    젊어서는 나라 위해 바친 몸, 늙어서는 강변에 누워 동호를 보리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 이 글귀도 압구정에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들렸던 매월당 김시습이 두 자를 고쳐 '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도다'(靑春危社稷 白首汚江湖)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의 수난은 죽은 뒤에 시작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생모 폐비윤씨의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폐비윤씨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명회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을 베고 효수시켰다. 더불어 재산도 몰수하였던 바, 이후 압구정의 주인도 바뀌었으며, 3000금의 비용을 들여 압구정을 리모델링한 새로운 주인도 그곳에서 불과 열흘 정도를 살다 죽었다는 <부재일기(孚齋日記)>의 내용을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차후로도 압구정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였던 금릉위 박영효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했다 돌아왔을 때는 이미 폐허가 돼 있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달아났다 암살 위험을 감지하고 미국으로 도피한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부두노동을 하던 그는 귀족인 자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어느 날 다시 일본으로 가고 이후 친일 관료 박제순의 주선에 의해 고종의 사면령을 업고 10년 만에 귀국하게 된다) 
     
    하지만 압구정이 워낙에 유명했던 까닭인지 일제강점기 지명·지번 작업을 할 때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가 되었고, 1963년 1월 1일에 서울시로 편입되며 압구정동이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 일대에 현대건설이 시공한 현대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강남의 대표적 부촌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부장이던 시절로서 (그는 현대건설 평사원부터 사장까지 재임했다) 그 무렵 유력 권력층 등 방구 꽤나 뀌던 자들에 대한 특혜분양이 있었다.
     
    이 특혜분양은 한동안 사회적 이슈를 야기시켜 시끌벅적했으나 당시의 정치와 언론을 좌우하는 계층이 바로 특혜분양자들이었던 바, 곧 허룩해졌다. 훗날 현대그룹 회장이던 정주영은 어느 날 갑자기 대권레이스에 뛰어들며 판을 달궜는데, 뜻밖에도 3위를 하며 선전했다.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는 모르겠지만, 당시 그가 기댔던 '믿을만한 구석'에는 분명 현대아파드 특혜분양자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곧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으므로) 그리고 그 실무를 맡았을 이명박은 먼훗날 대통령이 되었지만 역시 끝은 좋지 못했다.
     
    멀다고는 했지만 사실 별로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니, 강 건너 한강 변두리 동네에서 압구정동 배밭이 아파트단지로 변화되는 과정을 목도한 나는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다. 요즘은 한명회가 지었던 압구정을 복원시킨다는 소리가 심심찮은데 소문대로 49층으로 재건축된다면 구색맞추기로써 가능한 스토리라고 본다. 하지만 왠지 쓴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저것 적다보니 어느새 길어졌다. 황화정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옛 압구정의 위치
    압구정 현대아파트 초기 분양광고 / 이때 많은 분량을 소화하기 위해 시세에 비해 낮은 가격인 28만원 정도가 분양가로 책정됐다. 이어 투기광풍이 불었고 높으신 분의 압력으로 현대 무주택 사원의 분양분이었던 660세대가 특혜분양되었다.
    너무도 유명한 압구정동 그 사진! / 1978년 촬영된 사진이다.
    특혜분양을 고발한 당시 신문기사
    상전벽해란 바로 이런 것일 터이다.
    정말로 아무 것도 없던 1960년대의 앞구정동 / 강 건너 오른쪽 구릉지대가 압구정동이다.
    같은 위치에서 찍은 최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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