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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전·정약종·정약용 3형제의 천주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2. 15. 19:46

     

    정약용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이며 관료였다. 그의 선조는 8대가 끊이지 않고 홍문관의 관리를 지냈다. 정약용은 그와 같은 내력에 강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으니 자신도 홍문관 관리가 되기를 희망했을 것임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거푸 낙방하였으니 그것이 무려 4번이었다.(그를 처음 본 정조 임금이 과거 응시 횟수를 물었을 때 4번이나 낙방한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쪽팔려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28살 되던 해 드디어 대과에 급제했다. 1789년(정조 13)에 치러진 알성시였다. 이후 그는 국왕 정조의 사랑을 받으며 관료로서의 입지를 굳혀갔으나 천주교 신앙을 가진 까닭에 정적들(특히 남인 공서파)의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임금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는데, 1800년 정조가 급서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약용이 남양주 마재의 고향집으로 내려온 것도 1800년이었다. 그 후 제 집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앞서 말했듯 여유당의 당호는 노자의 글에서 비롯됐다.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며(猶兮若畏四隣) 조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셋째 형 정약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1801년 1월 29일에 접하였다. 그리고 그 역시 다음 달 8일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갔다.

     

     

    여유당

     

    배 다른 맏형 정약현을 제외하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는 모두 천주교를 믿었고 당시 천주교는 사교(邪敎)로서 국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까닭에 그들 3형제는 모두 체포되었는데, 셋째 형 정약종의 경우는 집안에서 천주교 서적 및 교인들과 주고받은 서찰까지 모두 발각되어 한마디로 꼼짝 마라였다. 정약종은 괴수로 지목되었고 정약용에게는 이를 인정하라는 고문이 가해졌다. 하지만 정약용은 꿋꿋이 버티었으니 취조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실려 있다. 

     

    당상(堂上, 당시의 심문 담당관)이 그 서찰을 보았다면 알 것이 아니오?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언할 수 없소이다. 동생으로서 형을 증언할 수는 없소. 나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오. 

     

    위증을 하면 임금을 속이는 불충이 되고 사실대로 말하면 형을 고발하는 패륜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두고 저희들끼리는 '도의에도 벗어나지도 않고 거짓도 아닌 명답'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으나 정작 당사자인 정약종이 스스로 교인임을 실토하는 바람에 그 명답은 오답처리되었다. 정약종은 배교를 강요하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믿음을 견지해 결국 아들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서소문역사공원의 순교자 현양탑 /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에서 희생된 자들을 기려 1984년 세웠다. 조선시대 형구인 칼을 형상화했으며 박해 때 처형된 신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1784년 4월 이 땅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이벽과 함께 뱃길로 서울로 가던 중 두미협(남양주 팔당 부근)을 지나는 배 위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학에 대해 처음 들었으며 이후 이 땅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당시 이벽은 경기도 광주에 살았는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누이와 혼인하였고, 이승훈 역시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하였던 바, 정씨 형제와 이벽, 이승훈은 모두 친인척 관계에 있었다.

     

    정씨 형제 정약종은 가장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였지만 가장 신실하였으니,(그는 조선 천주교인으로는 최초로 순 한글로 된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를 지어 전교했다) 체포 이후 고문 속에서도 배교하지 않았음은 물론 박해의 부당함을 항변하였다. 그는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들과 딸 등도 모두 순교하였다. (그의 가족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시 순교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아들 정하상 바오로는 2014년 다시 순교복자로 시복되었다)

     

     

    정약용 가계도

     

    정약전은 신앙보다는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에 접근한 경우였다. 그는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전적·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남인 실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가 당시 중국의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번역한 에우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이나 <수리정온(數理精蘊)> 등의 책을 깊이 연구했던 것으로 보아서 그는 확실히 신앙보다는 학문으로 서학(천주학)을 받아들인 듯하다.

     

    신앙심이 깊지 않았던 정약전은 신유박해 때 순순히 배교하였고, 그 덕에 참형을 면하고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 <자산어보>는 유배생활이 너무도 심심한 나머지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조사·채집·분류하여 저술한 책이다. 그는 그와 같은 책을 쓰고 현지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등 무료한 나날을 극복하려 애쓰며 상경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그날은 오지 않았으니 1816년, 16년의 유배생활을 결국 죽음으로 마쳐야 했다.

     

     

    중국에서 번역된 에우클리드의 〈기하원본〉
    영화 '자산어보' 세트장으로 재현된 정약전의 유배처 '복성재'
    영화 '자산어보' 속의 정약전

     

    *  사족을 달자면 정약전의 저서 <玆山魚譜>는 '자산어보'가 아닌 '현산어보'로 읽혀야 옳다. '玆'의 훈과 음은 '검을 현'으로 천자문의 3번째 글자 玄과 같다. 그는 자신이 유배생활을 한 흑산도(黑山島)의 지명을 따라 책의 제목을 <玆山魚譜>라 했던 것인데, 책 이름에 흑산(黑山)을 쓰지 않고 현산(玆山)이라고 한 이유를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어둡고 두려운 어감이어서 현산으로 바꿨다”고 스스로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서문조차 읽지 않은 채 慈 혹은 滋 등의 독음만을 생각해 '자'로 읽고 있는 것이다.

     

     

    정약전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 <현산어보>

     

    정약용에 대해서 다시 말하자면, 그래도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약용다운 행동이었다. 그는 당시 의금부에 끌려온 사람 중 이가환, 이승훈과 더불어 '서학 삼흉(西學 三凶)'으로 불렸다. 그만큼 영향력 있는 행동을 많이 했다는 뜻일 터였다. (이승훈은 앞서 '정약용과 이승훈의 배교의 변명'에서 말한 것처럼 오락가락하다 죽었고, 이가환은 의정부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 곡기를 끊는 방법으로써 순교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정약용은 신앙과 신도들에 대한 배신을 서슴지 않았으니, 1801년 2월 26일 한날한시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된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홍교만 등의 신자들 중 대부분은 정약용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자들이었다. 이에 신자들 사이에서는 1,000명의 포졸보다 1명의 정약용이 더 무섭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다음은 취조 기록 <추안급국안>에 실린 정약용의 발언들이다. 

     

    "제 형인 정약종은 작년 여름 대간이 임금님께 보고한 후 양근에서 도망쳐 배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서울에서 이르러 전동의 청석동 오른편 서너 번째 집에 머문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결국 제 형인 정약종마저 버린다)

     

    "최창현은 괴수의 우두머리이며 황사영은 죽어도 변치 않을 것이니 비록 조카사위이지만 바로 원수입니다."

    "이백다(李伯多)는 곧 이승훈이며 권사물(權沙勿)은 권일신입니다. 백다와 사물은 곧 서양의 호입니다. 그때 저 또한 이 책을 보았기 때문에 대충 이러한 호들을 압니다."

     

    백다는 백다록(伯多祿, 베드로)을, 사물은 방제각 사물략(方濟各 沙勿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칭하는 말로, 그는 정약종의 편지에 등장하는 세례명 신자들에 대한 실명을 늘어놔 본명을 감추려는 신자들의 의도를 무력화시켰지만, 정작 제 이름인 정약한(丁若翰, 사도 요한)에 대해서는 끝까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나아가 그는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독창적인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천주학의 소굴을 샅샅이 찾아내는 데는 또한 방법이 있습니다. 최창현이나 황사영 같은 무리들은 비록 날마다 여러 차례 매질을 할지라도 결코 실토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종들이나 학생들 중에서 사악한 천주학에 깊이 물들지 않은 사람을 체포해 심문한 연후에야 그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는 믿음이 강한 윗대가리들을 취조하기보다는 믿음이 약하고 사리 분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노비나 어린이를 중점적으로 심문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편이 낫다는 묘책을 제안하고 있는 것인데, 그가 쓴 형법서 <흠흠신서>에 대해 설명하는 온라인 백과의 내용에서는 그가 이 책을 천주교도를 탄압하기 위해 썼다는 내용도 발견된다. 



    <목민심서>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책 외에도 정약용은 많은책을 저술하였으니 그것이 무려 500권이라 한다. 남양주 마재 정약용 유적지 판재 기둥에 써 있는 위의 책들은 잘 모르는 것들이다.
    남양주 마재 정약용 유적지에서 바라본 한강


    그는 이와 같은 몸부림 덕분에 마침내 참형을 면하고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제 형 정약전과는 달리 18년간의 긴 유배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마재의 여유당에서 살다 1836년 74세로 세상을 뜨는데, 귀향 이후의 정약용이 행적이 문제가 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가 끝내 배교자로 죽었는지, 아니면 회개하고 천주교로 원복 했는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이다. 정약용이 원복했다는 물증으로서 가장 강력히 제시되고 있는 것은 그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십자고상이다. 

     

     

    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전시 중인 정약용 묘에서 나왔다는 십자고상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2017년 8월 이 십자고상을 공개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에 있는 그의 묘에서 발굴돼 4대 후손이 기증했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신앙을 지니고 죽었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다산연구소에서 정약용 가문의  7대 종손에게 물었더니 "다산의 묘소는 처음 장례를 치른 뒤 지금껏 이장이나 파묘한 적이 없어 내용물을 확인한 바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유물은 그해 바티칸 박물관에서 전시된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한국 천주교회 230년 그리고 서울」이라는 특별기획전에서 예고와 달리 전시품목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이후 그 진위 여부는 지금껏 재론되지 않고 있다. 그의 신앙은 사후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듯하다.

     

     

    남양주 정약용의 묘
    정약용의 묘에서 내려본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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