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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살던 안국동과 원서동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2. 19. 16:12

     

    인현왕후와 장희빈 스토리는 사극의 단골 소재이다. 그래서 그들과 그들의 지아비였던 숙종과의 애증 관계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만 요약을 하자면, 평민 출신으로 궁의 나인으로 들어온 장옥정(장희빈)이 빼어난 미모로써 왕(숙종)의 마음을 빼앗고 급기야 인현왕후를 몰아낸 후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만 그 지나친 욕망이 오히려 왕을 정나미 떨어지게 만들어서 결국은 폐출되어 사사(賜死)되고, 억울한 인현왕후는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권선징악의 포맷이다. 

     

     

    역대 착한 캐릭터로만 그려진 인현왕후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 3인은 단지 애증의 관계만으로 얽혀 있지 않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뒤에는 권력 독점을 노리는 정치가들이 있고, 또 그들의 이전투구가 있으니,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오히려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쪽이다. 아울러 인현왕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현모양처요 자애로운 국모 이미지가 아니고 장희빈 역시 희대의 악녀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인식되어 있는 것은 오롯이 <사씨남정기>, <인현왕후전>과 같은 소설류의 책들 때문이다.

     

     

    역대 악한 캐릭터로만 그려진 장희빈

     

    그 책들은 소설이므로 필연적 재미를 동반하는 삼관관계에 초점을 맞췄고, 인현왕후는 핍박받는 착한 여인으로, 장희빈은 희대의 요부이자 악녀로 그렸다. 그 책들이 유행한 건 장희빈이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그 배후였던 남인들도 몰락한 후로서, 이때 다시 실권을 잡은 서인 일파는 이와 같은 책으로써 여론전을 전개한 것이었다. 즉 구관이 명관이라는 것으로, 자신들 서인이 정치 대안으로써 유일하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정치가들의 상호 비방전과 모략 싸움은 오히려 나이브한 편이다.

     

    ※ <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은 1687년 당시 숙의 장씨(훗날의 장희빈) 세력과의 싸움에서 밀려 선천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이듬해 남해로 유배되어 생활하다 병사하였다. <사씨남정기>는 그가 남해 유배생활 동안 집필한 소설로서 주인공인 착한 사씨(사정옥)는 인현왕후를, 사씨를 내쫓는 악독한 첩 교씨(교채란)는 장희빈을, 교씨에게 휘둘리는 무능한 남편 유연수는 숙종을 모델로 했으며, 무대는 명나라 중기의 중국 금릉(난징)이다.

     

    저자 김만중은 서인의 핵심인물이던 김익겸의 아들로서 자신도 송시열 계열의 서인으로 활약했으나 남인과의 정쟁에서 밀려 유배를 갔고 결국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이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세력을 잡은 서인은 김만중의 언문(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활용하여 대중에게 여론전을 펼치며 환국 이후의 정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
    어린이 만화로도 등장한 <사씨남정기>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현종의 원자로 태어나 그 정통성을 이용, 집권 46년간 철권통치를 하였다. 원자 아기씨는 부모가 왕과 왕비일 때만 허용되는 고귀한 명칭이다. 원자의 사전적 의미는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을 이르던 말이니 왕의 맏아들은 모두가 원자일 것 같지만 실제로 원자로 태어난 왕은 연산군, 인종, 숙종과 조선왕조 마지막 왕 순종 4명에 불과하다. 

     

    즉 출생 당시 아비가 왕이 아니거나 어미가 왕비가 아니면 이 명칭을 얻을 수가 없으니, 조선 10대 왕 연산군이 신료들의 간섭을 누르고 철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도 왕조사상 유일한 적장자였기에 가능했다 할 수 있다. 건국 후 10대 만에 처음으로 등극한 적장자 출신의 임금이기에 더욱 고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연산군은 자신의 정통성을 과신한 나머지 병권의 장악에 소홀했고 결국 반정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12대왕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 태어난 원자였으니 병약했던 관계로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죽었다. 조선의 왕 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짧았던 비운의 왕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의 적장자였으나 권력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오명만을 짊어져야 했다. 결국 원자로서의 홍복을 누린 자는 숙종이 유일했던 셈이다.

     

    하지만 숙종은 원자 아기씨를 얻지 못했다. 숙종은 1671년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김씨와 혼인했다. 인경왕후 사이서는 아들 없이 두 딸만을 얻었다. (그 딸들은 일찍 죽었으며 인경왕후 역시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가 계비가 되었고 민유중의 민씨 가문은 크게 힘을 얻었다. 다만 5년이 지나도록 인현왕후가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걱정이었다.  

     

     

    인현왕후가 살았던 의주로 1가 수렛골 /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수렛골에는 인현왕후 민씨가 태어난 집터가 있고, 1761년에 영조(英祖)가 이곳에 행차하여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仁顯王后誕降舊基)이란 여덟 글자를 써 비석으로 세워 놓았다고 전해진다. 이 비석은 언제 없어진지 알 수 없다. 이 일대에는 고관대작이 많이 살았고 이에 수레들의 행차가 빈번해 수렛골로 불렸다는데, 안내문에는 자못 다른 글이 쓰여 있다.
    표석 뒤 순화동 4번지 3의 평안교회 자리에 인현왕후가 태어난 집이 있었다. 중앙일보 사옥 건너편에 위치한다. (인현왕후의 사가는 이후 홍씨에게 인계되었으며, 안채만 40간이 되는 규모로서 사랑채 앞에는 큰 연못도 있었다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러자 인현왕후는 종사(宗社)를 위해 궁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게 했다. 이 여인이 바로 장희빈으로 실록에 용모가 아름답다(頗有容色)고 표기된 유일한 여성이며 평민 궁녀 출신으로 정실 왕비가 된 유일무일한 여성이다. 게다가 장옥정은 끼가 넘쳐 숙종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는데, 그것을 과시하고 싶었음인지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면서 인현왕후의 처소까지 뛰어들었다. <숙종실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금님께서 저를 너무 괴롭히십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나, 대개 내전(인현왕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정옥정의 염장지름에 인현왕후는 천불이 났을 터이다. 하지만 그녀도 두고 보고만 있지 않았으니 

     

    어느 날 중전이 명하여 (장씨의)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중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따로 후궁을 선발할 것을 권하니 김창국의 딸(영빈 김씨)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마침내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내명부 종4품의 품계)으로 삼았다. 이후 장숙원의 세력은 결탁하여 밤중에 모여 중전(인현왕후)을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하였다.  

     

    중전이 궁녀의 종아리를 때리는 일은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구한말의 명성황후만이 유일했다. 이것은 인현왕후 역시 독한 여자였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나아가 그는 장옥정의 대항마로써 새로운 후궁(영빈 김씨)을 들였지만 숙종이 워낙 장옥정에 빠져 있는 관계로 아무런 소득을 거둘 수 없었다. 아니, 이같은 적극성은 오히려 장숙원 측의 반격을 불러왔으니 역으로 인현왕후를 폐위시켜 궁에서 내쫓을 궁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궁리는 소의(내명부 정2품의 품계) 장씨가 숙종 14년 윤(, 훗날의 경종)을 낳으며 현실화되었다. 왕자를 생산한 장옥정은 정1품 희빈이 되었고 이윤은 원자로 책봉됐다. 이제 장옥정과 결탁한 남인의 세상이 온 것이었다. 서인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왕비가 있는데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세우면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오히려 숙종의 화만 돋웠으니 그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고 결국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에 서인의 세력은 몰락하고 인현왕후 역시 폐위되어 궁에서 내쫓겼다.

     

     

    제주 오현단의 송시열 유허비 (왼쪽)
    제주 오현단의 '증주벽립' 글자 / 송시열의 유배지 제주도에 남은 그의 필적이다.

     

    숙종 15년(1689) 5월 2일자 <숙종실록>에는 흥미롭게도 숙종이 작성한 인현왕후 폐위 사유가 적힌 비망기(備忘記)가 그대로 실려 있다. 

    (인현왕후는)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략을 만들어내 역대 왕과 왕후의 명령을 꾸며 공공연히 큰소리로  "그(장옥정)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其八字本無子, 主上勞而無功) 중궁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선조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이런 말은 삼척동자라도 믿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물며, 이제 조상들이 도우셔서 세자가 태어남으로써 (왕후의) 흉한 계략이 더욱더 드러났으니 누구를 속이겠는가?

    이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대신해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하찮은 궁녀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왔으나 마침내 왕비에까지 오르게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성이었다. 반대로 인현왕후는 서인의 신분으로 전략한 채 친정인 안국동 사저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것이 장장 5년이었다. 1689년(숙종15)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득세한 이 사건을 기사년(己巳年)에 일어난 국면전환이라 하여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부른다. 

     

     

    폐위된 인현왕후가 6년간 칩거했던 곳 / 인현왕후는 왕비가 된 후 친정을 위해 이곳 덕성여고 자리에 대저택을 지었으나 자신이 이곳에 유폐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덕성여고 정문 앞의 감고당터 표석 / 영조는 이 저택에 고통을 감내한 집이라는 의미로 '감고당'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안국동 감고당길
    2006년 여주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한 감고당 / 두 사람 모두 여흥 민씨이다.

     

    하지만 유폐가 영원하지는 않았으니  장옥정의 예쁜 얼굴 뜯어먹기에 식상하고 그녀의 부덕함에 염증을 느낀 숙종은 5년 후인 숙종 20년 다시 환국을 단행했다. 1694년 갑술년의 갑술환국으로, 이에 그간 기고만장하여 전횡을 휘두르던 남인 세력은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하였다. 그러면서 인현왕후를 다시 궁으로 모셔와 왕비로 삼았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인현왕후 잇몸 만개

     

    중전 장씨는 내쫓기지는 않았지만 품계는 희빈으로 격하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후인 1701년 인현왕후는 34살의 젊은 나이로 소생 없이 세상을 뜨는데, 그의 죽음에 장희빈이 저주가 일익했다는 것이 관련 사극의 주요 테마이다. 자신의 처소인 창경궁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를 행하는 모습은 익숙한데, 실제로 <숙종실록>에는 장희빈 궁녀들의 국문 과정에서 인현왕후의 거처인 대조전과 통명전 밑에 각종 흉물을 묻은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기록돼 있다. (진짜로 묻었는지 고문에 못 이긴 강요된 자백인지는 모르겠지만)

     

    숙종은 결국 장희빈의 죄를 물었으니 인현왕후가 죽은 그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당시 사약 사발을 패대기치고 행패를 부린 까닭에 억지로 입을 벌려 사약을 들이붓는 장면 또한 익숙하지만, 사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울러 숙종은 민생을 돌보는 정치는 외면하고 여인들과 놀아난 바람둥이 왕 같지만, 살펴보자면 왕 주위의 여인들은 오히려 정치의 도구로, 환국에 이용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고인 물은 썪는 법..... 숙종은 재위기간 동안 3번의 환국을 단행하여 집권층을 물갈이한 고도의 정치꾼이었던 것이다. 그가 둔 후궁의 수가 조선 역대 왕들의 평균보다 적었다는 사실이 뜻밖으로 들리는 것 역시 드라마에 단련된 까닭이랄까....

     

     

    창경궁 통명전
    부두술을 행하는 희빈 장씨
    사약을 거부하는 희빈 장씨

     

    장희빈이 살았다 전해지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은 조선시대 궁에 의지해 생활하던 하급 관리나 궁녀들이 많이 기거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향은 아니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곳은 은평구 불광동으로 그녀의 친정이 있던 관동 마을에는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폐교된 은혜초등학교가 장희빈의 생가 자리라고 한다) 관동(館洞)은 장희빈이 입궁한 후 관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 생긴 지명이며, 어수정은 장희빈 사후 이곳에 들렀던 숙종이 마신 우물물에서 유래되었다.  

     

    장옥정은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빼어난 미모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에 궁녀로써 궁에 들어가는 어렵지 않았지만 사대부의 자식이 아닌 탓에 후궁이나 왕비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끼로 왕의 마음을 빼앗았으니 21살 초절정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던 옥정에 숙종의 넋이 주소를 상실한 것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하지만 그만큼 경계하는 자도 많았으니 대표적으로 대왕대비 명성왕후(숙종의 모)는 장옥정을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여겨 궁 밖으로 내쳤다. 문자 그대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미색이라는 것이 죄였다. 

     

    쫓겨난 장옥정은 친정인 관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체면치레가 심하고 자존심 강했던 그녀에게 친정행이란 쪽팔림을 넘어 죽음보다 못한 일이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녀는 이런 생각 속에 창덕궁 밖 중인(中人) 동네인 원서동에 머물며 권토중래를 꿈꿨다. 원서동은 비원(秘苑, 창덕궁)의 서쪽에 있다 하여 일제강점기인 1936년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는 원동(園洞)이었다. 원동에는 창덕궁 안을 돌아 흐르던 소하천이 지나갔는데 수량 많았던 그 하천의 빨래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장옥정은 이곳 빨래터에서 담장 너머의 궁궐을 바라보며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것인데, 오매불망의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1686(숙종 12) 원수와 같았던 명성왕후가 죽었던 것이니, 이후 그녀는 다시 숙종의 부름을 받아 옥교(가마)를 타고 궁으로 들어갔다. 나이 28살 무렵으로 이후 그녀는 바라던 대로 조선의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마흔살 무렵 사약을 받고 죽었다. 

     

     

    원서동 빨래터와 동네 주변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는 원서동 빨래터
    원서동 뻘래터 안내문
    빨래터 옆 창덕궁 선원전 외삼문
    선원전 외삼문 위쪽에 자리한 백홍범 가옥
    백홍범 가옥은 구한말의 상궁이 살았던 집으로 궁녀가 많이 살았던 원서동의 전통을 보여준다.
    대빈궁 / 청와대 옆 칠궁 내 장희빈의 사당이다. 국모를 지낸 여인답게 사당 이름도 대빈궁이다. 그의 아들 경종이 즉위 후 어머니를 옥산부대빈으로 높힌 까닭이다. 작년 여름 청와대 관람 때 찍은 사진이다.
    궁궐 한옥지붕 및 왜식지붕까지 어우러진 원서동 스카이라인
    깜놀! / 개인집과 붙어 있는 창덕궁 요금문이다. 장희빈이 축출된 역사적인(?) 문이나 주변은 민가와 엉겨 있다. 주소까지 엄연한 개인집으로 사유재산이니 어쩔 도리는 없다. 이 사진은 작년 겨울 눈 왔을 때 찍은 것인데 여름철에는 오른쪽 문울 통해 집 안까지 들여다 보인다. 이 집은 일종의 다가구 주택으로, 해방 후 요금문 앞을 흐르던 소하천이 복개된 지면에 세워졌다 한다.
    과거로 들어가는 시간의 문, 원서동 입구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원서동 골목의 창덕궁 담장
    웬 장동건? / 장희빈의 오빠로서 벼락출세를 한 장희재라는 인물이 있었다.미남 배우 장동건은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미남 미녀의 유전자가 이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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