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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서학, 그리고 진산사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2. 28. 18:30
다산 정약용이 걸은 천주학의 발자취를 계속해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앞서 '정약전·정약종·정약용 3형제의 천주교'에서도 언급했고, '정약용과 이승훈의 배교의 변명'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의 배교의 변(辯)을 들여다보았지만 그가 배교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약용은 선구자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자였음에도 배교에도 적극적이어서 많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음을 이미 주지한 바 있다.
앞서 '남양주 겨울기행 - 여유당과 수종사 & 다산 정약용'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산이 천주교를 처음 접한 것은 고향인 남양주 마재에서 큰형수(큰형 정약현의 처)의 상을 치르고 돌아가던 두미협(현재 남양주 팔당 부근) 배 위에서였다. 그는 이때 인척인 이벽(큰형수의 동생)으로부터 종형인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후 이 두 사람(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를 신봉하게 된다.
※ 이벽(1754~1785)은 이 땅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던 사람이다. 그는 병지호란 이후 심양에 볼로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할아버지 이경상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배웠고 이후 정약용의 매형이었던 이승훈에게 전도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를 연다. (☞ '천로역정에 섰던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
정약용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783년 소과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대과 시험을 준비하던 23세 무렵의 일이었다.
"우리 형제는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들었다. 당시의 경이로움은 마치 깜깜한 밤하늘에서 끝없는 은하수를 보는 듯하였다." (惝怳驚疑 若河漢之無極)
정약용은 이벽의 말에 크게 놀람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 경이는 아닐지니, 이는 위의 말이 적힌 <선 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 먼저 간 가운데 형 정약전 묘지명)>이라는 글에서 파악된다.
이후 종형은 이벽과 함께 하며 별도의 천문지리와 기하와 수학 등의 학문에 대해 들었다.(嘗從李檗遊 聞曆數之學) 이후 다시 서울로 찾아가 그로부터 <천주실의>와 <칠극(七克)> 등의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기울기 시작했다.(始欣然傾嚮)
동양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던 예수회(제수잇) 선교사들이 그러했듯 이벽도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들이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필시 수학이나 과학 등 동양에 대해 우월했던 서양학문에 대해 설파했을 것이고 그 우월한 학문을 보유한 서구의 선진국들은 모두 천주교를 믿는다는 식으로 시작했을 터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정약용은 물론 정약전도 신앙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니, 이는 윗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다만 이때 제사를 폐했다는 말은 없었다.(而此時無廢祭之說)
앞서도 말했지만 정약전은 신앙보다는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에 접근한 경우였다. 그는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전적·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남인 실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가 당시 중국의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이나 <수리정온(數理精蘊)> 등의 책을 깊이 연구했던 것으로 보아서 그는 확실히 신앙보다는 학문으로 서학(천주학)을 받아들인 듯하다.
알다시피 정약전은 천주교를 믿은 죄로, 그러나 배교가 인정되어 죽임은 당하지 않고 전라도 신기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정약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갔다. 정약전은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생을 다하였다. 반면 정약용은 풀려나게 되는데, 이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 형 정약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표했다.
"오호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인 데다 겸하여 지기(知己)까지 되어준 것도 이 나라 안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종형의 사후 나 약용은 아무도 이해해 주는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며 모진 목숨으로 지금까지 7년이나 살았다.”
즉 1816년 정약전 타계 뒤 7년째인 1822년 회갑 년을 맞은 정약용이 자신의 일대기인 <자찬묘지명>을 짓고 이어 정약전의 일대기를 <선 중씨묘지명>이라는 이름으로써 피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순교한 셋째 형 정약종과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정약종은 정씨 형제 중에서 가장 늦게 천주교에 입문했음에도 가장 신앙심이 깊었고 결국은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믿음은 어느 정도였을까? 둘째 형인 정약전 정도였을까, 아니면 한때는 셋째 형 정약종만큼이나 신실했을까? 우선 정약전에 가깝다고 비정해보면 그 이유는 다분히 임금 정조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내막은 우리의 상식과 대치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조를 학문을 장려한 문화 군주,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성군쯤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절대 오해다. 그가 장려한 것은 기존 성리학 틀 안에서의 학문일 뿐 서양학문은 철저히 배격했다. 정조는 집권 10년째 되는 해인 1786년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김이소가 말한 중국 서적 금지 조치를 옳다구나 따랐다.
김이소 : "근래 연경(북경)에서 사오는 책들은 모두 우리 유가(儒家)의 글이 아니고 대부분 부정한 서적들입니다. 지금 이단이 치성하고 사교가 유행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그 폐해가 지난해 이미 드러났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별도로 의주에 조치를 내리시어 구입해서는 안될 서적을 사들여온 자들을 살펴서 엄히 금지하게 하소서."
정조: "아뢴 바가 매우 좋다. 그에 따라 시행하라."
사간원 수장 대사간 심풍지 또한 중국 서적의 유입을 막도록 주청했는데, 이에 정조는 더 나아가 "금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 처벌 방안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가 유입을 막을 책은 비단 천주학에 국한되지 않고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적은 책은 모두 배격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수입금지령은 1792년 비변사를 통해 법제화되었으니, 국경을 넘어 오는 모든 자들에게 검문검색이 실시되었고 유학에 관한 서적이 아닌 책은 모두 압수되어 불태워졌다. 아울러 그와 같은 책을 가져온 자는 장을 치고 상관도 연좌시켜 죄를 물었으며, 적발에 실패한 의주 부윤(의주 시장)은 처벌받았다.
이렇게 되자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 부강해지자는 이른바 북학파들의 이상은 좌절되었는데,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 1791년(정조 15)에 윤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2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정약전· 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에 입문했다. 그는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정약용의 권유로 중국 현지에서 거듭 세례(견진성사)를 받고 왔다. 이후 1791년 어머니 권씨가 죽자 기존의 예법으로 장례를 치렀지만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정조 15년 같은 신자인 외사촌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전주감영으로 붙잡혀 가 참형당했다.
이때 대사간 신기는 아래와 같이 말했고 정조는 적극 동의했다.
신기 : "권(權) · 윤(尹) 양적(兩賊)은 유학자의 이름을 지니고 또 내력도 있는 집안입니다. 설사 그들이 요망한 학술을 주장하고 유학을 배반하기만 하였더라도 사실 천만 가증스러울 일인데, 신주를 멋대로 태워 버리고 부모의 시신을 팽개쳐 버렸으니, 이는 실로 강상(綱常)의 죄인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순간도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권 · 윤 양적을 엄히 형문(刑問)하여 실정을 알아내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을 신칙하고 경외에서 몰래 이 학술을 숭상하는 자들을 특별히 엄히 찾아내게 하여, 그 책을 불태우고 그 사람들을 벌주어 근본을 뽑아버리고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정조: "진술한 여러 조항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덧붙여 진술한 이단의 폐단은 바로 일전 대간의 대답에서 자세히 들은 일이 있으니 금수나 오랑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의정부로 하여금 관찰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하게 하겠다. 경외에서 몰래 숭상하는 무리들도 역시 요청한 대로 엄히 금지시키고 발견되는 대로 처단하게 하겠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좌의정 채제공의 의견을 받든 형조에 의해 처형되었다.
형조판서 김상집 : "권 · 윤 양적의 죄를 좌의정 채제공과 의논드렸습니다.... 그 양적은 여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대시(不待時)로 참형에 처하고 5일 동안 효수함으로써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강상(綱常)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과, 사학(邪學)은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정조 : "그들이 신주를 불에 태웠건 묻었건 따질 것 없이 사당 가운데 있던 신주에 의도적으로 손을 댄 것만으로도 잘못이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사형에 처하는 것만도 오히려 헐한 처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렵 정약용은 채제공과 함께 수원 화성의 착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그 두 사람은 2년 반 동안 정조의 야심작인 화성을 완성해내는데, 만일 정약용이 당시에도 천주교를 믿었다면 그 시간 동안 동고동락했을 채제공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참고로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물음에 답한 채제공의 말은 다음 같았다.
"그 학술은 오로지 천당과 지옥의 설이 중심인데, 그 본뜻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자는 것에서 생긴 듯하나, 그 폐단은 마침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른바 아비가 없다고 한 말은, 아비로 섬기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중에 상제(上帝)를 높여 첫째가는 아비로 삼는 것은 그나마 서명(西銘)의 ‘하늘을 아버지라 부른다[乾稱父]’는 뜻에 속하지만, 조화옹(造化翁)을 또 아비로 삼고 낳아준 아비를 세 번째 아비로 삼는 점에 있어서는 윤리가 없고 의리에 어긋나는 설입니다. 우리나라는 예의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요망한 설에 미혹되니 실로 가증스럽습니다."
정약용은 화성 건축에 있어 <기기도설(奇器圖說)>과 같은 책을 참고해 거중기, 녹로와 같은 중장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장비들을 이용해 10년 예정이었던 화성 건축의 공기를 2년 9개월로 크게 단축하고 비용 또한 절감시켰다. 정조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 거중기를 써서 돈 4만 냥을 절약했구나."
하지만 그 <기기도설>이란 책 역시 중국에서 들여온 온 과학서적으로 정조가 규장각에 있던 것을 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책의 원천은 서양기술이었다. (독일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가 쓴 책이다) 정약용은 이렇듯 서양기술의 위력을 몸소 체득했던 바, 그 서구 나라들의 근간을 이룬다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해석하는 한 서구 나라들에 있어 천주교는 조선의 유교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유교는 시대를 이끌지 못하고 있었다.아마도 정약용은 끝없는 달레마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조 사후 신유박해에 이르러서는 미련 없이 배교하는데, 그 이유를 찾아 다시 그의 고향집인 마재(馬峴)의 여유당(與猶堂)으로 가보자. 어쩌면 그 속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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