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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구유(≠양성애자) 사방지 사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19. 18:04
서울시 방학동 대로변에 잘 정비된 조선시대 무덤 2기가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이나 산속에 있지 않고, 말한 대로 대로변에 위치해 눈에 잘 띈다. 무덤의 주인은 연창군 양효공 안맹담(延昌君 良孝公 安孟聃, 1415~1462)과 그의 부인인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이다. 사실 두 사람 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반면 무덤의 규모나 석물은 한 눈에도 대단한 사람의 유택이라는 느낌을 준다.
쌍분의 무덤 곁에는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는데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입구에 서 있는 신도비이다. 1466년(세조 12) 세워진 이 신도비는 보호각 같은 것이 없음에도 받침인 귀부와 비신, 머리장식인 이수가 거의 완벽하다. 귀부는 매우 안정성이 있으며 거북이 조각은 과장되지 않고 사실감을 주는데, 종로 탑골공원 내에 있는 원각사지탑비의 거북이와 흡사 모자(母子)간이다. 원각사는 1468년에, 안맹담 신도비는 1471년 세워졌다.
정인지가 짓고 안맹담의 넷째 아들 안민세가 썼다는 비문의 글씨도 유려하다. 안맹담이 명필이었다 하더니 그 아들도 못지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정작 이 무덤 중에서 주목을 받는 대상은 죽성군 안맹담(연창군 양효공은 훗날 내려진 작호이며 원래는 죽성군으로, 정의공주와 결혼을 하며 얻은 군호이다)이 아니라 그의 아내 정의공주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리 낯선 인물도 아니니, 그녀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문종의 동생이자 수양대군의 누이이며 단종의 고모이기도 하다.
그러니 세종대왕의 사랑이 각별했을 터, 1428년 안맹담과 결혼할 때 한강의 저자도(楮子島)와 태종의 이궁(離宮)으로 쓰이던 낙천정(樂天亭) 등을 혼수로 가져왔다. 정의공주는 훗날 그중의 낙천정을 넷째 아들 민세에게 주었고 이후로는 양민세의 집안에서 소유했다. 낙천정은 언제 사라졌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복원된 지금의 정자보다 훨씬 큰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지금의 낙천정은 1991년 복원되었다. 복원 당시 부지가 마땅치 않았는지 원래 위치에서 200m나 떨어진 자양동 현대강변아파트 한쪽 궁벽한 장소에 세워졌다. 까닭에 동네 주민들조차도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하는 낙천정은 복원 후 서울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됐지만, 2009년 고증 미흡의 이유로 지정에서 취소되며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 건물로 남아 있다.
총명하고 지혜로웠다는 정의공주는 특히 역산(曆算)에 능하여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이미 여러 번 말했거니와 조선 전기의 천문역법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는데 그 정점에 있는 책력이 '칠정산'(七政散)이다. 세종 때의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이 함께 편찬한 역법서(曆法書)의 이름이기도 한 그 책에는 태양과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7개 천체의 움직임, 즉 '칠정'과 함께 1년을 365일 2,425분으로 규정한 책력을 실었다. 정의공주는 책력의 역산에 도움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아울러 음운(音韻)의 해석에 뛰어나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남편 안맹담의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에 실려 있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다만 <죽산안씨대동보>가 편찬된 것이 1976년이다 보니 신빙성의 문제가 따른다. 그러나 여타의 다툼 없이 그녀의 역작으로 전해지는 책이 보물(제9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녀가 먼저 죽은 남편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 편찬한 경전 <지장보살본원경>이 그것으로, 이 하나만을 보아도 그녀가 대단한 식자(識者)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과 한글 창제에 일조한 일이 유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것을 따져볼 일이 없다. 오늘은 단지 그 집 노비였던 사방지(舍方知)에 대해서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방지는 특이하게도 음양동체(陰陽同體)로 태어났다. 음양동체는 요즘 말하는 양성애자와는 다르며 트랜스젠더와 같은 부류는 더더욱 아니니, 생물학적인 용어로는 자웅동체(hermaphrodite)에 해당된다.
※ 원어인 '헤르마프로디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사이에서 태어난 암수한몸의 신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말로는 '양성구유'(兩性具有)나 ‘남녀추니’ 혹은 ‘어지자지’라고 불린다.
'헤르마프로디테'는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혹간 태어나기도 하는 바, 출생 후 어느 쪽의 생식기가 더 우월한지 외부생식기의 상태를 보고 외과적 수술로써 우세한 쪽의 생식기를 선택하고 그 반대쪽을 제거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남겨진 생식기관은 선택된 성의 정상적인 생식기관과 유사하게 발달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그리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조 때 이와 같은 외과수술이 존재하지도 않았겠거니와 설령 그것이 가능했다 해도 은폐가 우선되었을 터, 남 모를 아픔을 지닌 채 성장했을 것이다. 사방지 역시 그 양성의 성을 모두 지닌 채 성장하였는데, 남자의 생식기가 우세한 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니 이는 1462년 4월 27일 사헌부 장령(掌令) 신송주의 증언이 뒷받침한다.
"여경방(餘慶坊, 지금의 세종로사거리 남쪽 동네)에 사는 고(故) 김구석의 처 이씨의 노비 사방지가 여복(女服)을 하며 종적이 괴이하다 잡아다 살펴보았더니, 과연 여장을 하였는데 몸은 음경과 음낭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가 남자로서 여장을 한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가두어 고신(栲訊)하게 하소서."
이에 승정원(承政院)이 조사한 바는 다음과 같았다.
"머리의 장식과 복색은 여자였으나 형상과 음경·음낭은 다 남자인데, 다만 정도(精道)가 경두(莖頭) 아래에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를 뿐입니다. 즉 이의(二儀)의 사람인데, 남자의 형상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하여 밝혀지게 된 사방지의 행실은 다음 같았다.
그는 본래 반가(班家)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체의 비밀을 가지고 태어난 이 아이를 여자로서 키웠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몰라도 흰 피부에 미색도 빼어났다고 한다. 사방지가 장성할 무렵 그의 집안은 계유정난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그때 안평대군 편에 섰던 집안의 남자들은 죽거나 귀양을 가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는데, 여자로서 키워진 그는 어미와 함께 안맹담 집의 여종으로 들어가 사방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무렵 사방지의 어미는 상전인 정의공주의 허락을 받아 그를 동대문 밖 비구니 절로 출가시켰다. 이쯤에서 정의공주도 사정을 알았을 터, 그를 부처님에게 귀의시키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선택이 되지 못했으니, 사방지는 절에서 만난 여승을 비롯한 여러 여자들과 마구잡이로 관계를 맺는데, 이때 임신을 두려워한 비구니 중비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안심을 시킨다.
"내가 일찍이 내수(內竪) 김연의 처와 간통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거늘 전혀 잉태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내수 김연(金衍)은 아내를 거느린 내시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위해 일으킨 쿠데타인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의 편에 섰다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김연의 처는 노비가 되었는데, 사방지와는 고모와 조카 사이였다. 즉 김연의 처는 사방지가 조카였음에도 사통을 한 것이다. 이후 절을 나온 사방지는 미망인이었던 김구석의 처 이씨의 노비로 들어가고 이씨와 사통을 벌이다가 결국 발각이 나 비밀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 것인데 그 행태가 생각보다 훨씬 해괴하였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종 사방지(舍方知)라는 자는 턱수염이 없어 모양이 여자와 같은 데다가 재봉(裁縫)을 잘하여 여자 옷을 입고 일찍이 한 여자 중을 통간(通姦)하였다. 김구석(金龜石)의 아내 이씨는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그 여승과 이씨는 이웃하였으므로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사방지는 이씨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여 가까이하게 되었으니 음식도 그릇을 같이 하고, 앉고 눕는데도 자리를 같이 하며, 의복도 빛깔을 같이하니 모두 사치스럽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처럼 노비 섬기기를 집주인 같이 하였고 때로는 여승까지 3인이 동침해 이웃에까지 알려졌지만 이씨는 달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추문이 퍼지자 이를 규찰해야 한다는 대관(臺官)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반면 임금 세조는 승정원으로 하여금 안험(按驗, 자세히 살펴 증거를 확보함)하게는 했으되, 사족(士族)인 이씨를 욕되게 함은 옳지 못하다 하여 방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길창군(吉昌君) 권람은 치죄(治罪)하기를 힘껏 청하였고 한명회, 신숙주, 홍윤성 등도 이씨에 대한 치죄와 사방지의 유배를 청하였다. 그럼에도 세조는 죄를 다스림에 뜨뜻미지근하였으니, 결국은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대저 간관(諫官)이 된 자는 그저 간(諫)하는 것만을 어진 것으로 여기고, 대의(大義)는 알지 못하니 매우 안타깝도다. 사방지의 일은 이미 안 된다고 하였거늘 대신(大臣)과 언관(言官)이 반복하여 번거롭게 청하니, 내가 진실로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도다. 사방지의 일은 내가 이미 대신과 의논하여 그를 다시 국문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한 이유가 세 가지 있었으니, 남자 같으나 실은 성년(成年)이 되지 않은 사람인 것이 그 하나이며, 간통 현장을 잡은 것도 아닌 것이 그 둘이며, 일이 유사(宥赦) 전에 생긴 것이 그 셋이다."
즉 세조는 사방지가 성인 남자처럼 보이나 사실은 성기가 덜 발달된 미성년자이고, 간통 현장에서 붙잡힌 현행범이 아닌데 다만 소문만으로 국문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사건이 자신이 용서해 사면한 다음에 생긴 것이 아니라 사전의 일인즉 새삼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그 말의 마지막 대목에 있었다.
"그리고 김구석의 처는 중추(中樞) 이순지(李純之)의 딸이고, 그 아들은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의 사위다."
이순지는 앞서도 말했듯 칠정산 역법을 만든 학자였다. 그는 장영실과 같은 천민 출신의 관료가 아니라 1427년(세종 9년) 정식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한직인 서운관(書雲觀,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 근무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천문학 개관서인 <천문유초>,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제가역집(諸家曆象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끌어들여 서운관의 파워를 키운 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인지와 사돈지간이 되었던 바, 그를 무시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 일식과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에 대한 연구서
** 중국의 선진 천문학자들의 이론을 모은 책
이순지 또한 제 딸을 적극 변론하였다.
이순지가 여러 재상(宰相)에게 말하기를, "헌부(憲府, 사헌부)는 어찌 혹심합니까? 그 근거는 바로 쓸데없는 군말이고 진실이 아닙니다."
이에 이순지의 딸 이씨는 무사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이 문제를 거론한 사헌부 관원은 재상 집의 일을 경솔하게 의논하고, 또 이와 같은 이상한 일을 계품(啓稟)하지 않고 억지로 취초(取招)하였다 하여 파직당했다. (사헌부에서 사방지를 국문할 당시 그와 정을 통했던 여승에게 묻자, 여승이 "양도·陽道가 매우 장대하다" 하여 만져보니 정말이었다. 또한 임금이 하성위·河城尉 정현조 등에게 여러 가지로 시험하여 보게 하였는데, 하성위 역시 혀를 내두르며 "‘어쩌면 그렇게 장대하냐" 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을 뿐 더 이상의 추국은 없었다. 이순지의 가문이 더럽혀질까 염려함이었다)
하지만 사방지마저 무사할 수는 없었는데,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사방지를 구한 이는 형조판서 서거정이었다.
"<강호기문(江湖紀聞)>에 이르기를, '하늘에 달려 있는 도리는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 죽여서 용서할 게 없습니다."
그러자 세조는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外方)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사방지는 곤장을 맞고 충청도 신창현의 노비로 간 후 그곳에서 죽었다. 사방지와 같은 헤르마프로디테는 이후 명종조에도 출현하였던 바, 실록에 나타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548년 11월 18일 함경 감사의 장계에, "길주(吉州) 사람 임성구지(林性仇之)는 양의(兩儀)가 모두 갖추어져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으니 매우 해괴합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임성구지의 일은 율문(律文)에도 그러한 조문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라. 성종조(成宗朝)에 사방지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아울러 문의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언필이 의논드리기를, "임성구지의 이의(二儀)가 다 갖추어짐은 물괴(物怪)의 심한 것이니, 사방지의 예에 의하여 그윽하고 외진 곳에 따로 두고 왕래를 금지하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명종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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