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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요경 뺨친 국제적 스타 기생 자동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26. 22:11

     

    앞서 조선초의 관기(官妓) 초요경을 조선 최고의 미녀로 소개한 바 있다. 왕자 3명을 비롯한 뭇 남정네들을 줄줄이 홀린, 그래서 살인까지도 불러온 그녀의 미모는 가히 조선 최고의 미녀라고 칭해도 큰 하자는 없을 듯하다.(☞ '조선 최고의 미인은 누구일까? 아무리 봐도 으뜸은 초요경')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미녀가 당대에 또 한 명 있었다. 이름은 자동선이다. 그녀는 초요경과 마찬가지로 장악원에 근무(?)하던 관기였는데, 세조가 '4기녀'(기녀 4인방)로 불렀던 네 명 중의 한 명이다. <세조실록> 31권에 소개된 그들 4인은 모두 절세 미인이었던 듯하니, 그중에서도 옥부향과 초요경(초요갱)의 남성편력에 대해서는 간단히 설명을 달았다.

     

    임금이 육조의 대신들에게 경회루 누각 아래서 잔치를 베풀어 주니, 중추원사 최항, 동지중추원사 김수온, 예문 제학 이승소, 병조 참판 김국광, 공조 참판 성임, 행상호군 강희안, 중추원 부사 강희맹, 행상호군 아파와 여러 낭청(郞廳) 등이 잔치에 참석했다. 임금은 도승지 노사신에게 명하여 잔치를 감독하게 하고, 또 내녀(內女) 3인과 기녀(妓女) 4인을 내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4기녀(妓女)는 옥부향, 자동선, 양대, 초요경인데 모두 가무(歌舞)를 잘하여 여러 번 궁내(宮內)의 잔치에 불려 들어가니, 임금이 ‘기녀 사인방'이라고 불렀다. 
     
    옥부향은 일찍이 효령대군 이보(李補) 사통(私通)하였는데, 뒤에 익현군 이곤(李璭)과도 사통하였다. 초요갱은 어려서 평원대군 이임(李琳)의 사랑을 받다가 평원대군이 졸(卒)하자, 화의군 이영(李瓔)과 사통하였는데, 임금이 이영을 폄출(貶黜)하고 초요갱도 쫓아냈다가 얼마 아니되어 초요갱이 재예(才藝)가 있다고 하여서 악적(樂籍)에 다시 소속시키니, 계양군 이증과 또 사통하였다.

     

    자동선은 실록에 총 12번이 기록되었는데, 그중에는 자못 국제적인 내용도 있다. 그에 앞서 태생과 전력을 말하자면 그의 고향은 개성으로, 명승으로 유명한 개성 자하동(紫霞洞)에 사는 여신급의 미모라 하여 자동선(紫洞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자하동의 지명은 지금 서울에도 남아 있으니 경복궁 서쪽 체부동과 동쪽 통의동 사이의 길이 '자하문로'이고,  종로구 부암동과  청운동을 연결하는 터널이 자하문 터널이다. 이는 한양의 북소문 격인 창의문 일대의 경치가 개성의 승경지 자하동과 비슷하다 하여 창의문이 자하문으로도 불린 까닭이다.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린 창의문

     

    자동선은 원래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의 첩이었다. 정효전은 판서 정진(鄭鎭)의 아들로, 태종의 딸 숙정옹주(淑貞翁主)와 혼인하며 일성군이 되었다. 그는 1450년(문종 1) 병조판서를 거쳐 삼군도진무사에 올랐으나,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편에 서지 않음으로써 인생이 고달파졌다. 이에 그는 김종서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파직 당한 후 화병으로 죽었고, 그 자식들은 괘씸죄가 적용돼 노비가 되었다. 하지만 첩인 자동선은 노비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장악원 기생으로 차출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미색이 빼어나서였다.

     

    장악원 터의 푯돌에 그렇게 쓰여 있어서일까? 흔히 장악원을 조선시대 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실상은 국가 기생, 즉 관기 양성소에 가깝다. 장악원의 실체는 정6품 전악(典樂) 아래 악사와 악생, 악공이 있었으며 또한 아름다운 기녀들의 집합소였다. 그들은 왕실의 행사에 동원돼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는데, 이중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기녀들의 역할이었다. 즉 연회의 흥을 돋우는 것이 관기의 일이었으나 음주와 가무는 한쌍이므로 술좌석 도우미의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앞의 장악원 터 표석

     

    물론 장악원의 행사에는 종묘제례나 사직제와 같은 국가적 행사도 있었지만, 기실 그때는 왕이 주관하는 행사는 모두 국가적인 행사가 되는 시절이니 연회라고 해서 천격(賤格)으로 취급할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국가적으로는 비중 있게 여겨졌으니 <경국대전>의 기록에 따르면 장악원은 악사와 악공은 합계 500명, 기녀는 600명 안팎까지 둘 수 있는 대규모 조직의 관청이었다. (하지만 연산군 때를 제외하면 실제적으로 기녀는 150명 선이 유지되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적지 않은 숫자이다.)

     

    그들은 당연히 외교 행사에도 동원되었으니 그 중요 행사 중의 하나가 중국사신 접대였다. 그리고 그 접대 자리에 나가는 기녀들은 얼굴과 노래와 춤은 기본으로 뛰어나야 했고 시(詩) 서(書) 화(畵)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했는데, 자동선은 이것을 모두 만족시키는 여자였다. 그런데 세조 6년 정사(正使)로 왔던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은 자동선의 미색 하나에 바로 뻑이 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칭하며 아래의 시를 읊었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북방유가인 절세이독립)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일고경인성 재고경인국)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영부지경성여경국 가인난재득)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세상을 벗어나 홀로 서 있네.

    눈길 한 번에 성이 기울고 다시 돌아보니 나라가 기우는구나.

    성을 기울게 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함을 어찌 모르리오만, 아름다운 여인은 두 번 다시 얻기 어렵다네.

     

    '나라를 위태롭게 할 만한 미색'이라는 뜻의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유래된 이 시는 <한서(漢書)> '이부인열전(李夫人列傳)'이 출전이다. 중국 한무제 때 협률 도위(協律都尉, 음악을 관장하는 벼슬)로 있던 이연년(李延年)은 어느 날 무제 앞에서 춤을 추며 위의 '가인가(佳人歌)'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절세미인인 자신의 누이동생을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무제는 그 노래의 주인공인 이연년의 누이동생을 불러들였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부인으로 삼으니 이 여자가 바로 무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이부인(李夫人)이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간 장녕은 자신이 만난 자동선을 경국지색의 미인이라 소문을 내었던 바, 이에 <세조실록 > 1464년(세조 10)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익히 소문을 들은 장성(張珹)이라는 자가 사신으로 와 자동선을 찾은 것이었다. 

     

    "장녕이 이르기를, 조선에 자동선이란 명기(名妓)가 있다는데, 누구인가?" 하므로, 답하기를 "기생이 연회날 번갈아서 오기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후 또 다른  사신 사인(舍人) 김식 또한 자동선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자동선이 영천군 이정(李定, 1422~?)의 첩실로 들어앉은지라 연회에 부를 수 없었다. 이에 예관(禮官)이 다른 예쁜 기생을 불러 자동선으로 행세하게 했으나  김식은 단박에 이를 알아채고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의 미인은 중국에도 흔하오. 이 정도였다면 중원 천지에 소문이 났을 리 없소. 얼른 진짜 자동선을 데려오시오."

     

    이에 예관은 자동선이 살고 있는 안국방으로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말하고 자동선을 제천정(濟川亭, 용산에 있던 왕실 부속 정자) 연회에 오도록 부탁했다. 자동선은 이미 국제적인 스타가 돼 있었던 것이다. 

     

    장악원 기생으로 있던 자동선을 면천시켜 첩으로 삼은 영천군 이정은 효령대군(孝寧大君,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의 다섯째 아들로서, 시도 잘 짓고 그림 솜씨도 뛰어났던 풍류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뛰어났던 것이 주색잡기였으니 <용재총화>에 적혀 있는 그의 행각은 다음과 같다.  
     
    "시골 기생이 처음으로 뽑혀 서울에 오면 곧 집으로 데려와서 화려한 옷을 입혔다. 또 조금 있다가 다른 어린 기생이 있으면 거기에 빠져 기존에 데려온 기생이 도망가도 찾지 않았다. 평생 첩으로 삼은 여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천하의 미색을 지닌 자동선도 일개 기녀였던 바, 결국은 이정의 바람기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대의 문사(文士)였던 서거정 역시 자동선을 사모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거정은 자동선이 송도 기생으로 있을 때부터 그녀에게 반해 연모했으나 그녀가 곧 일성군 정효전의 첩이 되었고, 이후로는 잠시 장악원 기생으로 있다가 다시 영천군 이정의 첩이 되었으므로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영천군 이정에게 자동선을 양보했다거나, 나아가 자신이 직접 월하빙인(중매쟁이)가 되어 자동선을 소개해 주었다는 말도 있다.

     

    자동선의 생몰연대는 정확지 않으나 28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고 한다. 영천군 이정의 안국동 집에서였다. 주색잡기를 즐기던 이정 역시 32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는데, 유복자로 태어난 그의 아들 이동(李仝) 역시 세상이 알아주는 바람둥이였다. (둘째 부인 권씨의 소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바람기는 부인에 비하면 한낱 미풍에 불과하였으니, 그의 와이프가 조선왕조 사상 태풍급 엽색행각을 몰고 왔던 어우동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니할 수 없을 터, 다음에는 정설(正說) 만으로도 믿기 힘든 어우동의 이야기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정자의 이미지 사진 / 용산에 있던 제천정은 17세기까지 중국 사신을 맞던 왕실 전용 정자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한남동 한남하이페리온 아파트 앞에 표석만이 서 있다.
    한남하이페리온 입구의 제천정 터와 수표 터 표석

     

    * 제천정 터 표석의 글 : 「한강 나루터의 제천정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17세기 초까지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도 했고, 임금이 수군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달밤 풍경이 아름다워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고 불렀다.」

     

    * 수표 터 표석의 글 : 「조선조 세종 때 한강의 수위(水位)를 재기 위해 제천정 아래 세웠던 수표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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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