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 기슭에 남은 계유정난의 흔적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12. 00:33
1453년의 이른바 계유정난은 전통적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규범에도 일시 변화를 주었다. 계유정난은 그만큼 큰 사건이었으니 상것이 양반으로 올라서고 양반이 상것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는 10월 10일 계유정난의 그날 밤 김종서 대감을 철퇴로 내리친 수양대군의 노복 임어을운(임운)은 면천되었음은 물론 대감 행사를 하며 계유정난 때 죽은 영의정 황보인의 집을 하사받아 살았다. 반면 정경대감댁 마님이었던 김종서의 부인과 여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분변화는 왕족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세종대왕의 아홉째 왕자이자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었던 화의군 이영(李瓔)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비협조적이었으며 훗날 금성대군(세종대왕의 여섯째 왕자)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로 가산 적몰 후 전라도 금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은 왕족임에도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화의군의 이 같은 행동은 의로운 일이었음에도 당대에는 존중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중중조에 이르러 그 손자의 청원으로 겨우 복권되었다. 그 이유는 화의군의 행위가 정의가 기반하지 않은 오직 권력욕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인데, 그와 같이 내몰린 데는 무엇보다 평소의 행동거지가 유림(儒林)의 빈축거리가 되었음이었다.
즉 그는 1441년 임영대군과 함께 여염집 여인 2명을 남장시켜 궁으로 들이려다가 들켜 망신살이 뻗친 적이 있었다. 임영대군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로 얼굴만 반반하면 일단 건드리고보는 호색한이었다. 그리하여 세종대왕 시절 궁궐 노비 가야지, 장악원 소속의 기생 금강매와의 사통(私通)으로써 궁을 시끄럽게 만든 것을 필두로 많은 여자 문제를 일으켰는데, 화의군 역시 임영대군과 동류(同類)로서 주색잡기를 즐겼다.
그리하여 위의 사건을 필두로, 부인 밀양박씨의 큰아버지 박대손의 노비 출신 첩을 빼앗은 사건, 조관(朝官)의 첩을 빼앗은 사건,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의 첩 초요경과 사통을 벌인 사건 등을 기록한 화려한 여성편력의 소유자였다.(뛰어난 미색을 자랑했던 초요경은 세종대왕이 아들 중 가장 총애했다는 계양군 이증과도 스캔들을 일으켰다)
어찌됐든 화의군은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반기를 든 죄로 금성대군 · 혜빈양씨(세종의 후궁. 한남군과 영풍군의 어머니) · 한남군 · 영풍군과 함께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당한 후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그의 후손이 유해를 수습해 삼각산 기슭인 양주 신혈리(현 진관동)에 장사지냈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 144번지에 위치한 화의군 묘역은 불광동에서 진관동으로 넘어가는 연서로 길가에 있어 눈에 잘 띄인다. 묘역에서 가까운 곳에 은평 한옥마을 단지가 있다. 서울시가 2010년부터 조성을 시작한 이곳 한옥마을은 당시에는 물씬한 풋내가 생경했으나 지금은 제법 자연스럽게 주변의 풍치와 어우러진다. 무엇보다도 주택에 당호를 부여한 것이 마음에 든다. (안심헌, 명현재 이런 식으로) 당호는 곧 그 집주인의 마음가짐이다.
그곳 한옥마을에 숙용심씨의 묘표가 있다. 묘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푯말이나 푯돌로서 죽은 사람의 성명·행적 등을 새겼다. 숙용심씨의 묘표에는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 외의 다른 글자는 없으나 조선 9대왕 성종의 후궁이었던 숙용심씨의 묘표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록에 등장하는 숙용심씨는 오직 이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숙용은 조선시대 내명부에 속한 후궁의 직책으로 종3품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종4품 숙원이었으나 성종의 사후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 심씨는 성종과의 사이에서 첫째 딸 경순옹주를 비롯해 이성군 · 영산군 · 숙혜옹주의 2남 2녀를 두었다.
숙용심씨는 1465년 아버지 심말동과 어머니 성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심말동은 족보 상으로는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사촌 동생이다. 심말동의 아버지 심정(沈泟)이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沈溫)의 동생인 까닭이다. 따라서 숙용심씨는 수양대군(세조)과는 육촌지간이 된다. 그래서 언뜻 심씨는 무난하게 궁에 들어와 성종의 후궁이 된 듯 여겨지지만, (경위는 전하는 게 없다)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 말동이 천민 출신 첩의 몸에서 출생했기 때문인데, 어머니 이씨 또한 비첩이 낳은 얼자였다.*
* 조선시대 양반의 첩이 낳은 자녀를 서얼이라 불렀는데, 첩의 신분이 양인이면 그 자식은 서자라고 하였고, 첩의 신분이 천인이면 그 자식은 얼자라고 하여 첩의 신분에 따라서 자식들을 또다시 구별하였다. 서자와 얼자를 합쳐 서얼이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심씨가 궁에 들어와 왕의 후궁이 된 데는 무언가 신분상승의 요소가 작용되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계유정난이었다. 심말동은 본래 수양대군의 노복이었으나 쿠데타 당시 관노 김길생, 양망오지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판사판식의 인생의 승부를 건 셈이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를 인정받아 원종공신에 임명되었던 바, 당연히 면천되어 양인이 되었다. 그의 아내 이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숙원 묘소는 원래 그곳이 아니었다.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숙용심씨 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묘소는 도봉산 밑에 있는 무수골이었다. 하지만 무덤의 묘표가 무척 아름다웠던 까닭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실려갔다.(추정) 묘표는 일본 수상과 대장상 역임 후 암살당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를 기려 조성된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의 작은 공원에 놓였다가 1999년 부산일보 도쿄지사장인 최성규 씨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숙용심씨의 아들인 이성군파와 영산군파의 후손들이 반환운동을 벌여 2001년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바, 무려 460년만의 귀향이었다. 하지만 본래 묘소가 있던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까닭에 영산군의 묘역 가까운 지금의 장소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반환이 결정된 후 2000년 2월 16자 자 동아일보에는 후손인 이채원 씨가 "이제야 떳떳이 조상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게 됐다"고 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 관련 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재역참, 혹은 말죽거리라 불리던 곳에서 (1) 2022.12.13 북한산 내시 무덤을 지나며 (0) 2022.12.12 월산대군·중종·인종·명종·숙종·경종태실 (0) 2022.12.06 제르단 샤키리와 코소보 사태 (4) 2022.12.05 백제 허망한 멸망의 이유 (0) 2022.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