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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가 설계한 배다리와 용양봉저정
    서울의 다리 2022. 11. 11. 08:55

     

    정조대왕의 아버지(사도세자)를 위한 효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효행의 흔적 또한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대학로 소재 경모궁(景慕宮)을 들 수 있겠다. 현재 서울대병원 내의 '함춘원 문'이라 잘 못 알려져 있는 그 옛 문이 바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의 중문(내삼문)이다.(☞ '서울대병원 근방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 그 밖에도 서울에는 정조와 사도세자에 얽힌 유적이 적잖이 존재한다.(☞ '창경궁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

     

     

    연건동 서울대병원 내의 경모궁 터와 중문

     

    그리고 노량진 한강다리가 끝나는 곳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1776~1800) 총 12회에 걸쳐 한강을 건너 사도세자의 묘(현륭원)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에 능행했다. 그는 그만큼 아비를 연모했던 바, 현륭원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를 발견하고 분노로써 씹어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마도 그것을 본 노론 벽파(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오금이 저렸을 듯하다.

     

    정조는 이때 모두 노량진을 통해 한강을 건넜다. 그 방법은 주교(舟橋, 배다리)를 가설해 건너는 것으로써, 그 설치와 관리를 맡은 주교사(舟橋司)라는 관청을 근방에 두었다. 그리고 다리 가설에 시간이 걸렸으므로 이곳에 노량행궁을 지어 머물렀는데, 지금은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는 정자 하나만이 남아 있다. 정자의 이름은 일대를 살펴본 정조임금이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나는 것 같다'하여 붙였다고 한다.

     

     

    용양봉저정
    용양봉저정 안내문
    주교사 터 표석

     

    흥미로운 점은 정조가 직접 배다리 설계에 참여한 일로서, 왕은 <주교지남(舟橋指南)>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배다리를 놓을 만한 지형의 편의를 동호(옥수동 부근)에서부터 훑어 살펴보자면 노량이 가장 적합하다.... 300발(약 545m)로 기준을 세워서 배의 숫자를 계산하되.... 지금 경강(京江, 한양 일대를 흐르는 한강)에 있는 배의 너비를 일체 30척으로 계산한다면 강물의 너비 300발 안에 60척의 배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주교지남》/ 배다리 운영에 관한 정책서로, 정조는 1790년 이 책을 편찬해 친히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배다리 건설에는 관선(官船)과 민선(民船)이 모두 동원되었고, 큰 배를 강 한가운데 배치하고 이를 축으로 남북으로 작은 배들을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배다리 모양이 자연스럽게 완만한 궁륭형(아치 모양)이 되도록 하였는데, 더욱 흥미롭게도 <주교지남>에 서술된 배다리는 1789년 능행 때의 단점을 완벽히 보강한 형태였다. 그밖에도,

     

    "강 양안에 잡석다짐을 배 높이로 쌓고 회반죽을 발라 항구적으로 쓸 수 있는 선창(船艙)을 만든다. 선창엔 큰 쇠못을 박아 조교(弔橋, 양쪽 언덕에 쇠줄을 건너지르고, 거기에 의지하여 설치한 현수교와 같은 형식의 다리)를 연결할 수 있게 하며, 선창에는 항선(項船, 배다리와 선창 사이에 띄워 놓은 배)이 자리할 간격을 벌리고, 강 위로 삼판(杉板, 널판)을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되, 

     

    배들을 일정 간격으로 늘여 세우고 닻을 내려 움직이지 않게 하며 삼판을 개 이빨처럼 서로 엇물리게 연결한다. 아울러 각 배끼리는 세로 들보와 버팀목으로 연결해 흔들리지 않게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횡판(橫板, 가로 판)을 설치하는데, 판자끼리 맞닿는 곳에는 드러나지 않게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시킨다.

     

    또한 횡판 아래쪽은 견마대철(牽馬帶鐵, 한 부재에 걸쳐 놓아 다른 부재를 받게 하는 보강 철물)을 박고, 판자 양 끝은 구멍을 뚫어 삼줄을 꿰어 좌우 세로막대에 묶고, 난간에는 단청을 하고 밖으로는 오색 깃발을 세운다...."고 매우 세세한 설명을 달았다.

     

    다리의 건설에는 평균 열흘이 걸렸는데, 도하작전을 행하는 첨단장비의 공병대가 현대에서도 구현하기 어려운 규모라고 한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강에 댐이 없어 물살이 매우 빨랐으며 노량진까지 밀물과 썰물이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바, 그저 그런가보다 하며 볼 다리는 결코 아닌 듯하다. 그렇게 완성된 다리 그림이 화성능행도 중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라는 이름으로 여러 점 전하는데, 그중 국립고궁박물관의 그림은 아래와 같다. 

     

     

    '한강주교환어도' / 노량진에서 한양 쪽으로 건너오는 모습을 그렸다. 노량진 쪽에 용양봉저정을 비롯한 건물들이 보인다.

     

    이렇게 설치된 배다리의 길이는 330여 미터(추정)로, 현재 노들섬∼노량진 간 강폭이 340여 미터인 점을 미루어보면 주교가 놓인 곳이 노량행궁에서 노들섬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조가 건넌 이 장소에는 그 후 약 130년이 지난 1917년 한강대교가 놓였는데, 6.25전쟁 개시 사흘만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자폭시킨 이른바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 벌어졌다. 지금의 다리는 1958년 새로 건설된 것이다. 

     

     

    한강대교
    한강방어선 흑석동 전투지 안내문 /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하 저지를 위한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졌다.(1950년 6월 29일부터 7월 2일까지)
    폭파된 한강인도교
    다리 폭파 후 한강을 건너기 위한 피난민들의 현대판 배다리가 설치됐다.

     

    앞서 소개한 조선후기 화가 김석신이 그린 '담담장락도(淡淡長樂圖)'를 보면 가운데 벼랑 위에 읍청루(揖淸樓)를, 왼쪽 절벽 위에 담담정(淡淡亭)을 그렸는데, 강 건너 보이는 집들이 바로 정조가 능행길에 머물렀던 노량행궁이다. 앞서 말했듯 노량행궁은 정조 이후 황폐화되어 용양봉저정 하나만이 남았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이곳에 뱃놀이를 위한 위락시설이 조성되었던 바, 용양봉저정은 음식 숙박시설로 쓰였고, 노량나루에는 '뽀-트 구락부'라는 유람용 보트 대여소가 마련됐다.

     

     

    담담장락도

     

    총독부에서 발행한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観)>의 지도를 보면 용양봉저정 부근에는 한강교와 용봉정 온천이라는 지명 표시가 돼 있느나 당시에 이곳에 온천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아마도 대중목욕탕인듯) 다만 위락시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니 1934년 5월 10일자 <매일신보>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 동반자살한 남녀의 기사가 '단정 실종(端艇失踪)의 양남녀(兩男女)'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유부남 오수명과 기생 김영순이 보트를 빌려 타고 나갔다가 빈 배만이 효사정 부근에서 발견되었고 시신은 며칠 후 낚시꾼의 낚시에 걸려 발견되었는데 두 사람이 꼭 껴안고 죽었더라는 기사다. 

     

     

    총독부에서 발행한 <대경성부대관> 속의 용양봉저정(●) / 그 앞에 한강교가 보인다.
    용양봉저정
    옛 모습이 복원된 197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가운데는 임금이 머물 수 있도록 온돌방으로 꾸몄고 좌우 툇간을 두었다.
    사방에 띠살분합문을 달았으며 이중량(二重樑)을 둔 오량구조의 겹처마집이다.
    정자 안에 걸린 정조대왕 화성능행도
    용봉정근린공원에서 바라본 한강대교와 노들섬 야경
    뷰 포인트
    인근의 효사정
    효사정에서 바라본 한강대교와 노들섬 야경
    침수된 남양주 배다리 / 양평군이 정조대왕의 배다리를 남양주 세미원에 재현했으나 올해 4월 침수로 파손되었다. / 2022-04-26 <경기일보> 사진
    2012년 8월 개장 당시의 야경 / 경기관광공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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