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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성종태실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1. 13. 14:11
1911년에 창경궁에 건립되어 조선 왕실유물 박물관으로 쓰였던 일본식 건물 '창경궁 장서각'에 대해서는 앞서 '창경궁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도세자와 관계가 있었던 건물은 아니고 창경궁에 대해 쓰다 보니 말미에 붙게 된 것인데, 다시 그것을 r거론함은 그 건물이 철거된 데 대한 일말의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보존할 만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일제는 조선 왕실을 격하시키기 위해 1909년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동물원 등이 들어선 놀이공원 창경원을 조성했다. 이때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도 잔뜩 조경했고, 교토 평등원(平等院) 봉황당(鳳凰堂) 건물을 모델로 한, 위의 장서각 건물이 건축됐다. 그리고 연못 춘당지(春塘池)를 확장해 뱃놀이를 하게 만들었으며 식물원 조성을 위한 대온실도 지었다.
이 놀이공간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고, 매년 봄 벚꽃 필 무렵에는 관람객들이 미어터졌다. 그것이 1983년까지였으니 무려 75년 간이나 일본의 의도대로 놀아난(?) 셈이다. 그래서 어른 소리를 듣는 분이라면 누구나 그때의 기억이 잔존하고 있을 법한데, 더러는 지금까지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뒤늦게나마 민족성 대각성이 이루어져 창경원 시대는 1983년에 마감되고 이후 창경궁의 복원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3년간의 공사를 거쳐 1986년 8월 창경궁 시대가 다시 열렸는데, 그때까지도 장서각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후로도 꿋꿋이 버티었으나 결국 여론에 밀려 1992년 철거되고 말았다. 일제가 이 건물을 지은 것이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이니 자그마치 82년을 버틴 셈이니,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다크 투어리즘의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했을 듯하다.
내가 자꾸 장서각을 물고 늘어짐은 복원의 비형평성(?) 때문이니 일제가 뱃놀이를 위해 판 춘당지는 아직 그대로이고, 1909년에 지은 식물원 대온실은 철거냐, 보존이냐 오락가락하다가 2017년 보수 복원되며 되살아났다. 또 춘당지 앞에는 일제가 고물장수로부터 구입해 세웠다는 라마교 풍의 팔각칠층석탑이 여전히 서 있고, 명정전 뒤에는 일제시대 반입된 어느 시대 것인지조차 불명확한 오층석탑도 남아 있다.
위 오층석탑은 일제가 어느 폐사지에서 옮겨온 듯한데, 보다시피 조형미와 비례미가 뛰어난 수작(秀作)이다. 그러나 일제가 언제 어느 곳에서 가져왔다는 기록을 전혀 남겨놓지 않아 그 족보 없는 죄로써 문화재로 지정도 못 되었다. 그리고 고향을 몰라 되돌아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다.
불교 유적인 탑이 유교적 가치를 지향하는 조선의 궁궐에 있는 것은 어색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2014년 서울 봉은사로의 이전이 추진되었으나, 문화재위원회로부터의 "봉은사가 오층석탑의 소장처임을 입증할 자료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봉은사 측에서 "본사와 관련이 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을 해옴으로써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이후 오층석탑은 그대로 창경궁에 남게 됐다.
그보다 더 어색한 유적이 있다. 옛 장서각 자리에서 춘당지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가 그것이다. 예로부터 왕실의 태실은 국운과 관련이 있다 하여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졌던 바, 신생아의 태가 보관된 태옹(胎甕, 태 항아리)은 명산에 태실을 꾸며 안치했고, 또 보존에도 엄히 신경을 썼다. 그렇듯 산에 있어야 될 태실이 궁에 있는 것이니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곳으로 옮겨온 범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은 성종의 태실을 장식한 석물들과 태실 비(碑)이고, 정작 태실은 서삼릉에 있다. 조선총독부와 이왕직(李王職, 이씨 왕조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은 1929년 전국에 흩어져 있던 54기의 태실을 발굴해 태 항아리를 서삼릉으로 모았다. 관리부실을 명분으로 들었지만 실상은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던 의도였다. 그들은 서삼릉에 아래와 같은 공동묘지 수준의 집단 태실을 만들어 조선을 능욕했다.
* 사실 조선이 망한 후에는 전국 명산의 태실들이 관리 불가능의 상태가 되었으니 여러 곳이 도굴당했고, 그곳이 명당이라 하여 민간인이 태실을 파내 시체를 묻기도 했다. 그래서 관리부실을 명분으로 집단 태실을 조성한 일제의 만행에도 아무 할 말이 없는 형국이 되었다.
성종의 태실은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 산에 있었는데, 1928년 일제가 그 형태가 매우 온전했던 태실 비를 창경원의 구경거리로 옮겨왔다.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 자 기사에는 이에 관한 기사가 다음과 같이 왜곡되어 실렸다.
"태봉의 태실에 암장된 시체가 계속 발견됨에 이왕직에서는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여 앞으로는 그 같은 일이 없게 하고자 역대의 태봉 중에 가장 완전하며 가장 고귀하게 건설되었다는 광주(廣州)에 뫼신 성종 태봉의 모든 설비를 그대로 옮겨다가 전문기사를 시켜 연구케 하는 중이라 한다."
그럼에도 성종태실이 아직도 창경궁에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은 딱히 갈 곳이 없음이니, 그것이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 야산에서 옮겨온지는 알지만 그 정확한 장소는 모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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