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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유정난 그날의 김종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1. 26. 21:02

     

    * '세종대왕의 특명-백두산 북쪽의 공험진 비를 찾아라'에서 이어짐.

     

    앞서 말한 대로 김종서는 세종대왕이 말한 공험진 비를 찾지 못했지만 두만강 주변과 그 너머의 강역을 개척하고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 회령(會寧), 종성(鍾城)의 6진을 설치해 조선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세종은 개척된 지역에 사민정책을 취해 각 도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다. 그런데 그곳이 워낙 오지이고 험지이다 보니 국경선을 후퇴시키자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세종은 단호했다.

     

    "안팎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서로 뜬 말에 움직이나, 나는 큰 계책을 굳게 지켜서 잡된 말에 의혹하지 아니하고, 북문의 일을 오로지 경(김종서)에게 위임하여 그 다스림을 맡기노라." (<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5월 20일 기사)

     

    이후 김종서는 함길도 도절제사로 무려 7년간이나  북방영토에 거주하며 변방을 지켰는데,(하지만 무척이나 힘들었던 듯 상경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돌아와서는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런데 1449년, 명나라 정통제가 몽골 오이라트부 야인(野人)들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사로잡히는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나자* 김종서는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어 다시 북쪽으로 가 변방을 지켰다. 그리고 실제로 그해 8월 요동을 칩입한 타타르계의 야인 야선(也先)의 침입을 물리쳤다. 당시의 나이가 67세였다.

     

    * 이른바 '토목보의 변'으로, 이에 대해서는 '역사의 유명한 환관들(I) ㅡ 문고리 권력의 최후'에서 자세히 다뤘다.

     

    아무튼 김종서가 북방영토 개척과 방어에 큰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하니 야인들은 그를 대호(大虎, 큰 호랑이)라고 부르며 무서워마지않았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아래의 시조는 당시에 읊은 것으로 김종서의 기개가 한껏 드러나 있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중의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 북방 개척 중 연회를 베풀 때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도 개의치 않고 연회를 계속한 김종서의 담대함을 그렸다. 누각 중앙의 사람이 김종서다.
    전쟁기념관에 있는 김종서(1383~1453) 장군 흉상
     

    까닭에 김종서를 흔히 건장한 무장(武將)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일찍이 (16살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문신이며 체격 또한 왜소했다. 하지만 군무(軍務)에 있어 무장 이상의 능력을 보였으니 아래 <세종실록>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지금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본디 유신(儒臣)으로서 몸집이 작고, 관리로서의 재주는 넉넉하나 무예는 모자라니 장수로서 마땅하지 못하다. 다만 그가 일을 만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며, 4진(鎭)을 새로 설치할 때에도 처치한 것이 알맞아서 갑자기 그 효과를 보았으니, 가히 포상할 만하다." (<세종실록> 90권, 세종 22년 7월 5일 기사) 

     

    그는 사간원 정언 출신답게 강직하였을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출중하였는데, 특히 사서에 밝아 1449년 북방을 진정시키고 온 후에는 권제(權踶) 안지(安止) 등의 집현전 학자들을 이끌고 <고려사>에 대한 개수 작업에 들어갔다. 이처럼 문무(文務)에 모두 뛰어났던 그는 세종조에는  형조·병조·예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으며 의금부제조와 승문원제조 등도 겸임했다. 그리고 세종대왕 사후(1451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던 바, 드디어 그의 시대가 개막하게 되었다.

     

    문종이 단명하고 그의 어린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1453년) 국정에 관한 김종서의 영향력은 더욱 배가되었다. 그는 당시 좌의정으로 어린임금을 대신해 사실상 국가를 다스렸다. 이에 왕위 찬탈을 노리는 수양대군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으니, 1453년 계유년(단종 1) 10월 10일, 늦가을 바람이 차가운 밤 수양대군 무리의 방문을 맞게 된다.

     

     

    영화 '관상'에서의 수양대군과 김종서
    영화 '관상'에서의 수양대군 등장

     

    김종서는 수상한 생각에 긴장하였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야심한 시각에 대군께서 어인 일이신지....?  아니 그보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야심한 시각이라 안으로 들긴 그렇고..... 그보다 대감의 사모뿔을 좀 빌립시다. 지나는 길에 사모뿔이 부러져 잠시 빌리러 들렸을 따름입니다." 

     

    야밤에 사모뿔을 빌리겠다니....? 김종서는 더욱 수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따질 수는 없는 터, 주위에 사모뿔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리고는 수양대군에게 거듭 안으로 들라 청하였지만 그가 들은 것은 다시 엉뚱했다.

     

    "일이 있어 가는 길이라 안으로 들 수는 없고, 대신 이거나 좀 봐주시지요? 종친부의 일이긴 하오만...."

    "종친부요?"

    "예. 영응대군의 일입니다. 아무래도 탄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몇 자 쓰기는 했는데, 이게 맞는 건지....?"

     

    영응대군은 세종의 8번째 아들로 복잡한 사생활과 부인과의 이혼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자였다. 수양대군은 두루마리 서찰 같은 것을 내밀었고, 김종서가 그 속의 작은 글씨들을 달빛에 의지하려는 순간, 수양대군의 노복 임어을운(임운)이 숨기고 있던 철퇴를 꺼내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순간 아비를 지키려 섰던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도 수양대군의 심복 양정의 칼을 맞고 쓰러졌고, 김종서를 지키려 모였던  김승규의 친구들도 모두 현장에서 칼에 맞았다.  

     

     

    영화 '관상'에서 김종서의 저택으로 나온 안동 군자마을 후조당 사랑채
    서대문 농업박물관 앞 김종서 집터 표석

     

    계유정난은 이렇게 시작됐다. 수양대군은 절제(節齋) 대감 김종서부터 제거하면 일이 쉬울 것이리라는 생각했고, 생각한 바를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는 권람이 이미 열어 놓은 돈의문(서대문)을 통해 사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 단종임금을 만나 거짓 역모를 고변했다. 김종서, 황보인 대감 등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해 지금 그 일당을 주살 중이니 전하께서 지금 그 일당을 궁으로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김종서 일파로 분류되어 한명회의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은 건춘문 안에서 철퇴에 맞아 즉사하고,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대정, 원구 대감 등은 자택에서 자객들에 의해 죽었다. 이로써 수양대군에 적재적인 세력은 모두 제거되었으나, 단 한 사람은 아직 무사했다. 앞서 임어을운에게 철퇴를 맞은 김종서였다.  

     

     

    계유정난의 또 다른 무대 경복궁 건춘문

     

    김종서는 철퇴에 맞긴 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그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고자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실었다. 그리고 입궐하기 위해 돈의문을 두드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절대 성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권람의 엄명이 이미 순청(야간 순찰을 맡은 관청)에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김종서는 가마를 타고 서소문과 숭례문도 찾았지만 모두 문이 열리지 않았고, 이에 일단 차남 김승벽의 처가인 사돈댁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김종서를 찾아 나선 양정, 이흥상, 홍달손 무리에게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71세였다.

     

     

    김종서의 집 근방에 있던 돈의문 (AR로 복원된 사진)
    돈의문이 있던 서대문 고개

     

    혹자는 김종서의 집이 사대문 안에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나 크게 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쿠데타의 무리들이 워낙에 치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데타를 막지 못하고 결국은 목숨까지 잃은 김종서 대감을 실패한 재상으로 규명 짓는 부류도 있으나 이 또한 옳지 않다. 아무리 김종서가 힘이 있었다고 해도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김종서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힘이 모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빈사의 몸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었다. 계유정난 500년 후 일어난 5.16쿠데타 때 국방장관 현석호는 반란군 일개 사병에 피체돼 시청 뒤에 서 있어야 했다. 총소리에 도망 간 장면 총리는 혜화동 갈멜 수도원에 숨었다가 붙잡혀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12.12사태 당시의 국방장관 노재현 역시 겁에 질려 숨어 돌아다니다 반란군에 붙잡혔고, 대통령 최규하는 보신(補身)의 무대책으로 일관하다 강제 하야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탈하게 살았고, 노재현의 경우는 신군부 정권 아래서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등을 지내다 2019년 93세로 영면해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됐다. 집현전 학자들의 대부분이 반정(反政)에 항거했음에도 신숙주의 경우는 수양대군에 빌붙어 출세했고 호사를 누렸다. 그는 생전에 4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신숙주의 별장이 있던 마포 별영창 언덕 / 그는 이 풍치 좋은 곳에서 여생을 즐겼다. 지금은 벽산빌라가 위치한다,
    벽산빌라 입구의 담담정(淡淡亭) 터 표석 / 본래 안평대군의 별서였으나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이 신숙주에게 하사했다.
    세종시 장군면 김종서 묘 / 김종서의 시신은 저자거리에 효수되었고 옷과 신발을 이곳에서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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