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북한산 내시 무덤을 지나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12. 23:57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좋아하는 <삼국지>라는 소설은 황건적의 난으로 피폐해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다. 또 그 소설의 대부분은 유비가 낙양의 상선으로부터 구입한 귀한 차(茶)를 황건적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대부분이라 함은 <삼국지>에 여러 버전이 있음을 말함인데, 아울러 대부분 그 피폐의 원인을 십상시(十常侍)의 발호로부터 찾는다. 

     

    십상시는 후한 영제(靈帝, 156~189년) 때에 정권을 쥐고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환관들을 말한다. 앞서 십상시를 포함한 중국의 역대 유명 환관들을 '역사의 유명한 환관들 I / II'에서 다룬 바도 있지만, 이들 환관의 위세는 때로는 황제를 능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환관이 이렇듯 위세를 누린 적이 없으니, 애써 꼽더라도 명종조 성렬대비(문정왕후)의 수렴청정 당시 그 밑에서 득세를 한 내시 박한종(?~1563년)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박한종은 환관의 최고 직책인 종2품을 넘어 종1품까지 진출한 인물로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설명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명된 박한종은 다음과 같다. 

     

    중종·인종·명종 등 3대를 섬기면서 궁중의 일을 맡아보았다. 특히 전명내환(傳命內宦)*으로 1545년 을사사화 때, 문정왕후 편에 가담하여 궁중의 기밀을 탐지하여 준 공로로 추성정난위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하여졌다. 1553년 내수사(內需司)**가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었고, 그해 내간수리총감역관으로 경복궁 강녕전의 수리를 감독하다가 실화로 타버리자 삭직당하였다. 1556년 다시 밀성군에 봉해졌고, 1560년 승언색(承言色)***이 되었다. 성품이 음흉하여 항상 화심(禍心: 화를 일으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모의를 잘하였다.

     

    궁중에서 왕명을 전달하는 환관

    ** 왕실의 쌀·베·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

    *** 임금의 명을 승정원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직책.  

     

     

    서울 종로구 사직로 8길의 승전색교 터 / 조선시대 이곳 도로는 사직동천이 흘렀다. 부근에 내시부가 있어 이곳 다리는 승언색교, 혹은 승전색교로 불렸다.

     

    환관의 무덤들도 제대로 보존된 게 없으니 북한산과 그 줄기인 이말산, 그리고 노원구 초안산의 내시(공동)묘지 중에 남아 있는 내시 무덤 중 이름이 확인된 것은 북한산의 신공, 이말산의 김경량, 초안산의 승극철 정도이다. 

     

     

    북한산 구름정원길의 내시 신공 묘표
    신공 묘표 부근의 문인석 / 필시 신공 묘 앞에 서 있던 것이겠으나 묘는 확인한 길이 없다.
    신공 묘표 안내문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환관이 세력을 떨치지 못한 것은 그 수가 적기 때문이었다. 중국 황실처럼 환관의 쪽수가 많아야 십상시처럼 세력도 형성하고 위세도 떠는 법인데 조선의 경우 내시의 수는 많아야 150명 안팎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인원을 140명으로 정했다)

     

    반면 중국은 득실득실했으니, 명나라 때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 일례로 1621년 명나라 희종 때 3,000명을 뽑는 신인 환관 모집에 2만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고, 이에 이미 거세를 한 응모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급히 채용 인원을 50% 늘려 4,500명을 뽑았다는 이야기는 나름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환관은 신라 흥덕왕 때에 그 존재가 처음 등장하지만(<삼국사기>) 그 전부터 있어왔을 터인데, 고려에서는 내시와 환관이 따로 존재했다. 즉 고려의 내시부는 거세된 남자가 아니라 권문세가의 아들이나 과거 급제자들이 왕을 보필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곳이었으니, 그곳 내시원(內侍院)에 속한 내시들은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 만큼이나 끗발 있는 직책이었다 할 수 있겠다. 내시가 되려고 뇌물을 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이 내시였다는 사실을 묘지명에 부각해 명시를 하였던 바, 례로 윤관 장군의 아들로서 안서(황해도)대도호부사를 지낸 윤언민(1095~1154년)도 내시였다.

     

     

    내시를 역임한 사실이 명시된 윤언민의 묘지명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같은 뜻으로 쓰였다. 이는 조선시대 들어서는 환관들이 내시부를 맡게 되었기 때문으로 태조 이성계의 세자인 의안대군(이방석)의 아내 현빈 유씨가 내시 이만과 간통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만은 처형되고 세자빈은 폐출됐다) 이때부터 거세한 자들만이 내시로서 궁궐 일을 수행하게 된 것인데, 이로써 내시는 곧 거세된 고자를 지칭하는 말로, 환관과 동격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의 환관은 무척이나 비인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내시부의 최고 직급은 상선(尙膳)으로 종2품의 품계였으나 (요즘으로 말하면 차관급으로, 내시부에는 종9품 상원부터 종2품 상선까지의 직급이 있었다) 상선이라 해도 종2품 이하의 일반반료들과 맞짱을 뜨거나 명령을 할 수는 없었으니 그저 궁녀들에게나 뭐라 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내시는 그저 내시일 뿐이었으니, 중국 환관들의 힘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명나라의 호가호위하는 내시 세력을 반면교사 삼고자 한 조선 정부의 의도도 상당히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있다면 조선초 명나라의 사신으로서 온 조선인 출신 환관들의 횡포였을 것이다. 자국의 환관으로의 입문과 출세가 바늘구멍이라고 생각한 조선인 환관 취업 희망자 중에서는 스스로 거세를 한 후 중국에 가서 취업의 문을 두드린 해외 구직파도 있었다. 조선의 환관들은 일반적으로 고환만을 제거한 반면 중국의 환관들은 성기와 고환을 모두 제거하여 남자의 뿌리를 뽑아야 하므로 더욱 어려웠으니 생명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감수하고 중국어까지도 익힌, 어쩌면 독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 같은 독종 마인드가 있어서인지 그들은 중국의 환관으로 출세를 하였으니 대표적으로는 고려말 원나라의 환관이 돼 천하를 호령했던 고려인 출신 박불화(박테무르부카)가 있었으며, 조선인 출신으로는 박규, 정동, 황영기 등이 있었다. (그 외도 많았음) 그들은 대개 조선에 황제의 칙사로서 납셨는데, 그때마다 조선에서는 비위를 맞추려 대·소연회를  끊임없이 베풀고 친척을 승진시켜주거나 그들의 고향에 시혜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역경에 대한 보상심리 탓인지 되놈 사신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횡포를 부렸는데,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웬만한 뺑끼는 통하지도 않았다.

     

    다시 돌아가 말하자면, 혹간 조선의 내시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런 예는 매우 드물었다. 연산군 시대에 왕 다음과는 권력을 누렸던 김자원 같은 환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폭군 연산군에 호가호위하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렸던 바, 모든 관료들이 머리를 숙여야했고, 그의 행차길에는 모든 양반들이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의 최후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이는 특수 상황이 낳은 예외적인 경우이며 대부분의 내시들은 비굴한 삶을 살았다. 이는 지금까지도 그 생리가 잔존하는 조선적 관료 의식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리라 본다. 약한 자는 더 억누르는 것이 조선의 관료들이었다. 

     

     

    북한산 구름정원길의 묘표 / 토사에 밀려 반쯤 쓰러져 있다.
    확인은 안해봤으나 이말산의 내시 김경량 묘표와 같아 이 또한 내시 무덤 표석으로 여겨진다.
    이말산에 있는 내시 김경량 묘표 / 그나마 어떤 놈이 묘비석을 훔쳐가 2015년에 새로 만들어 세웠다. (은평시민신문 사진)
    구름정원길의 내시 추정 묘표 아래로는 반 이상 묻힌 문인석도 있고 이처럼 발굴돼 세워진 것도 있다. (그 앞에 누군가 등산객을 위한 보시를 했다)
    걷다 보면 이런 문인석도 만난다.
    이 같은 석물들도 필시 내시묘 장식물이었을 것이다.

     

    내시들이 모두 비굴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으니 소신의 길을 걸은 엄자치(?~1455년)라는 내시도 있었다. 엄자치는 세종과 문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내시로 알려져있는 인물로 수양대군이 대자암에서 머리를 다쳤을 때 문종은 엄자치를 보내 문병을 하였다. 하지만 계유정난에 임해서는 판내시부사 전균과 함께 수양대군의 편에 섰으니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으며 토지 50결을 하사받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또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었고, 이에 제주 관노로 전락해 가던 중 길에서 죽었다. 환관 엄자치는 왜 자주 손바닥을 뒤집었을까? 아마도 그는 존왕파(尊王派)였던 것 같다. 그는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권을 능멸하는 듯한 김종서와 황보인 등에 거부감을 느끼고 계유정난에 가담하였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번에는 다시 단종 복위 세력에 가담했던 것이었다. 그는 변절자가 아닌 정의파였던 셈이다. 

     

    연산군 때의 환관 김처선(1421~1505년)은 그에 못지않은 소신파요 정의파였다. 당시 연산군의 전횡과 악행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도 당대의 대소신료들은 아무도 간(諫)하는 자가 없었으니 그저 명철보신하기 바빴다. 그 썩어빠진 벼슬아치 사이에서 오직 김처선만이 바른 행동을 간했다. 연산 10년 7월 16일의 일로, 그는 이로 인해 곤장 100대를 맞고 하옥됐다. 이후 그는 옥에서는 풀려났으나 몸은 반병신이 됐는데 이듬해 4월 1일 겨우 몸을 추스르고 궁으로 향했다. 

     

    <연려실기술>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김처선은 집을 나서며 오늘 궁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재차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가 임금에게 어떤 직언을 했는지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정확하게 기술돼 있지 않지만 <소문쇄록> 등의 야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 

     

    "이 늙은 몸이 그동안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도 대강 통했는데, 고금을 통틀어 전하와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발 연회를 거두시고 종사를 살피는 성군이 되소서."

     

    열받은 연산군이 활을 꺼내 들었다. 연산군이 쏜 화살은 가까이 있는 처선의 늑골에 깊이 박혔으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신(臣)은 다만 전하께서 오래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만 같아 그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더욱 열이 뻗친 연산군은 처선의 다리를 칼로 쳐 정강이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일어나 걸어라! 어명이다!"

     

    김처선이 무릎을 꿇고 연산군을 똑바로 올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을 수 있사옵니까?"

     

    그러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냈는데, 당시 김처선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을 죽이고 7촌까지 단죄했으며, 김처선 부모의 무덤을 파내고 석물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김처선 일가의 가산을 적몰하고, 가택을 파괴한 후 못을 파 흔적까지 없앴으며 고향 동네마저 파괴시켰다.

     

    조선시대 천대받던 한낱 내시도 간언을 했고 때로는 그것이 죽음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작금의 정치판에서는 누군가 최고권력자에게 간언을 하고 장렬히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신·구 권력 어느 곳에서도.... 내 생각으로는 지금이야말로 대통령에게 직언해야 할 사람이 필요할 듯 보이나 모두들 자리를 지켜 모범적인 가장이 되기 위해 골몰할 뿐이다. 그들은 유능한 가장일는지는 모르겠으나 훌륭한 아버지는 아닐 것이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폐주 연산의 무덤이다. 왼쪽이 연산군의 묘이고 오른쪽이 부인인 신씨의 것이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