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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역참, 혹은 말죽거리라 불리던 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13. 22:06

     

    지하철 양재역에서 출구를 잘못 찾은 까닭에 아래의 양재역 표석을 보게 되었다. 「양재역 터」의 제목 아래 「조선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 터」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양재역에서 옛 양재역 터 표석을 만나고 보니 옛 양재역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그리고 표석의 제목은 양재역 터보다는 양재역참 터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역(驛)은 고구려·신라 때의 기록도 보이나 ('압록강 이북은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인데 그 하나는 국내성으로서 평양에서 17개의 역을 지나 여기에 이른다' /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 아무래도 일제시대의 산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니 조선시대에는 역보다는 역참으로 불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태종실록> 13권에 나오는 '정역찰방'(程驛察訪)이라는 단어의 해석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았다. 

     

    정역 찰방 : 각도(各道)의 노정(路程)과 역참(驛站) 일을 맡아 보던 외직(外職).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대략 30리 거리로 역(驛)을 두어 마필(馬匹)과 관원을 두고 공문서를 전달하며 공용(公用) 여행자의 편리를 도모하게 한 기관을 역참(驛站)이라 하였는데, 수개 내지 수십 개의 역참을 역도(驛道)라 칭하고, 그 구간(區間)의 마정(馬政)을 맡아 보는 관직을 찰방(察訪)이라 함.

     

     

    양재역 11번 출구 앞의 옛 양재역 표석

     

    조선시대 역참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인 1597년(선조 30) 역참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집의(執義) 한준겸의 건의를 따라 '파발을 설치하여 변방의 문서를 전하도록 하되, 기발(騎撥)은 매 20리마다 1참(站)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1참을 두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역삼동’, ‘역촌동’, 부천시 '역곡’, 광주시 '역동' 등의 지명도 그 파발역참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며, 구파발이라는 지명도 옛 파발역참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발로 뛰는 보발(步撥)과 말로 달리는 기발(騎撥)을 살필 수 있는 조선말기의 역참 사진

     

    한준겸은 역참의 정비에 임해 조선의 역참을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 설치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적어도 명칭은 원나라의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 강역을 점령한 몽골제국은 수도 캐라코룸으로부터 하달되는 공문을 잠(jam)을 통해 전달했다. 이 잠에서 지친 말을 새 말로 바꿔 타고 달리고 또 달렸던 것이니, 칭기즈칸 시대부터 이미 역참이 설치되었고, 오고타이 치세에는 북중국까지 매 70리마다 잠을 만들어 모두 37잠을 두었다. 

     

    유럽 원정에 나섰던 바투가 동유럽을 점령한 후 급작스럽게 회군한 이유인즉 대칸 오고타이의 사망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귀족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해 후계자 논의에 끼어들기 위함이었다. 오고타이의 사망 소식이 잠을 통해 바투의 본영이 있는 헝가리 평원까지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에 서유럽은 침략자들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나 당시의 유럽인들은 죽을 때까지, 이 노란 피부의 이방인들이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왔으며, 또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원나라가 중국 지역에 설치한 잠은 곧 참(站)이 되었고 기존의 역과 합쳐져 역참이 되었는데, 그 명칭은 조선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또 그로부터 '새참', '밤참', '한참' 등의 단어가 파생되었으니 역참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 먹는 밥이 새참이고, 급한 공무로써 밤에 역참에 도착해 먹게 되는 밥이 밤참이었다.

     

    '한참'은 앞서도 말한대로 두 역참 사이의 거리를 가리키던 말이니, 역참은 대개 30리마다 하나씩 설치했으므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2km가 되겠다. '한참 가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걸리는 거리라는 뜻으로 공간적 개념이 시간적 개념으로 바뀐 예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마패는 공무 수행자들이 역참에서 말을 징발할 때 사용한 도구일 뿐 암행어사의 신분증명서가 아니다. 따라서 아래 드라마에서처럼 마패가 "암행어사 출두야!"의 위력을 보장하지 않으며, 특히 아래와 같은 5마패를 사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말한 대로 마패는 역참에서 말을 빌릴 때 사용한 징표로서, 거기 새겨진 마필의 숫자만큼 말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암행어사는 혼자 다니거나 시종 한 사람만을 대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2마패 그 이상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암행어사들은 지방에 파견될 때 말을 빌릴 수 있는 마패와 놋쇠로 만든 표준 유척(鍮尺, 자)을 지급받았다. 그만큼 도량형을 속여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이게 아니라고요~
    암행어사들이 지녔을 법한 2마패
    암행어사들이 지녔을 법한 유척

     

    올 때는 양재역의 다른 출입구를 이용했다. 그 입구에는 말 형상과 함께 아래와 같은 설명을 달은 말죽거리 안내문이 붙어 있었는데 이 설명에는 그다지 하자가 없다. 그외 말죽거리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異說)이 있지만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아무튼 내 어릴 적에는 이 근방이 양재역이라 불린 적은 없고 내내 말죽거리라 불렸다.

     

    말죽거리(馬粥巨里)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름이며 각종 기록에는 양재역으로 되어 있다. 양재역은 한양 도성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교통상의 요충지였다. 관리들은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말을 징발하거나 삼십리마다 설치된 역에서 말을 바꾸어 탈수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먼길을 가는 경우 역 부근의 주막에서 여장을 풀고 말도 쉬게 하였다. 긴 여정을 위해 말죽을 많이 먹여야 하는 거리였으므로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보이며 속설에 의하면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가던 중 이곳에서 말을 탄 채로 팥죽을 먹였기 때문에 말죽거리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하여지고 있다.

     

     

    영재역 6번 출구 앞 소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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