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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모 신부의 순교와 계동 석정보름우물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2. 12. 18. 18:15

     

    앞의 글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지도 Carte de la Corée'에서는 지도에만 촛점을 맞추는 바람에 그의 순교의 거룩성이 간과된 감이 있다. 어찌됐든 그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회유되었다면 오늘날의 김대건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에는 103인 성인의 하나로 선포되었으며, 2019년 유네스코 제40차 총회에서는 김대건을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그런 면에서 이승훈 · 이벽·  황사영의 시복(諡福)은 불편하다. (이들은 2021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의해 복권하여 시성됐다) 이들은 이 땅에 가톨릭을 심은 자들로서 신앙의 문제로 죽기는 하였으되, 순교했는지는 알 수 없는 자들이다. 이승훈은 조선 최초 세례자의 명예를 가진 자이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배교를 밥 먹듯이 반복했고 결국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과 같은 단죄를 받아 서소문 밖에서 목이 달아났다. 배교를 반복하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못할 짓이지만 죄를 묻는 입장에서도 짜증나는 일이었다. (☞ '정약용과 이승훈의 배교의 변명')

     

     

    1785년 순교한 김범우의 집 근방에 세워진 명동성당 / 이때 이승훈과 이벽도 붙잡혔으나 중인인 김범우는 처형당했고 양반인 이승훈과 이벽은 풀려났다.

     

    이벽은 공식적으로 조선 최초의 천주교도인 사람이다. 그래서 을사추조사건(1785년 형조에서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던 천주교도를 붙잡아간 사건)으로 체포되었지만 다른 교인들과 달리 순교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같이 붙잡힌 사람들이 형장에 갈 때 이승훈과 함께 살아 남았다. 그는 그런 어정쩡한 상태로서 부친에 의해 집안에 감금되었다가 역병에 걸려 죽었다.

     

    1874년 <조선 천주교회사(Histoire de I’Eglise de Core)>*를 간행한 샤를르 달래(Ch. Dallet) 신부는 그 책에서 이벽을 배교자로 단정했고, <한국기독교교회사> 역시 이벽을 이승훈과 동일하게 배교의 수치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고 적었다. (☞ '천로역정에 섰던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

     

    * 앞서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 땅에 잠입한 다블뤼 신부를 말했었는데, 그는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수집 정리해 온 조선 교회사 및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중국의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냈다.(1862년) 이것이 이른바 <다블뤼 비망록>이라 불리는 문서로서, 달래 신부는 이 문서를 바탕으로 <조선천주교회사>를 집필했다. 다블뤼 신부는 당진군 합덕읍 거더리에서 붙잡혀 1866년 3월 충청도 수영 바닷가 백사장에서 참수되었다.

     

    황사영의 경우는 순교는 했으되 매국(賣國)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 기간 천주교도를 박해하자  북경의 프랑스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이른바 황사영 백서) 프랑스 군대의 조선 침입을 요청하려다 발각되어 죽었다. (☞ '천주교도 정난주 마리아의 삶과 프랑스의 침략') 그의 행위는 명백한 매국이었던 바, 샤를르 달래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황사영의 행위를 "지나친 상상에서 비롯된 몽상가의 저급한 계획"으로 폄하했다.

     

     

    로마교황청 박물관의 황사영 백서 / 신유박해 후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옛 문서들을 파기할 때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의 손으로 넘어갔고 이후 1925년 교황청으로 건너갔다. 62X38cm의 비단에 1만3천 자를 깨알같이 썼다.

     

    이상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에 있던 정약용 형제들은 맏형 정약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천주교를 믿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약용과 정약전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배교를 했고 이로써 처형 대신 유배를 갔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갔다가 흑산도로 이배되었다.(정약전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는데 이때 너무 심심한 나머지 쓴 책이 '현산어보'이다)

     

    하지만 형제들 중 가장 늦게 천주교에 입문한 셋째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스스로 관아에 나아가 신자임을 밝히고 순교하기를 원하였으니 배교를 강요하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아들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들과 딸 등도 모두 순교하였던 바, 아내와 아들들과 딸은 1984년에 순교성인으로 시성되고* 정약종과 정하상은 다시 2014년 순교복자로 시복되었다.

     

    * 1984년 한국 순교성인 103위가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시성될 때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이 대표 성인으로 정해졌다.

     

     

    중림동성당 내의 정하상 바오로 상

     

    형제들 중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막내 정약용은 배교에도 솔선수범하였으니 적극적으로 나서 천주교 신자들을 관가에 고변하였다. 이에 신자들 사이에서는 1,000명의 포졸보다 1명의 정약용이 더 무섭다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반면 정약용의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은 외사촌 윤지충은 1791년 진산사건(정조 15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건)으로 붙잡혀 이 땅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2021년 전북 초남이성지 매장지에서 발견된 순교자 윤지충의 뼈 / 목뼈에 참수형 흔적이 남아 있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은 형의 순교 후 전라도 고산(현 완주군)으로 이주했다. 이후 1795년 고산을 방문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다른 신도들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윤지헌, 강완숙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초기 천주교 포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주문모 신부는 신유박해 때의 체포령에 황해도로 도망갔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하였고, 5월 31일 용산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서울 계동에는 주문모 신부가 세례를 줄 때 사용했다는 석정보름우물이란 이름의 우물이 남아 있다. 지금은 물이 말라 쓰이지 않지만 오랫동안 계동 주민에게 식수 등을 공급했던 이 우물은 천주교에서 보자면 성수 우물이기도 한데, 천주교단체에서 세웠음직한 안내문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다.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우물은 주된 음료 및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던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 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문모 신부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조선 천주교에서 북경 파리 외방전도회에 지도할 사람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라 파견된 첫 외국인 신부이다. 그는 1795년 1월 4일 서울에 도착했고, 가회동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1795년 4월 5일 부활절 날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를 봉헌했다. 이후 서울과 지방을 부지런히 오가며 포교에 힘썼는데,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진 것은 과거 천주교도였던 한영익의 밀고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후 여신도 강완숙의 도움으로 북촌 집 광에 숨어 있다가 황해도 황주로 피신했다. 황해도 해안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포교했던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이때 자신만 살기 위해 도망가는 것은 도리가 아님을 깨닫고 서울로 돌아와 1801년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했으며, 5월 31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때 그를 도왔던 역관 최인길과 윤유일 및 지황, 강완숙 등도 함께 죽었는데 석정보름우물 물맛이 써진 때는 아마도 이때였을 것 같다. 

     

     

    계동 석정보름우물
    순교성지 새남터 성당의 주문모 신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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