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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 진관사의 숨은 독립운동가 백초월 선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21. 22:25

     

    북한산 진관사는 고려 초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유폐되었던 절이다. 왕손을 유폐시킨 자는 당시의 실권자였던 고려 7대 왕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였다. 그녀는 어린 목종을 대신해 12년간 섭정하면서 여황제로서의 절대 권력을 구가했는데, 다음 왕으로는 외척  김치양과 간통해 낳은 아들을 세워 권력을 이어가려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방해가 될 법한 왕순을 핍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으니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을 시해하고 기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이후 강조는 신혈사(神穴寺, 진관사)의 왕순을 데려와 왕위에 올리니 그가 곧 8대 왕 헌종이다. 헌종은 유폐 시절 자신을 극진히 돌보았던 신혈사 진관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대사(大師)로 삼고 1011년 작은 암자였던 신혈사 자리에 진관대사의 법명을 딴 대가람을 세우니 바로 진관사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사경인 대보적경(大寶績經)
    1006년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함께 발원해 만들었다. / 일본 교토 소재 오타니(大谷)대학박물관 소장
    진관사 전경
    진관사 입구의 비와 승탑

     

    진관사는 고려시대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신세로서 외롭게 살다 죽은 자들의 혼령과 전쟁에서 죽은 원귀들을 위로하는 수륙대재(水陸大祭)의 가람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국가 지원의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된 삼각산(북한산)의 대표 가람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수륙제는 600년 이상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거행되어진다. 


    하지만 대가람 진관사는 한국전쟁 당시 모두 불타고 뒤편의 작은 전각인 나한전 · 독성전(獨聖殿) · 칠성각만 살아 남았는데, 2009년 5월 27일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뒤쪽 벽 속에서 3.1운동에 쓰였음직한 태극기와 독립운동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과 '신대한' 2·3호,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의 희귀한 자료들이었다. 

     

    가장 눈길을 끈 물건은 그 자료들을 감싸고 있던 가로 89cm 세로 70cm 크기의 태극기로, 상단에 불에 탄 흔적과 군데군데 손상된 부분도 있었지만 거의 완형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당시 임시정부의 제작 지침에 충실히 만들어진 이 태극기는 일장기를 활용해 만든 것으로, 태극기를 처음 접한 후 진관사 계호스님은 "독립 의지를 더욱 굳게 세우려고 굳이 일장기를 가져다 태극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뜻과 기개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발견 당시의 모습

    태극기 보자기를 펼치자 나온 유물
    현재 진관사에 보관 중인 당시의 태극기 / 이 태극기는 보물로 지정됐다.

     

    함께 발견된 자료 또한 귀한 것이었으니,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외에도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펴낸 신문 '신대한(新大韓)', 국내에서 발행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이름만 전해질뿐 실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불교계 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이 태극기 안에 있었다. 이 자료들의 발행 시기는 모두 3·1운동 이후부터 그해 겨울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보관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당시는 일제 탄압이 거세던 시절이라 그 무렵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음에도 자료들은 양과 질적으로 풍부했고 마치 인쇄기에서 갓 찍어낸 듯 보일 정도로 보관 상태가 좋았다)  


    자료들을 감정한 김주현 경북대 교수는 "신채호가 발행한 '신대한'은 그전까지는 일본외무성 사료관에 1, 17, 18호가 보관돼 있는 게 전부였다"며 "진관사에서 2, 3호가 나온 것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했다. 또 당시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신대한'을 보고, "이 신문만을 가지고도 새로운 논문 몇 편을 쓸 수 있으며 독립운동사적 가치도 매우 큰 유산"이라며 그 앞에서 큰절을 했다고 한다. 아울러 '자유신종보' 역시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귀한 자료였고, 경고문은 친일파 민족배신자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내용이었다. 

     

     

    '신대한(新大韓)'의 3.1운동 관련기사,

     

    그런데 이 태극기와 자료들을 보관한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백초월스님(1878~1944)을 연계시켰다. 일제강점기에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 '신대한' 등은 구하기도 매우 어려웠을뿐더러,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막 인쇄기에서 뽑아낸 듯 정갈한 첫 신문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때 진관사에  독립운동가 초월스님이 있었다는 것이다.  

     

    초월스님은 당시 불교계의 민족지도자였던 한용운·백용성 스님이 3·1운동 여파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자 그 뒤를 이어 불교계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1920~1930년대 진관사에 머물렀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초월스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인해 수차례 옥고를 치른 항일지사였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한 그는 3·1운동 직후 상경해 진관사 등을 근거지로 항일운동을 펼치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형무소에 수감될 때의 백초월스님 / 진관사 제공 사진

     

    진관사 주지 계호스님은 진관사 근방에 구파발 등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당시 초월스님은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군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지금 백초월 선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나 2010년 용인 범륜사의 금봉스님은 그를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금봉스님은 1919년 태어나 어린 시절 진관사로 출가한 분으로 칠성각에서 발견된 자료가 초월스님이 숨기신 게 틀림없다고 하였고, 진관사 태극기 사진을 보자마자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쏟으며 세 번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 김주현 경북대 교수 등이 발표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한 초월스님은 불과 28세 때인 1903년 영원사 조실(祖室·사찰 최고 어른) 자리에 오를 만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승려였다. 그는 1915년 불교계 고등교육기관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이 문을 열자 초대 강사로 내정될 만큼 학식이 높았으니, 1935년 3월 ‘불교시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봉원사에서는 금춘(今春)부터 강당을 여러서 (중략) 백초월 선사를 초빙하야 강사로 취임케 하얏다더라". (후략)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산문을 나와 항일독립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일제 기록에는 그가 "3·1운동이 발발했는데도 불교계 독립운동이 미약한 사실을 개탄했다"는 내용이 있다. 아울러 김주현 교수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공개한 '일제경성지방법원 편철자료' 중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일심교 검거에 관한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초월을 비롯한 일심회는 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을 보면서 용산역에서 다수의 군용열차가 준비되고 조선인 특별지원병이 출정할 것을 예상, 조선운송주식회사 용산영업소 임시 인부로 취업 중인 박수남에게 밀명을 내려 동(同) 군용열차 내에 백묵으로 ‘조선독립만세’ 등의 불온낙서를 쓰게 했다." (후략)

     

    그는 특히 군자금 모금에 힘을 쏟았으니 '매일신보' 1919년 11월 5일 자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본년 4월 중에 서울에 와서 시내 각지를 다니며 숙박을 하고 혁신공보라는 불온문서를 발행하고 또 상해 가정부와 OOO독립군에 청년을 보내 독립운동을 한다 하고 의연금이라고 다액의 금전을 모집하고 (중략) 10월 22일 본정 경찰서에서 잡아 취조 중인데 동인(同人, 초월스님)은 운동비로 베개 속에 오백 원을 감추어 두었더라."

     

     아울러 김주현 교수가 찾아낸 1919년 12월 5일 자 일제 문서 '독립운동자금모집자 검거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초월은 승려로 있는 몸임에도 항상 불온사상을 품고 국권회복을 몽상하여 은근히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 금년 봄 소요발발한 이래 (중략) 금년 4월 경성에 들어와 시내 각처에 숨어 있으면서 우선 불온문서를 간행하여 인심을 교란시킬 계획으로 한국민단본부라는 단체를 경성 중앙학림 내에 설치하여 스스로 민단 부장이 되어 자금과 부원 모집에 분주했다.(후략)"


    1920년 5월 5일 체포된 또 다른 항일 승려 신상완에 대한 일제 첩보 문건에도 초월스님 활동상이 기록돼 있다.

    “신상완은 백초월로부터 1919년 7월경 2000원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동년 8월, 서울로 귀국하여서도 백초월에게 운동 자금 300원을 인수했다.”


    당시 진관사는 마포에 포교당을 두고 있었는데, 그곳은 마포나루에 근접해 국내외 이동이 편하던 곳으로, 초월스님은 삼각산 진관사와 마포 진관사 포교당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승려 신분을 활용해 법회 등으로 가장한 군자금 모금 행사를 열고, 청년 불자들을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 등에 파견한 기록도 발견됐다.

     

    그는 결국 1919년 12월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일본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도쿄에서 붙들려 1920년 3월 9일 국내로 압송된 경력도 있다. 초월스님은 1939년 10월에도 체포되었는데, 1956년 애국동지회가 '한국독립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선승(禪僧) 백초월은 3·1운동 후 임시정부를 위하여 금품을 모집하다가 왜적(倭敵)에 가진 고문을 당하여 반광(半狂) 상태의 폐인이 되어 경성 마포의 어느 포교당에 있었다. 그 교당의 문간방을 빌어 있는 박수남이 (중략) 4272년 기묘(己卯, 1939년)에 봉천행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낙서를 하였던 것이 발각되어 수금(囚禁)되었는데 그 애국사상이 백초월에게서 감수(感受)되었다는 혐의로 구금되어 많은 악형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는 독립운동 혐의로 두 차례 더 검거되었으며, 이와 같은 반복된 체포와 구금은 초월스님의 몸과 마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김주현 교수는 "이후 한동안 초월스님에 대해 '반병신이 됐다’ ‘미치광이가 됐다'는 구전이 있다"고 밝혔다.  

     

    범륜사의 금봉스님도 이 부분을 기억했다. 백초월선사는 고문후유증으로 몹시 고생하였으며, 일제 감시를 피하려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북돋우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다고 증언했다.

     

    "하루는 초월스님과 함께 진관사 경내를 걷는데 초월스님이 대웅전 뒤 북한산(삼각산) 응봉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어. ‘삼각산이 조선이면 왜놈은 달걀이야. 달걀로 삼각산을 아무리 쳐도 삼각산은 끄떡없다'고."

     

    진관사 초입에는 발견된 태극기와 초월스님을 기념하는 표석이 서 있는데, 그 표석에는 칠성각에서 발견된 1919년 11월 27일 자 독립신문 1면의 '태극기'라는 제목의 시(詩)가 새겨져 있다.

    “三角山(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태극기)를/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우리 太極旗(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태극기) 날니네/二千萬 同胞(이천만동포)야 萬歲(만세)를 불러라/다시 산 太極旗(태극기)를 爲(위)해 萬歲萬歲(만세만세)/다시 산 大韓國(대한국).”

     

     

    진관사 입구 태극기 표석
    진관사 입구의 태극기와 백초월스님 사진
    북한산과 진관사 일주문
    진관사 오르는 백초월길의 진관사 태극기 안내판
    해탈문
    홍제루
    대웅전
    명부전과 나한전
    태극기와 자료가 발견된 칠성각
    칠성각 안내문
    이 법당 뒷벽에서 발견되었다.
    2015년 7월 방한한 질 바이든 여사는
    1박2일의 짧은 기간에도 진관사를 찾았다.
    그때의 방문사진이 2021년 문재인 대통령 방미 때 질 바이든에게 전달되었는데 매우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진관사 입구에는 또 이런 안내문도 있다. / 1.21 사태 때 진관사 계곡은 무장공비들의 침투로로 이용됐는데, 이때 김신조는 진관사 개 짖는 소리에 크게 놀랐고 발각될까봐 산으로 도망갔다고 후술했다.
    효자동 1.21사태 표석 / 이후 무장공비들은 방향을 바꾸어 백악산 자하문 초소 쪽으로 내려왔고, 바로 이곳 청와대 바로 뒷편 길에서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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