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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서대문역과 스테이션호텔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 23. 20:58

     

    앞서 말한 조선의 주막과 역원(驛院)은 개화와 더불어 쇠퇴하고 그 역할을 호텔이 대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인천항 입구에 있던 대불호텔 (大仏ホテル, 다이부츠 호테루)로,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가 1887년 말 영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공식 기록이지만 1885년 4월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의 기록에도 대불호텔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영업은 1887년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비망록에 "1885년 4월 5일 도착해 대불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고 적었고, 언더우드는 "고급이라는 대불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으나 호텔의 침대는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 놓은 것에 불과했으며, 천정의 누수를 받기 위한 물동이가 매달려 있었다"고 적었다. 
     
     

    서양인이 그린 '제물포 일본조계지 거리' / 오른쪽 2층가옥에 '다이부츠 호텔'이라는 영문 글씨가 보인다.

     

    즉 현재 모습(2011년 복원)인 서구식 대불호텔이 신축된 해가 1887년이고 창업자 호리 히사타로와 호리 리키타로가 일본식 가옥을 지어 처음 영업을 시작한 해는 1883년인데, 이는 <인천부사(仁川府史, 1933)>에 메이지 16년(1883년) 4월 해운업자 호리 부자(父子)가 일본조계 제12호지, 지금의 본정통 1-1번지에 건물을 건축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최초의 대불호텔 (왼쪽 건물)
    1887년 말에 신축된 대불호텔

     
    대불호텔 은성했다. 하지만 1900년 7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며 호텔은 사양길에 들었고, 1907년 결국 폐업하여 중국인에게 넘어가 음식점이 되었다. 그 외에도 인천에는 중국인 양기당(梁綺堂)이 세운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h)이 운영한 꼬레호텔(Hetel de Coree) 등이 있었다. 
     
    세간에는 스튜어드호텔의 운영자가 중국인 이태(怡泰)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사실로서, 양기당이 주인이었다. 그는 인천화교협회 회장을 오랫동안 지냈는데,(1919~1928) 최근 인천화교협회 회의장 앞마당에서  '華商 怡泰地界' 표지석이 발견된 것은 그 때문인 듯하다. '이태'는 스튜어드호텔의 중국식 이름으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이태객잔, 혹은 이태루로 불렸다. 
     

    스튜어드호텔은 1888년경(추정)에 세워진 우리나라 두 번째 호텔로서 <인천부사>에는 객실 수가 8개였다고 되어 있다. 2층 건물이었음에도 객실 수가 8개뿐인 것은 아랫층은 잡화점, 위층은 호텔로 사용된 까닭이었다. 1894년 2월 처음 한국을 찾았던 영국인 지리학자 이사벨 비숍 여사도 이곳에 묶었는데, "중국인 구역의 중심가 끝, 일본인 구역과의 경계에 위치한 이 호텔은 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다해 모신다"며 만족을 표시했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rs>) 


     

    1888년의 제물포항과 대불호텔
    중국음식점으로 쓰일 때의 사진
    2011년 복원된 대불호텔
    스튜어드호텔(●) /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대불호텔
    2016년 중구 선린동 인천화교협회 회의청 앞마당에서 발견된 스튜어드호텔 표지석/ 인천일보 사진
    '화상 이태지석' / 이태는 스튜어드호텔의 중국명으로서 현재의 '청화원' 자리에 위치했었다.

     

    서울에 지어진 최초의 호텔은 1887년 일본인 이치카와(市川)가 세운 충무로 시천여관이다. 이것이 호텔인지 여관인지 개념이 불확실하기는 한데 아무튼 오래 존립하지는 못했고, 1900년 무렵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 입구에 세워진 경운궁 인근의 서울호텔(Seoul Hotel), 경운궁 대안문 앞의 프렌치호텔과 임페리얼호텔 등이 성업했다. 1896년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02년 지금의 이화여고 자리에 서구식 2층 호텔로 신축됐던 손탁호텔에 대해서는 '손탁 호텔과 정동구락부'에서 설명한 바 있다.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 여행기에 수록된 프렌치호텔 / 그의 여행기에 따르면 프렌치호텔은 1901년 건립됐다.

     
    기타 파성관(巴城館)과 포미여관(浦尾旅館) 등의 일본식 여관도 운영되기 시작했는데, 1906년 개업한 서구식과 왜식이 결합된 경성호텔이 인기가 많았다. 이름이 다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진고개(충무로 입구)와 남산 기슭에는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왜식 여관들이 상당수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성호텔 정원 전경

     

    서대문 부근 스테이션호텔의 역사는 1900년 7월 8일 경인선의 완전 개통과 함께 시작되었다. 1897년 3월 22일 미국인 모스에 의해 착공된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구간 33.2km가 개통되었으며, 이후 일본인에 의해 한강철교가 건설되며 1900년 7월 8일 드디어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인선의 종착역인 '경성역'(京城驛)은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이 아닌 서대문역으로,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자외국어고 일대에 위치했다.
     
     

    이화여고 정문 앞의 서대문정거장 터 표석
    표석 주변

     
    (지금은 상상이 안 가지만) 당시의 서대문은 경운궁과 정동 공사관 거리가 있던 당대의 정치 1번지였던 바, 당연히 서대문역이 경성역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인 엠벌리의 스테이션호텔은 그와 같은 배경으로 세워진 것이니 이름도 '정거장호텔'이었다. 1901년 조선을 방문해 스테이션호텔에 투숙한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는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에서 '정거장호텔'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서울)역을 나와 스테이션호텔로 따라갔는데, 여러 채의 소규모 조선식 가옥이 이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여관으로서 정거장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곳 주인 엠벌리 씨와 그의 부인은 영국 사람으로 예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 


     

    버튼 홈즈의 여행기 속의 스테이션호텔

     

    1901년 4월 영업을 시작한 스테이션호텔은 근방에 개설된 서대문 전차 정거장에 편승해 더욱 성업하였으니 곧 2층 서양식 호텔로 탈바꿈했다. 여행객들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이동한 다음, 전차로 갈아타고 서울의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이 호텔은 1905년 프랑스인 마르텡에게 고가에 팔렸고 애스터하우스(Astor House)로 개명됐다. 애스터하우스는 이후 마전여관(馬田旅館)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마르텡의 한자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었다.
     
    애스터하우스는 경운궁 대안문 바로 옆에 위치한 팔레호텔(Hotel du Palais)과 함께 서울의 근대식 숙박 시설의 선구자로서 큰 인기를 누렸던 바, 미국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가 쓴 <황제 납치 프로젝트/The cat and the king> (1912년 출간)와  <황제의 옥새 /The Great Cardinal Seal> (1914년 출간)의 중요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l, 1872~1909)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성원했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니스트 베델은 일제의 집요한 베텔 처벌 요구로써 영국공사관에서 재판을 받았다. 1908년 6월 그는 3주간의 금고형과 해외추방을 처분받고 상해로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조선에 들어와 신문 복간에 힘썼으나 1909년 5월 1일 자신이 머물던 애스터하우스에서 37세로 일기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베델에게는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애스터하우스 전경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
    당시의 주변 풍경 / ● 표시 건물이 애스터하우스이고 뒤로 보이는 건물은 프랑스공사관, 가운데 우진각 지붕은 경기감영의 정문인 포정문, 왼쪽 위 희미히게 보이는 문이 서대문이다.

     

    당시로 볼 때는 영원할 듯하였던 서대문역과 애스터하우스였지만 영화는 뜻밖에도 오래가지 못했다. 서대문역은 1905년 일제에 의해 경부선이 개통되며 경부선 열차의 시·종착역이 되었으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이 심화되며 용산역이 경부선 열차의 시·종착역으로 바뀌었고, 1906년 경의선의  완공과 함께 그 역시 용산역이 기점이 되며 무게 중심이 옮겨갔던 것이다. 본토의 일본군과 용산 주둔일본군들을 만주로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서대문역의 쇠퇴는 이처럼  러일전쟁 후 급속화되었고, 대한제국 정치 1번지 정동에는 차츰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던 바, 사실상 주권국가로서의 자격이 상실되었다. 이에 정동의 외국공관들은 철수를 개시하니 서대문역을 통해 인천항으로 가는 외교관들의 모습은 많은 외국인들이 승·하차하던 은성했던 서대문역의 마지막 풍경일는지도 몰랐다. 
     
     

    서대문역
    서대문역 대합실로 들어가는 여행객들
    서대문역으로 들어온 열차와 승하차하는 승객들

     
    러일전쟁 후 경부선 열차의 시·종착역은 남대문으로 변경되었고 경성역의 이름도 남대문 정거장이 가져갔다. 당시 서울의 일본인 거주지가 남대문과 가까운 남산 일대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서대문 정거장은 한적한 보통 역으로서 전락하고 말았으며 1919년 3월 31일에는 완전히 문을 닫았던 바, 폐역 직전인 3월 22일 <매일신보>는 정거장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수년 전까지는 승객이 남대문보다 많아서 유망한 정거장으로 인정되었더니 최근에 이르러서는 서대문에는 하루에 기차가 몇 번씩 떠나지도 아니하고 다만 석탄과 신탄이 조금씩 풀릴 뿐 예전에 번창하던 자취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게 되었도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서대문역은 3월 31일 폐역 당일 오후 9시 59분 인천발 하행 열차에서 승객 열한 명이 내리고, 10시 10분에 떠나는 인천행 열차에 서른두 명의 승객을 취급한 것이 마지막 운행으로 집계되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던 바, 에스터하우스 역시 더 이상의 존립이 불가능했다.
     
    인천의 대불호텔과 스튜어드호텔이 그러했듯, 애스터하우스 역시 짧은 영화를 뒤로 하고 어느 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였는데, 지금은 스테이션호텔이나 애스터하우스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고 그 뒤편 마당에 있던 회화나무만이 서대문 농협중앙회 앞으로 옮겨져 서 있다. 농협중앙회 안내문에는 "원래 농업박물관 뒤쪽에 심어져 있던 것을 1986년 대강당 신축 시 이곳으로 옮겨 심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농업박물관이 스테이션호텔이 있던  곳인 셈이다.
     
     

    서대문 농협중앙회 건물 앞의 회화나무
    서대문 농업박물관 (앞의 표석은 김종서 대감 집 터를 알리는 표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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