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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오군란의 현장 서대문 천연정과 청수장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2. 20. 20:20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은 영조 17년(1741)에 세워진 천연정(天然亭)에서 유래되었다. 천연정은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서지(西池) 곁에 세워졌으며,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맑은 물에서 연꽃이 피어나니 천연스러워 꾸밈이 없도다(淸水出芙蓉, 天然去雕飾)」라는 시구에서 이름을 빌렸다고 한다. 서지에는 시구처럼 연꽃이 가득했으나(아래 사진) 일제시대에 메워져 죽첨(다케조에) 공립보통학교*가 되었고 지금은 금화초등학교가 위치한다.

     

    * 다케조에(竹添進一郞)는 구한말의 일본공사 이름이다. 

     

     

    천연정과 연꽃 가득한 서지의 옛 사진 / 서지 왼쪽에 경기중군영 건물이 보인다.

     

    서지는 태종 7년(1407) 돈의문 서북쪽에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한 누각 모화루(慕華褸)를 세울 때 만들어진 연못으로 흥인지문 밖의 동지(東池), 숭례문 밖의 남지(南池)와 같은 풍수 차원의 연못이었다. 서지는 동서 380척(114m), 남북 300척(90m), 깊이 2~3장에 이르는 큰 연못이었으며 못이 완성된 후 개성 숭교사 연지의 연꽃들을 배에 실어 뿌리째 옮겨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숭례문 밖 남지터 표석

     

    영조 때에는 이 서지 인근에 경기도 순영(巡營)을 총괄하는 경기감영의 중군영(中軍營)이 설치되었는데 군영 문 앞으로 맑고 차가운 물이 솟는 샘이 있어 흔히 청수관(淸水館)이라는 속명으로 불렸다. 그리고 청수관 내의 서상헌(西爽軒) 청원각(淸遠閣) 등의 즐비한 건물이 서지와 어우러져 승경(勝景)을 선사했던 까닭에 많은 문인 묵객(墨客)이 찾는 장소가 되었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외무대신 미야모토(宮本小一)가 이곳에서 머물렀고, 이듬해에는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머물면서 조일수호조규의 후속 조치로서 원산과 인천의 개항을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고종 17년(1880) 11월 하나부사는 정식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부임하였고 앞서의 경험 때문인지 청수장에 짐을 풀었다. 수행원 15명, 호위군인 15명, 시종 4명으로, 이것은 그대로 일본공사관 개설로 연결되었다. 무슨 속셈인지 하나부사는 공사관 건물을 따로 얻으려 하지 않고 뭉기적거렸다. 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경험이 전무했던 조선정부 또한 관례를 알지 못해 적당한 대처를 못했는데, 다만 일본공사관이 사대문 안 도성에 마련되는 것은 마뜩지 않아했던지라 이래저래 서로 어영부영 사이 청수장 한편이 일본공사관으로 변해버렸다  (일본공사관 자리에는 현재 동명여중이 위치한다)

     

     

    금화초등학교 정문 왼편의 청수관 터 표석

     

    * 표석의 내용 : 청수관은 조선시대 경기중군영 안에 있던 건물이다. 1880년(고종 17) 하나부사가 이 건물에 입주하면서 일본공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공관인 이 건물은 1882년(고종 19) 불타 없어졌다. 

     

     

    청수관의 입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동명여자중학교
    금화초등학교 정문 오른편의 경기중군영 터 & 천연정 터 표석 / 경기중군영은 경기감영의 직할군이 주둔하던 곳으로 경기감영의 서쪽 끝에 있었다.
    금화초등학교에서 본 서대문 길
    18세기 <도성도> 속의 서대문 부근 / ● 표시 옆으로 천연정, 연지(서지), 기영(경기감영)이 보인다.
    초대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외교관저를 설치한 일본은 처음에는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오히려 선진국방을 표방한 신식군대의 양성을 도왔다. 이에 신설된 군대가 별기대(別技隊=별기군)으로 신식 군대답게 양반가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1881년 봄에 창설된 별기대는 일본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교관을 맡아 그간 일본이 습득한 프로이센 식의 훈련을 시켰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총을 메고 뛰느라 먼지가 날려 공중을 덮으니 장안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일이라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었다.

     

     

    별기대 / 외양상으로는 후져 보이나 서양식 소총이 지급된 신식군대였다.
    별기대 훈련 광경 / 오른쪽 교관이 호리모토 레이조로 보인다.

     

    별기대에 속한 별기군은 전원이 직업군인으로서 높은 급료와 양질을 보급을 받았고 처우 또한 좋았다. 반면 기존의 구식군대는 점점 쪼그라들었으니 과거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은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營)으로 축소·통폐합되었다. 뿐만 아니라 처우도 급락하였던 바, 별기대가 창설된 이후 13달 동안 녹봉미를 받지 못했고 게다가 겨우 받은 녹봉미에 겨와 모래가 반이었다. 

     

    이에 가뜩이나 왜별기(倭別技, 구식군대가 별기군을 부르는 말)에 대해 높던 불만이 결국은 폭발하였으니 이것이 1882년 임오년 6월 9일(음력)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다.

     

    과거 훈련도감 군사들이 주축이 된 쿠데타 군은 가장 먼저 남산 북쪽에 있던 별기대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공격하였다. 호리모토는 달아났지만 결국 구리개(을지로 입구)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그 밖에도 13명의 일본군이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 구식군대들 또한 일반 폭도들과 합세해 천연동으로 몰려들었던 바,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른 후 탈출하여 20여 명의 공사관원과 함께 인천으로 가 배를 탔다.

     

    겁에 질린 그들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 같은 행동이 인천까지 이어져 오히려 조선인 백성들이 많이 죽거나 다쳤다. 

     

     

    임오군란 당시 청수관을 습격하는 조선군 / 앞에 서지가 보이고 그 위쪽으로 조선군들이 밀려들고 있다.
    <경기감영도> 속의 경기중군영 / 리움미술관
    1884년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천연정과 서지 / '무명의 더쿠' 사진
    하나부사 일행의 탈출을 그린 일본화 / 이들은 6월 12일 영국의 플라잉피시(The Flying Fish)호에 구조돼 15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임오군란으로 불탄 일본공사관 / 오른쪽으로 천연정이 보인다.

     

    군인들은 녹봉미를 공급하는 관청인 선혜청을 습격하고 고관들의 집도 습격해 선혜청 당상 민겸호, 영돈녕부사 이최응, 전 선혜청 당상 김보현을 붙잡았다. 지급되어야 할 녹봉미를 착복한 죄였다. 그 과정에서 이최응은 담을 넘어 도망가다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고, 민겸호와 김보현은 창덕궁으로 끌려 와 흥선대원군이 좌정한 중희당 계단 아래서 맞아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창덕궁 개천에 버려졌다.

     

    제 아들 고종과 며느리 민왕후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 운현궁에 칩거하던 흥선대원군은 그들 구식군인들에 추대되어 다시 권좌에 오르니 오랜만에 살판이 났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좋은 날도 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잠도 설칠 즈음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행복을 누린 날은 고작 33일에 불과했으니, 그는 민씨 일파가 청병한 청나라 군대에 의해 중국 천진으로 잡혀가  3년 2개월 동안 구금돼 있다 겨우 풀려나게 된다. (☞ '흥선대원군이 붙잡혀간 동관왕묘')

     

     

    <동궐도> 속의 창덕궁 중희당 / 중희당은 사라지고 지금은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만 남았다.
    창덕궁 칠분서·삼삼와·승화루
    운현궁 마당 / 뒤에 보이는 건물은 1911년에 지어진 양관(洋館)이다.

     

    민씨 일파가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는 다음에는 고종의 요청에 의해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살고 있는 조선 군인들을 토벌했다. 그곳에는 당시 2영의 하급 군인이 많이 모여 살았던 바, 왕십리 쪽은 마건충과 원세개 등의 청군이 출동했고, 이태원 쪽은 사령관 오장경이 직접 출동해 마구잡이로 조선인들을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이 심했던 조선군인 수십 명이 사살되었고, 체포된 자 중 또 수십 명이 처형당했다.

     

    이후 서울에는 오장경과 원세개 등이 이끄는 청군이 상주하게 됐고, 5백년 조선 역사에 전례 없던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새파랗게 젊은 23살의 원세개는 가마를 타고 궁중을 드나들며 왕 이하 신료들을 하대(下待)했지만, 고종은 항의는커녕 그저 고분고분 거리며 끓는 속을 삭혀야 했다.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뭔 죄인지, 임오군란 진압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중국인에 대한 특혜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조규를 통해- 기존 상권을 졸지에 청국 상인들에게 빼앗겨버렸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은 한마디로 일체의 규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통상 특권으로, 8 23일 체결된 조약문의 서문에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번봉(藩封, 제후국)이었다 (朝鮮久列藩封)」고 쓰여 있었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

     

    조선은 속국이니 종주국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중에의 반영이었으니 기존의 칠패시장(남대문시장)은 빠른 속도로 중국인들에 의해 잠식되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돈이 없던 조선은 중국에 손을 벌려 차관을 들여왔는데, 차관금액이 50만냥, 연리 8% (5년 거치 12년 상환)의 조건이었다. 이때 중국에 요구에 의해 제공된 담보가 기가 막혔으니, 1차 담보는 관세, 2차 담보는 홍삼세, 3차 담보로 광산세였다. 조선의 알짜배기가 망라된 것으로 조선은 결국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조선정부는 1883년 2월에도 20만냥의 차관을 들여왔는데, 이때는 관세징수권·산림벌채권·어로채취권 등이 차관제공의 대개로 제공되었고, 모두 탈취당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본 중국대사관 / 대사관 자리는 임오군란 당시 원세개의 청군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의 계산서 또한 혹독했다. 일본정부가 조선에 청구한 금액은 피해 유족 보상금 5만엔을 포함한 총 55만엔이었다. 돈이 없었던 조선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연리 8%의 이자로 차관을 빌려 그것을 다시 일본에 내주어야 했는데, 당시 조선정부 1년 예산의 1/3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때 조선정부는 우선 가진 돈을 털어 15만 엔을 배상해주고 나머지는 박영효를 수신사로 보내 꾸어오게 했다. 그러자 일본정부는 배상금 일부를 탕감해주고 5년의 상환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해 줌과 함께 17만 엔을 빌려주었다. (마찬가지로 이율은 8%였는데 이 중 5만엔은 배상금으로 공제했다) 하지만 이 역시 거저 빌려준 게 아니라 부산 세관의 관세 수입과 서천 사금 광산을 담보로 잡았다. 근대조선은 개항과 함께 이렇듯 빚더미를 안고 출발했던 것이니 그 잘못된 시작점이 바로 임오군란이었다.

     

    아울러 일본은 이때 일본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일본군의 조선국 내 주둔을 관철시키고, 공사관저도 청수장을 떠나 4대문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잠시 종로 박영효의 집(박영효는 집이 여러 채였던지라)에 두었던 공사관은 마침내 남산 왜성대(임진왜란 때 왜군이 둔병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에 자리하게 되는데, 청·일 양국 군사의 조선 주둔은 결국 미구의 청일전쟁을 불러오게 된다.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일본공사관 / 1895년 청일전쟁 발발 직후의 사진이다.
    1900년대 초의 일본공사관 / 공사관 아래 있던 일본인 가옥들이 철거되고 담장이 둘러쳐졌다.
    이곳에는 결국 조선통감의 관저가 자리하게 된다. / 을사늑사 후 리모델링 되어 1906년 2월 1일부터 통감관저로 쓰였다. 이 사진은 1909년 2월 6일 순종이 통감관저를 방문했을 때의 것이다.
    남산 통감관저 터 / 1910년 한일합병 후 총독관저가 되었다.
    그곳에 새겨진 글과 그림 /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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