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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도 정난주 마리아의 삶과 프랑스의 침략
    탐라의 재발견 2021. 11. 3. 23:30

     

    '세기'(Centry)의 개념은 서양 것이기는 하나, (동양은 60갑자) 조선의 18, 19세기를 구분 지음에 매우 유용하다. 탕평으로 정치와 민생이 안정되고, 그리고 그 바탕에 학문 또한 진작되어 '조선의 르네상스'라고도 칭해지는 영·정조의 시대가 18세기와 함께 끝나고, 노론 일당독재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19세기가 새로운 왕 순조의 즉위와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연찮게도 19세기가 시작된 1801년이 순조의 즉위년이다)

     

    그 19세기는 시작부터 불안했다. 알렉시오 세례명을 가진 황사영이라는 자가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간섭해 달라며 프랑스 군대의 조선 침입을 청하는 외세 청병(請兵) 행위를 했고, 그와 같은 요구를 적어 북경의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던 편지인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가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조야(朝野)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흔히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 불리는 그 일의 발단은 다음 같았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11살의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였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기회에 자신의 정적인 친(親) 정조 계열의 노론 시파(時派)를 몰아내려 했다. 문제는 그 시파들 중에 천주교도가 많다는 것이었으니, 그 외도 여러 가지 연고로써 조선의 천주교도들이 희생되었다.(신유박해)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는데, 더러는 산간벽지로 숨어들기도 했다. 

     

     

    서소문역사공원의 순교자 현양탑 /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에서 희생된 자들을 기려 1984년 세웠다. 조선시대 형구인 칼을 형상화했다.
    중림동 약현성당 / 서소문 밖 형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려 1892년 약현 고개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다.

     

    그렇게 숨은 자 가운데 황사영이 있었다. 황사영은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하다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는데, 정약현의 아우 정약종에게 사사한 것이 계기였다. 그런데 실학자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는 모두 천주교도였고 부인이 된 정난주 역시 독실한 신자였던 바, 황사영도 자연히 천주교도가 되었다.

     

     

    황사영의 초상 / 황사영은 결혼 후 조선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알렉시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1791년 신해박해 후 관직을 그만두고 은밀한 포교활동을 이어갔다.

     

    신유박해 때 정약용의 배 다른 맏형이자 정난주의 아버지인 정약현은 시종일관 천주교를 부정해 풀려났다. 사실 그는 형제 중에서 천주교를 믿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벼슬도 지내지 않아 엮을거리가 없었다. 반면 정약종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믿음을 견지해 결국 아들 정하상과 더불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를 배교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 

     

    바로 그 무렵, 정씨 형제의 국문 과정에서 황사영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에 곧바로 황사영의 수배령이 떨어졌으나 천만 다행히도 붙잡히기 직전 도망쳐 제천 봉양면의 배론(舟論)이란 오지로 숨어들었다. 그는 거기서 토굴을 판 후 옹기장이로 위장해 살며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위와 같은 편지를 쓴 것인데, 심부름꾼 옥천희가 의주에서 체포되며 붙잡혔고, 대역죄의 죄목으로 1801년 11월 서소문 밖에서 사지를 토막 내는 능지처사를 당해 죽었다.*

     

    * 황사영에게 조선 최고의 중벌이 내려진 것은 종교상의 문제보다도 국사범인 까닭이었다. 즉 그는 개인의 신앙을 위해 제 나라를 다른 나라에 넘기려는 중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는 청나라 황제가 조선에 압력을 넣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것을 프랑스에 요청하면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키거나 혹은 프랑스의 전함 수백 척 · 군대 5만∼6만 명으로써 조선을 정벌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백서에 제시하였다. 그의 죄는 20세기 들어서도 면책되지 않았고 시성의 자격에서도 배제됐다. 

     

     

    배론성지 / 황사영이 숨어살며 백서를 쓴 토굴이 배론성지라는 이름으로 단장됐다.
    황사영의 백서 / 백서(帛書)는 비단에 쓰여진 글씨라는 뜻으로,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비단에는 붓으로 1만 3천 311자를 깨알같이 적었다. 갑오개혁 때 조선 주재 뮤텔 주교 손에 들어가 지금은 로마 교황청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 유배 생활 끝에 죽었으나,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移配)됐다 1818년 풀려났다. 정약용의 누나이자 황사영의 와이프이던 정난주는 간난 아들 · 시어머니와 친정인 남양주의 마재로 피신했다 붙잡혔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물론이요 데리고 있는 종들까지 모두 유배를 갔으니 정약현의 아내는 거제도의 관비가 되었고, 정난주는 두 살배기 아들 경한과 함께 제주도에 관비로 보내졌는데, 제주도 유배길에 경한을 추자도에 버림으로써 아들은 노비가 됨을 면할 수 있었다.*

     

    * 정난주는 아들 경한을 포대기에 싸 여벌의 옷과 이름자와 생년월일과 함께 추자도 예초리 바닷가 바위에 놓았고, 울음소리를 들은 마을 어부 오씨가 발견하여 길렀다고 한다. 이후 경한은 추자도에서 결혼하여 아들 둘을 길렀는데 지금 추자도에는 그의 묘가 남아 있으며 후손도 살고 있다. (오씨가 경한을 자식처럼 기른 까닭에 지금도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형제로 여겨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배지에서의 정약전의 삶을 다룬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 /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했기에 '검을 현'자를 붙여 호를 현산(玆山)이라 했다. 따라서 '자산어보'도 '현산어보'라고 읽는 것이 옳다.

     

    1773년에 태어난 정난주는 가정환경상 일찍이 입교했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정약종·정약전·정약용 삼형제가 숙부였고, 최초의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는 이벽(李檗, 1754-1785)의 누이가 어머니였다.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인 이승훈 역시 이벽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문하였던 바,(☞ '천로역정에 섰던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 어쩌면 그녀는 정씨 삼형제보다, 그리고 남편인 황사영보다 훨씬 일찍 크리스천이 되었을는지도 몰랐다. (전해지는 말로는 고모부인 이승훈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됐다고 하나 이벽에게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녀의 제주도에서의 삶은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의 활동도 알려진 게 없다. 하긴 노비로서의 삶을 살다 갔으니(1838년 사망) 달리 알려질 게 무엇이 있었겠냐만, 37년의 유배 기간 동안 천시받지 않았고, 오히려 '서울 할머니'로 불리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고희범 저 <이것이 제주다>)

     

    그리고 66살 때 병으로 숨지자 이웃 주민들이 대정읍 동일리에 장사 지내고 이후로도 벌초하며 묘소를 돌보았다고 하는데,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정난주의 묘를 성역화하고 성지로 다듬어놓았다. (기념비에 쓰여 있는 내용은 이상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대정현 북문지
    대정현의 옛 모습은 사라졌으나 성곽의 일부는 아직 남아 있다.
    정난주 마리아의 무덤
    제주시 외도동 마이못 안내문 / 근방에 '정난주 성당'이 있다고 하는데 작은 성당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래 비짓 제주의 모슬포 '정난주 성당' 사진을 대신 올린다.
    모슬포의 일명 '정난주 성당' / 비짓 제주 사진
    대정현 삼의사비 / 1900년 제주도에 횡횡했던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반발하여 일어난 이른바 '이재수의 난'의 주인공인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의 의로운 투쟁 정신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정난주 고난의 길'이라 불리는 답사길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비석의 뒷면

     

    ▲ 뒷면에는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난의 발생과 과정에 대해 한글로 정려하게 적었다. 종교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하게 해주는 비문이다. 

     

    조선과 천주교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이니 프랑스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1866년  자국 선교사 9명이 사망한 일을 구실 삼아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로써 조선을 불법 침공하였다.(병인양요) 이후 조선을 극동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만들려는 계획이 1900년 이재수의 난까지 지어지는 바, 개화기 조선에 있어서의 프랑스의 존재를 공사관 시절을 중심으로 다시 조명해보기로 하겠다. 

     

    1886년 수교 직후의 프랑스 공사관 / <경성부사> 제2권(1936)에서는 '수표교 부근 북쪽 길 오른편 현 관수동 126번지'에 있었다고 돼 있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호레이스 알렌은 '수교 직후 프랑스공사관은 현재의 터(아래 사진)를 구입하는 일이 지연되어 허치슨씨(Mr. Hutchson, Supiotady)의 주택을 사용하였다'고 서술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구 프랑스 공사관과 성벽 사진
    옛 프랑스 공사관은 창덕여중 운동장 한켠에 안내문만 남았다. 프랑스공사관은 정동 열강의 공사관 중 가장 화려한 외관을 자랑했으나 을사늑약 이후 영사관으로 격하되며 서대문구 합동, 지금의 대사관 자리로 옮겨졌다.
    프랑스대사관은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인 김중업의 작품이다.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 김중업의 설계도가 세계의 유명 건축가들을 제치고 공모에 당선되어 화제를 모았으며 1961년 완공된 이후로는 한국 현대건축물의 최고 걸작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현재 대대적으로 신축 리모델링 중이다.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나 걸작 건축물로 불린 건물이 환갑도 맞기 전 리모델링된다는 사실이 좀 의아하다.
    1962년 완공 직후의 프랑스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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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