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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말의 대쪽선비 면암 최익현
    탐라의 재발견 2021. 10. 31. 00:44

     

    면암 최익현의 초상 / 국립제주박물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일반에게 알려진 꼬장꼬장한 이미지 그대로였던 듯, 사헌부 장령 등 언관(言官)을 지내며 흥선대원군을 공박하였던 바, 결국 한직으로 쫓겨났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이상의 권한을 갖게 되자 그간 안동 김문(金門)에 밀린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매진했다. 그는 그 일환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을 중건시키기로 하였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여 자금을 충당했다.

     

    최익현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그 폐단을 지적하며 흥선대원군을 격하게 공박했던 것이니 아래는 1868년(고종 5년) 10월 10일, 그가 올린 상소의 일부다. 

     

    첫째는 토목 공사를 중지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정사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셋째는 당백전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경비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시어 이렇게 의로운 발기를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 2년 동안에 사·농·공·상이 모두 그 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가 되풀이되어 온갖 물건이 축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이 전보다 줄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현 시기의 형편과 세상 인심이 절로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이제 옛날 돈이 통용되어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모두 말하기를, ‘이 돈은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단지 집집마다 바치라는 방(榜)만을 볼 수 있을 뿐 영구히 혁파한다는 밝은 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혹이 점점 짙어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도록 하소서. 

     

    당백전(當百錢)은 '일당백'의 뜻이다. 즉 기존에 쓰던 상평통보의 가치를 백배 부풀린 돈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0배의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5~6배의 가치로 거래되었는데, 이것만으로도 시장경제가 교란되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실물 생산은 늘지 않고 화폐공급만 증가할 때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니, 1866년 12월, 1석에 7~8냥이던 쌀값이 2년 후 44~46냥으로 6배 이상 뛰었다.

     

     

    최익현은 이후 자의반타의반으로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에 은거했다. 하지만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미워하던 고종의 눈에는 들었으니 동부승지와 공조참판을 제수하여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최익현은 이후로도 흥선대원군과 대립했다. 그리하여 서원철폐의 부당성 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공박하고 더불어 고종의 친정(親政)을 주장하였던 바, 마침내 민씨 세력과 힘을 합쳐 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고종은 좋아 입이 찢어졌으나 뭔가 슬픈 시늉은 해야 했을 터, 최익현에 대해 부자간에 갈등을 조장했다는 죄를 물어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최익현이 들어온 곳이라 설명된 옛 화북포구 표석
    제주시 중앙로의 최익현 유배지 표석

     

    최익현은 위리안치의 형을 받고 1873년부터 1875년까지 1년 4개월 동안 제주에 유배되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었으니 위리안치를 벗어나 제멋대로 돌아다녔다.(한말의 김윤식과 더불어 가장 편하게 유배생활을 한 케이스일 것이다) 하지만 소원하던 한라산 유람까지는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 유배가 풀린 1875년 3월, 지인, 노복들과 함께 2박3일의 한라산 유람에 나서 백록담까지 오른 후 명문인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남긴다.  

     

     

    백록담 북쪽 바위의 인증샷 / 옆의 이름 이기온은 면암이 유배 때 교류한 제주 유생으로 한라산 유람에 동행해 안내하였다.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백록담은 '얕은 곳은 무릎까지, 깊은 곳은 허리까지 찼다'고 적었다. (제주일보 사진)

     

    그 이듬해인 1876년은 역사적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문호가 개방된 해이다. 그런데 최익현은 이번에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이었던 쇄국을 주장하고 나섰으니, 도끼를 메고 광화문 앞에서 시위를 할 정도로 극렬히 반대했다. 개항 이후로도 그는 개화·개방정책을 극력으로 저지하고 나섰던 바, 오늘날까지 '수구 꼴통'의 대표 인물 중의 1인으로도 꼽힌다.

     

    그러나 아래의 상소문을 보면 앞서 당백전 발행을 공박하던 때의 정연함이 보이니, 그의 주장은 경제력이 약한 상태로 개방을 하게 되면 결국은 일본에 자본식민지화될 수밖에 없으며, 미구에는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예견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의 예견은 적중되었던 바, 어쩌면 혜안을 지녔던 한말의 유일한 관료였는지도 모른다. (까닭에 그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고도 불린다) 

     

    신은 적들의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정부에서 응당 확정적인 의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으나 아직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그들의 속셈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소문이 떠돌아 입 가진 사람은 모두 분격하며 온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이 소문이 시행된다면 전하의 일은 잘못되고 말 것입니다.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년(1636) 남한산성의 일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병자년에 화친을 한 뒤로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어 오늘까지 관계가 반석 같은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조 임금 때에는 서양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고, 우리 헌종 임금도 들어와서 염탐하는 자들을 모두 주륙하였으니 이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어든 왜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

    감히 고려 때의 우탁(禹倬)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고사를 본받아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큰 계책을 세우고,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조정의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고종의 비답 필사본 / 비답(批答)은 신하가 올린 상소 등에 대한 국왕의 답서를 말한다. 제주박물관의 비답문은 1904년 최익현의 사직상소에 대한 고종의 답문으로, 병을 핑계대지 말고 뻘리 입직하여 보필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최익현은 조선의 희망이었던 열강들의 공사관이 하나 둘 철수하는 것을 보고 이제 일제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력투쟁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늑약을 체결한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다섯 명 대신(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와 함께 8도 사민(士民)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전국을 돌며 강연하며 항일투쟁을 촉구하였다. 실제로 그의 호소는 팔도 백성을 각성시켰던 바, 제천 의병 유인석 등이 봉기하였다.

     

     

    한때 3,000명이 넘는 의병진을 거느리던 의병장 유인석(왼쪽)은 제천 충주 단양 원주 등지의 중부지방을 석권하였으나 제천성이 함락된 후 연해주로 가 함경도에서 건너 온 의병장 홍범도와 합세하였다. 연해주 부호 최재형의 지원을 받은 이들 의병들은 1910년 6월21일 유인석을 도총재로 하는 '13도 의군'을 결성한다. / 한겨레신문 사진

     

    아울러 본인도 무기를 들었던 바, 의병들을 모아 전라북도 정읍에서 봉기하였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의 호남 의병진은 무성서원에 집결해 태인읍으로 진군했는데, 이때 그는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를 발표해 거병의 이유를 만방에 천명하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성(性)이라 하고 신의를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것은 도(道)라고 한다. 사람으로 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노생의 범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개화열국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제 우선 귀국(일본)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논한 다음에 귀국이 반드시 망하게 되고 동양의 화가 그칠 때가 없게 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성서원 / 최익현 임병찬 등이 태인의병을 창의한 곳이기도 하다.

     

    1906년 6월 중순, 최익현의 의병진은 태인읍에 무혈입성하고 이어 정읍, 순창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곡성으로 진격하던 중 마주한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를 격퇴시켰다. 곡성을 점령한 최익현은 남원성을 공격하기 위해 순창 객사(客舍)에 집결했는데 처음에 80명에 불과하던 의병진은  900명까지 늘었고 삼방(三坊) 포군(砲軍)도 합류하여 전력 또한 크게 증강되었다. 그러자 이를 진압하기 위한 남원진위대 1백여 명이 출동하였고,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의병해산을 명하는 고종 황제의 선유조칙을 들고 와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최익현의 의병진은 당시 남원진위대의 군세를 능가했으므로 공세를 취했다면 능히 남원성을 탈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인줄 알았던 진위대가 동족임을 뒤늦게 인지했고 이에 아래와 같은 간곡한 내용의 통첩을 보내 동족상쟁의 비극을 피하고자 하였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

     

    정유재란, 동학혁명 때 큰 전투가 있었던 남원읍성/위키백과 사진

     

    이 상황에서 전주진위대가 진압군에 합류했다. 그러면서 의병들에게 총격이 가해졌는데, 최익현이 대응을 망설이던 중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최익현은 '동포끼리 싸우면 안 된다'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입장을 고수하였던 바, 자신은 그곳에서 순국을 결심하고 주저앉았고 나머지 의병들은 해산시켰다. 의병들의 응사가 없자 진위대 쪽에서도 사격을 멈추고 대치하였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최익현은 체포되었고, 이병찬, 고석진, 김기술 등의 13명 의병장과 함께 전주로 호송되며 의병운동은 끝이 났다. 그는 6월 말 서울로 압송되어 경성부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했다. 그리고 2개월 간 심문을 받은 후 일본 쓰시마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석 달 보름쯤을 갇혀 지내다 중풍과 단식 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병해 이듬해 1월 1일 사망했는데, 죽기 전 같이 투옥된 임병찬에게 다음과 같은 임금에 바치는 유언을 구술하였다.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역사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했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던 바,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할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동포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고려(高麗)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藩屬)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自主)하여 털끝만큼도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성기 때에는 승병(勝兵)이 백여 만이요, 재화(財貨)가 창고에 가득하였으며, 백성은 부유하고, 인구가 번성하였다. 그리하여 수양제와 당태종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원세조(元世祖)도 여덟 번이나 쳐들어온 다음에야 겨우 복속시킬 수 있었다. 

    우리 태조(太祖) 때에 왜적이 여러 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에는 비록 명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全勝)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倭船) 70여 척을 노량(露梁)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 병자호란 때도 만일 임경업 장군의 '곧바로 근거지를 쳐부수자'는 청을 들었다면 청나라 사람들은 그 즉시 멸망하였을 것이니, 그 꾀를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 진실로 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으니 단결하면 싸우면 반드시 왜구를 몰아내고 강토를 회복할 것이리라.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배편으로 옮겨져 부산 초량역에 당도했다. 유해는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의 만장(輓章) 아래 수많은 인파들에 둘러싸인 채 운구되었고, 본가가 있던 논산 노성면 지경리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이후 논산군 상월면으로 옮겨졌다가, 1910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1번지로 이장되었다. 현재의 묘소로 이장된 데는 면암의 유택(幽宅)이 의병들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오지로 옮겨졌다는 설과, 면암과 함께 쓰시마 감옥에 투옥됐던 홍주 의병 유준근과 이식의 거병지로 옮겨졌다는 상반된 설이 존재한다. 

     

     

    최익현의 묘 / 공공누리 사진
    최익현순국비가 세워진 대마도의 남단 이즈하라 항 수선사
    최익현순국비/1986년 8월 3일 일해재단에서 세웠다.
    일본어 안내문
    2016년 발견된 '면암 최익현선생 일본 대마도 유배도'/조선 말기 화가 채용신이 운영하던 미술서화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추정), 왼쪽에는 최익현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 초량역까지 압송되는 과정을, 오른쪽에는 부산항에서 대마도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 그림을 한 폭의 족자에 담았다.(63.5X43.5㎝)
    오른쪽 그림의 부분 확대 / 부산항에 이른 면암(왼쪽)과 임병찬이 일본 상선으로 옮겨 타기 위해 조각배에 오르고 있다.
    최익현을 의지했던 고종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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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