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김만덕과 조광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탐라의 재발견 2021. 10. 30. 00:53

     

    남을 돕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을 흔히 듣는데, 다(多)경험자의 말로는 물질적인 것보다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헤아리는 쪽이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천사의 마음에 악마의 심뽀로 화답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으니 이런 선량함을 악용해 한몫 챙기려는 자도 있다. 그럼에도 착한 얼굴과 착한 목소리 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발견한 것은 쉽지 않아서 대부분 뒤늦게 깨닫고 상처를 받는다. (어떤 체험자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기도 하는 제주 거상(巨商) 김만덕(金萬德, 1739-1812년)의 경우는 이상의 모든 것들을 극복한 듯 보여 더욱 대단히 여겨지는데, 오늘은 그의 선행을 다시 한번 조명해볼까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역대로 그리 많지 않으니 한말에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의 노블레스(귀족)에 대한 묘사는 차라리 모욕에 가깝다. 

     

    "내가 본 조선의 양반들은 극도로 부도덕하였으니 솔선수범의 정신이나 국가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자신의 혈족만 끔찍이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냉철한 눈으로 조선을 바라보았던 영국의 첫 여성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아주 없지는 않으니 대대로 사회적 의무와 관용을 실천해온 경주 최부자집, 800억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희사하고 형제들 또한 몸소 국권회복운동을 하다 고문사, 아사한 우당(友堂) 이회영 집안, 그리고 제주 김만덕..... 그중 세간에 알려진 김만덕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막 대문을 닫는 의인(義人) 경주 최부자의 종손
     대문 옆에는 '독립유공자 최춘 선생 생가'와 '경주 최부자댁' 안내문이 함께 세워져 있다. 

     

    김만덕은 김응렬의 딸로 태어났으며 부모를 잃고 12세 고아가 되었다.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만덕은 나이 든 기녀 집에 의탁하였다. 어른이 된 후, 만덕은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임을 알게 되어,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良人)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 양태(갓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이앙법(모내기)의 등장으로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도 같이 발전한 18세기 조선의 시대 변화를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았다. 

     

    1793년 제주도에서는 세 고을에서만 6백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조정에서는 "작금의 상황은 농작물의 재배도 허락치 않습니다.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이 없으면 장차 제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받았고 이에 2만 섬의 구호식량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1795년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쌀을 사왔는데, 이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했다. (이상 <위키백과>에서 빌려옴)

     

     

    조선일보 DB 그림
    우리역사넷 그림 

     

    김만덕의 선행은 1796년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정조 임금에게 알려졌다. 그러자 정조는 제주도민은 섬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을 깨고 그를 한양으로 불러 올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치하하였고, 포상으로 그녀의 소원인 금강산 유람을 시켜주었다. 그는 유람을 마친 뒤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하다 1812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자식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전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나 양아들 김종주(金鍾周)를 두었다. 김만덕이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난 1840년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김종주에게 '은혜의 빛이 세세토록 빛난다'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씨를 써 주었던 바, 김종주의 후손이 기증한 편액이 제주 국립박물관에 전한다. 김만덕의 객주가 있던 건입포구에는 건물이 재현되었고, 산지천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뜻을 기림과 함께, 매년 나눔과 베풂을 실천한 은인을 찾아 포상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은광연세'의 편액
    재현된 김만덕 객주
    앞쪽에 식당도 있다. 
    김만덕의 장사 무대였던 건입포구. 그는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나눠줄 구휼미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한다.
    산지천 변에 위치한 김만덕 기념관
     김만덕 기념관이 주최하는 여러 행사들

     

    김만덕만큼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니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또 한 명의 제주사람이 있다. 김만덕 후대의 사람으로 1877년부터 1948년까지 실다 간 조광헌(趙匡憲)이라는 분이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야외 석물전시장 한편에서 효자 조광헌 기사비(孝子趙匡憲紀思碑)를 발견함으로써 그를 알게 되었는데, 비석의 안내문에는 그가 제주시 서문통에서 약국을 운영하였고, 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상연동 마을 사람들에게 땅과 밭, 그리고 약을 제공하는 등 끝없는 봉사로써 평생을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조광헌이 살던 시대가 거의 일제시대인 만큼 그의 봉사정신은 당대의 제주사람들에게 더욱 힘이 되고 빛이 났을 법한데,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기려 상연동(현재 연동) 제주해군방어사령부 내에 세웠던 비가 2003년 5월 향토사학자 김익수씨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아들인 조수인씨는 1983년 애월읍에서 사망했고, 제주시에 며느리인 팔순의 김계자씨와 장손인 조철씨가 살고 있는 것이 한 지방신문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그 기사가 20년 전인 2003년의 것이라 아직 생존해 계신지는 모르겠다. 기사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비문은 1933년 문장가 오진영이 썼고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고순흠이 1935년 글을 새겨 세웠다. 

     

    稽古晦翁公室則之

    加敬墓鄕孝思無方

    築石壇我買土井我

    付田農我備藥醫我

    嵂彼親山於戱不忘

    愛及屋鳥神人同孚

    庚午春上蓮洞共豎

     

    회옹(주자)를 공부하여 성실히 그 법도를 따랐고

    조상을 공경하고 고향을 사랑하며 효도하는 마음 한 없도다.

    제단을 쌓으려는 우리에게 돌을 내어주고, 우물을 만들려는 우리에게 땅을 매입해주었으며,

    농사를 지으려는 우리에게 땅을 부쳐주었고, 의사가 필요한 우리에게 약을 준비해주었네.

    높으신 어버이와 같은 은혜 어찌 잊을손가.

    무릇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는 그 집 지붕 위의 까마귀도 사랑하게 되는 법, 그대는 정녕 신과 같이 진실한 사람이도다.

    경오년(1930년) 봄 상연동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 비를 세웠다. 

     

     

    효자 조광헌 기사비
    안내문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