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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제주 지배 100년탐라의 재발견 2021. 10. 25. 21:33
몽골인과 한국인의 외모적 유사성에 대해 '기마민족의 후예들 (I)'에서 사격선수 부순희의 예를 들어 말한 적이 있다. 그 문장을 다시 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의 중계 때는 금메달이 바라다 보이는 현장을 따라 중계 화면이 바쁘게 바뀌는데, 마침 부순희 선수가 금메달을 다투는 순간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9점대의 타깃과 선수들의 얼굴이 번갈아 비치는 그 숨 가쁜 파이널 동안 시청자들은 부순희 선수가 아닌 몽골 선수의 사격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봐야 했다. 카메라 맨 역시 부순희 선수의 얼굴을 몰랐던 듯 계속 몽골 선수에게 포커스를 맞췄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을 몰랐던 캐스터는 그 몽골 선수가 부순희 선수인 양 중계를 계속했던 것이었다. 내 기억으론 그 몽골 선수 역시 초롱초롱한 눈매의 ‘미녀 총잡이’였다.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이유는 당연히 우리나라 사람과 몽골인의 외양이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흡사하다기보다는 거의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니, 같은 극동 민족이라 해도 중국인과 일본인은 구별이 가능하지만 몽골인은 정말로 구별이 어렵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언필칭 반만년이니 아무리 그 뿌리가 같았다 하더라도 민족의 분화는 적어도 2~3천 년 전에 생겨났을 것인데, 그럼에도 지금도 구별이 어려운 걸 보면 참으로 종족의 DNA란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늘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 몽골리안의 DNA에 관한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과 몽골인은 거의 형제 같은 분위기로, 유전자 검사에서도 유사성이 일본인보다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요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친자확인을 위한 검사 같은 것임) 반면 중국인과의 유사성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바, 몽골인이 형제라면 일본인은 사촌 정도가 되겠지만 중국인은 생판 남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최근 뜻밖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접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인과의 유사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기존의 결과와 다름없었지만 그동안 가깝다고 여겨졌던 몽골인과는 유전적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모집단으로 선정된 극동 아시아 민족 중에서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은 만주족이고 다음은 일본인이었다.*
* 이 자료는 2020년 8월 법의학 국제저널 <수사유전학>에 발표된 김욱 단국대 교수와 김원 서울대 교수의 공동 논문으로, 한국 남자 506명을 대상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유전되는 Y염색체의 유전자를 극동 아시아 민족들과 비교·분석해본 결과이다. Y염색체는 부계를 통해 거의 그대로 유전되는 까닭에 수만 년 동안 인류 이동과 민족 분화의 과정에서 돌연변이로 생긴 여러 유전형들까지 차곡차곡 누적돼 있다고 한다.(이 때문에 Y염색체는 '유전자 화석'으로도 불린다)이상의 연구 결과는 몽골인과의 친연성을 강조하던 기존의 결과와는 판이해 한편으로는 적이 당황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몽골인과 비슷한 얼굴 생김새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삼 묻게 되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우리 민족이 몽골계에서 분화되었을 가능성은 의외로 적다. 물론 다른 연구 결과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인의 뿌리를 오랫동안 추적해온 울산 과학기술원(UNIST) 게놈 연구소 소장 박종화 교수의 경우, 한국인의 뿌리는 오히려 베트남 민족과 같은 남방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 박종화 교수의 결론: 하지만 게놈 연구 분석결과를 보면 한국민은 북방계보다 혼혈 남방계의 유전자가 더 많이 섞여 있어요. 결론은 북방계 시베리아인과 남방계 베트남인의 혼혈이 우리민족의 조상이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른 민족보다 내부동일성이 높습니다. 이후 적어도 8,000년 뒤부터는 외부인의 유입이 없었으니까요.
그동안 우리는 우리 한민족이 몽골, 만주 지방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기마민족의 후예라고 추정해왔다. 나 역시 막연히 그렇게 믿어 왔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대규모 민족이동이 있었던 적은 적어도 역사의 기록에는 없다.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북방민족의 한반도 이주는
1) 위만에 축출된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한왕(韓王)이 되었다는 기록,(후한서 동이열전)
2)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잉태된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가 많은 백성들과 함께 남으로 왔다는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
3) 발해가 멸망했을 때 태자 대광현이 수만 호의 사람과 함께 고려로 귀부했다는 기록(고려사)
이상이 전부로서, 기타 흉노족의 후예가 신라와 가야 땅으로 이주해왔다거나,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가 남으로 와 신라를 세웠다거나 하는 얘기는 그저 가설일 뿐이다. 그리고 위에서 예시된 한반도로 이주한 북방 사람들이 반드시 몽골계였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주도 삼별초의 세력을 멸망시킨 원나라가 탐라총관부(1275-1384년)를 설치하고 제주도를 100년 이상 다스렸다는 사실이다. 몽골이 제주도에 처음 설치한 관부는 탐라초토사였다. 이어 탐라총관부 → 탐라국안무사 → (다시) 탐라총관부 →탐라군민만호부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지배를 이어 갔는데, 몽골인은 제주 통치는 1374년 목호(牧胡)의 난이 평정되며 실질적으로 끝이 난다.(☞ '제주사람들에게는 삼별초 역시 침략자였다')
삼별초의 진입이 없었다면 몽골의 제주도 지배도 없었을 것이다. 삼별초를 진압하러 들어온 몽골인들은 제주도의 환경이 말을 키우는 데 최적이라 여겼고, 이에 1276년 성산포에서 160마리의 말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탐라총관부의 출발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몽골이 탐라 백성 1만223명에게 곡식을 지급하도록 고려 정부에 명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에 나온다. 삼별초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보살펴 제주도민의 인망을 얻으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당시의 제주도 인구가 1만223명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후 백년 동안 이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일전에 설명한 대로 목호는 원나라가 설치한 제주도 방목장에서 말을 사육하던 몽골인들을 지칭하는데, 이들이 곧 제주도의 지배층이었다. 그런데 이들 목호들의 지배는 가혹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고려 목(牧) 때나 삼별초 지배기보다 유화적이었고, 게다가 목축업이라는 산업 인프라에 바탕이 된 경제부흥이 있어 그 100년 간 인구가 3배나 증가하였다.(약 3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수탈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구가 오히려 줄어든다)
목호는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된 후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 시작은 명나라가 북원(北元)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탐라 말의 징발을 요구하면서부터였다. 고려정부는 제주도 목호에게 말의 징발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그 말들이 제 종족인 몽골인의 공격에 쓰인다는 사실을 알면서 징발에 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목호들은 말의 징발을 요구하러 온 고려 사신을 죽여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1374년(공민왕 23) 결국 고려는 최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군사로써 탐라 원정을 떠나니, 그 수가 무려 2만 5605명으로 훗날의 요동정벌군(3만 8830명)과도 견줄만한 군세였다. 그리고 이 숫자는 당시 탐라 전체 인구와도 맞먹었는데, 이는 곧 탐라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도 무리가 아니었으니 몽골 통치기에 불어난 인구는 몽골인이거나 고려인이어도 친원(親元)적인 사람일 터였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려정부가 탐라 원정을 감행한 것은 단순히 목호를 제압하자는 뜻보다는 이 기회에 제주도를 고려의 영토로 확실히 귀속시키겠다는 국토회복운동의 일환이었다. 1368년 고려가 신흥 명나라와 정식 국교를 맺으며 현안이 된 문제가 뜻밖에도 제주도의 소유권이었다. 고려는 자신들이 원에 빼앗긴 영토이기에 당연히 고려에 소유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명나라는 원나라의 영토는 곧 자국의 영토라는 생각이었으므로 원의 직할령인 제주도 역시 제 땅이 되어야 했다.
이에 공민왕은 부리나케 '탐라계품표'라는 것을 작성해 명에 보냈다. 역대로 제주도가 한반도에 귀속된 땅이었음을 알린 것이었다.(하지만 이후로도 명나라가 제주도를 껄떡거린 사실을 '명태조 주원장은 제주도를 명나라 땅으로 생각했다'와 '명나라 영락제도 제주도를 탐냈다' 등에서 밝혔다) 더불어 탐라 원정을 기획하였으니, 만일 명나라가 목호 정벌을 구실로 탐라에 출병하여 주둔해버리면 다시 이민족에게 제주도를 내어주게 되는 심각한 문제에 다다르기 때문이었다.
최영 장군은 목호의 진압이라는 것 외에 탐라 영유권의 사명을 가지고 원정에 임했다. 314척의 배로 한림 앞바다 명월포에 도착한 고려군은 이후 목호·탐라도민 연합군과 25일간을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귀포 범섬까지 쫓긴 목호·탐라도민 연합군을 평정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가을의 어느 날, 제주도 남원읍에 있다는 열녀 정씨 비석(烈女鄭氏之碑)을 찾아가며 몽골 지배 100년의 역사가 우리와 몽골인의 유사성의 기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 유사성에는 탐라인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원나라 지배에 놓였던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에 살던 사람의 후손들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의 유전자 속에 전해진 Y염색체가 한민족과 몽골인의 유사성을 형성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인데, 힘들게 찾아낸 제주도 남원면 한남리 자치회관 마당에 위치한 열녀 정씨 비석(烈女鄭氏之碑)은 그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비문의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석곡리 보개(甫介)에 살던 고려 여인 정씨는 당시 몽골인 합적(哈赤 : 군마 관리인) 석아보리개(石阿甫里介)의 부인이었는데, 석아보리개는 목호의 난 때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미인이었던 미망인 정씨는 그후 안무사(安撫使) 직함의 고려군 군관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애정 공세가 멈추지 않자 정씨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요량으로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였던 바, 군관은 결국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정씨는 끝까지 수절했다. (이를 갸륵히 여겨 1834년 3월 제주목사 한응호가 이 비를 세웠다)
원문
앞면: 烈女鄭氏之碑 高麗石谷里甫介之妻哈赤之亂其夫死鄭年少無子有姿色安撫使軍官强欲娶之鄭以死自誓引刀欲自刎竟不得□至老不嫁事
뒷면: 到處見聞 重修古跡 莫非其惠 且矜無后 牧使韓公 特下後振 改造石碑 道光十四年 三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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