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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金淨)의 '이조화명도'
    탐라의 재발견 2021. 9. 20. 07:13

     

    * '충암 김정과 부인 송씨'에서 이어짐.

     

    앞에 소개한 '우도가'(牛島歌)에서 보았듯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문장은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니 과연 두 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자의 글솜씨라 할 만하다. 그런데 충암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아래의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를 보면 단박에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러다 그것을 충암이 그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그림 속에는 곤줄박이나 박새로 보이는 두 마리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그래서 '두 마리 새가 서로 화답하여 우는 그림'이라는 뜻의 '이조화명도'라는 제목이 붙여진 듯한데,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화답하여 우는 것 같지는 않고 위쪽의 수컷이 용감히 수작을 걸어 옴에 (까닭에 나뭇가지가 휘었다) 아래쪽의 암컷이 긴장한 채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애써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다.  

     

     

    이조화명도(한지에 묵화. 31.5×10.7㎝) 
     흑백 처리한 이조화명도 

     

    말한 대로 그림 속의 새는 곤줄박이나 박새 같은 한국의 텃새이고, 그 새들이 앉은 나무는 개산초나무로 보인다. 개산초나무는 죽엽초, 사철초피나무로도 불리며 학명은 'Zanthoxylum planispinum'이다. 그런데 개산초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생하는 산초나무나 초피나무와 달리 한반도의 남해안이나 제주도에서만 서식하는 바, 만일 그림 속의 초목이 개산초나무가 틀림없다면 이 그림은 충암의 제주 유배기간인 1520년 8월 ~ 1521년 10월 사이에 그려졌을 것이다.

     

     

    개산초나무/이명호의 야생화 갤러리 사진

     

    이처럼 유배 기간에도 그림을 그렸던 충암이니 만큼 이 같은 화조화(花鳥畵) 외에 제주의 풍광을 담은 문인화도 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밖의 그림은 전혀 전하는 게 없고, 위 그림도 조선이 아닌 중국에서 전해지던 것을 청나라 사신으로 갔던 연암 박지원이 언급을 함으로써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260년쯤 뒤인 1780년 여름, 연암 박지원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소주(蘇州) 사람 호응권(胡應權)이 화첩 한 권을 가지고 왔다. 표지가 지저분하고 찢어져서 일견 값어치 없어 보였지만 화첩의 주인 호응권은 거기에 수록된 그림만큼은 값어치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호응권은 총 30점의 그림이 수록된 그 화첩을 조선 사람에게 샀다고 했다. 그런데 그림 중에는 낙관이 없는 것도 있어 그린 이를 알지 못하니 부디 고증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연암이 이를 흔쾌히 수락하여 낙관이 있는 것은 낙관을 근거로, 별호(別號)나 이름이 있는 것은 또 그것을 근거로, 아예 없는 것은 화풍을 근거로 화첩 속의 화가 16명을 모두 밝혀냈는데, 이것이 이른바 <열상화보(冽上畵譜)>이다. 충암 김정의 그림은 이 <열상화보>에 실려 있는 첫 작품으로 연암은 그것을 '김정의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라고 설명했다. 기타 그림은 다음과 같다. 

     

    김식(金埴)의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이경윤(李慶胤)의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정(李霆)의 '녹죽도(綠竹圖)' '묵죽도(墨竹圖)', 이징(李澄)의 '노안도(蘆雁圖)', 김명국(金明國)의 '노선결기도', 윤두서(尹斗緖)의 '연강효천도(烟江曉天圖)' '임지사자도(臨紙寫字圖)', 정선(鄭善)의 '춘산등림도(春山登臨圖)' '산수도(山水圖)' '사시도(四時圖)' '대은암도(大隱巖圖)', 조영석의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김윤겸(金允謙)의 '도두환주도(渡頭喚舟圖)', 심사정(沈師正)의 '금강도(金剛圖)' '초충화조도(草蟲花鳥圖)', 윤덕희(尹德熙)의 '심수노옥도(深樹老屋圖)' '백마도(白馬圖)' '군마도(群馬圖)'  '팔준도(八駿圖)'  '춘지세마도(春池洗馬圖)' '쇄마도(刷馬圖)', 유덕장(柳德章)의 '무중수죽도(霧中睡竹圖)' '설죽도(雪竹圖)', 이인상(李麟祥)의 '검선도(劍仙圖)' '송석도(松石圖)', 강세황(姜世晃)의 '난죽도(蘭竹圖)' '묵죽도(墨竹圖)', 허필의 '추강만범도(秋江滿泛圖)' 이상 30점이다.

     

    하지만 <열상화보>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 <열하일기>에 위의 내용만이 실려 있으므로 <열상화보> 속의 '이조화명도'가 내가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본 그림인지는 명확지 않다. 하지만 <열하일기> 관내정사(關內程史)에서 김정의 뛰어난 그림솜씨를 논하고 있고,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87~1547, 송시열의 증조할아버지)도 김정을 기려 쓴 <행장(行狀)>에서 솜씨를 찬했던 바, 화가로서의 그의 실력을 따로 물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송인수는 또 <행장>에서 김정에 대해 말하기를 "축재(蓄財)는커녕 살림조차 돌보지 않았으니 청탁이 통할 리 없었다. 정파(政派)를 만들려 하지 않아 추종하는 자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녹봉은 친척에게 고루 나눠주었다..... 제주의 풍속이 잡신을 숭상하고 예제(禮制)를 모르므로, 공(公)이 초상(初喪), 장사(葬事), 제사(祭祀)에 대한 예법을 가르치고 백성을 지도하니 풍속이 크게 변했다"고 하였다.

     

    앞서 말했듯 충암이 제주에 머문 기간은 1년 2개월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이렇듯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을 보면, 그가 천수를 누렸으면 조선사회 전반에 많은 긍정적 변화를 야기시켰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배지 제주에서 사사(賜死)되었는데, 그가 술에 탄 독액을 마시기 전 읊었다는 다음의 임절사(臨絶辭)에는 그 애통함이 절절하다. 말한 대로 그때 나이 불과 서른여섯이었다.  

     

    投絶國兮作孤魂  투절국혜작고혼

    遺慈母兮隔天倫  유자모혜격천륜

    遭斯世兮隕余身  조사세혜운여신

    乘雲氣兮歷帝閽  승운기혜력제혼

    從屈原兮高逍遙  종굴원혜고소요

    長夜暝兮何時朝  장야명혜하시조

    烱丹衷兮埋草菜  경단충혜매초채

    堂堂壯志兮中道摧 당당장지혜중도최

    嗚呼千秋萬世兮應我哀 오호천추만세혜응아애

     

    외딴섬에 귀양 와 외로운 넋이 되어

    어머니를 두고 가니 천륜을 어기누나.

    이런 세상 만나 내 목숨을 떨구니

    구름 타고 옥황상제 궁궐에 가서

    굴원을 따라 아득히 노닐련다만,

    긴 밤 너무도 어두워라, 아침이 언제 오리.

    빛나는 단심(丹心)은 잡초에 묻히고

    당당하고 장한 뜻은 중도에 꺾이나니

    아아 천 년 뒤, 이 슬픔에 응답 있으리라.

     

     

    제주 오현단에 세워진 임절사 시비

     

    마지막 '오호천추만세혜응아애'(嗚呼千秋萬世兮應我哀)의 문장을 "아아, 세월이여 내 슬픔에 응답하라"고 번역한 예도 보았는데, 어느 쪽이 됐든 통절하기 그지없다. 후손인 내가 2차에 걸쳐 조명한 내용이 작은 응답이라도 되었을지..... 김정의 생몰연대는 1486(성종 17)∼1521(중종 16)년이고,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 또는 고봉(孤峯)이며,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김장유(金將有)의 후손으로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김효정(金孝貞)의 아들이다.  

     

     

    제주 오현단의 충암 적려유허비 
    충암이 팠다는 판서정.  제주도 사람들이 빗물을 받아 마시는 것을 보고 충암이 팠다는 우물 자리이다. 충암이 형조 판서를 지낸 까닭에 이후 우물은 판서정으로 불리며 인근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었으나 1940년 매몰되었다.
     판서정 옆 안내문  이 안내문 앞은 늘 쓰레기나 쓰레기통이 놓여 있어 지적이 끊이지 않는데 가서 확인해보니 시장통의 후미라는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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