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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암 김정(金淨)과 부인 송씨
    탐라의 재발견 2021. 9. 19. 05:43

     

    제주 오현단(五賢壇)에 모셔진 다섯 위인 중에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은 그 첫머리를 자리한다. 그 다섯 명 중 제주와 맺은 인연이 가장 빠른 까닭인데, 정작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다. 하지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 중종반정을 다룬 드라마 등에서 그 활약상을 익히 본 바가 있다. 충암은 정암과 동시대의 인물로, 같은 노선을 추구하다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제주와 관련된 5명의 위인을 모신 제단 오현단.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의 다섯 유학자를 모셨다. 가운데 비석은 오현단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고, 왼쪽 가장 위에 있는 비가 충암 김정의 것이다. 
    오현단에 새로 세워진 '충암김선생 적려유허비'

     

    충암의 전력을 살펴보면 실로 놀랍다. 충암은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지제교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 주로 사헌(司憲)의 직을 역임하다 문신(文臣)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인 '정시(庭試)'에 다시 장원급제했다.

     

    이후 병조정랑,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 등을 지내며 조광조와 함께 쌍두마차로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던 바, 소격서(昭格署, 국가적인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 철폐, 향악 시행 등 철저히 유교 교리에 입각한 정치 개혁에 힘썼다. 중중에게 왕도정치를 설파하고, 반정의 일등공신인 박원종 등에 대한 위훈삭제를 주장한 것도 조광조와 궤가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급진개혁은 결국은 훈구대신들의 반격을 불러왔던 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몰락해 정암은 능주(전남 화순)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충암은 충청도 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920년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충암의 적거지는 제주성 동문 밖 옛 금강사 터에 위치한 방 한 칸과 마루가 있는 초가집으로, 지금은 제주시 동문시장 남쪽 산지천 다리 옆에서 그의 적거터 표지석을 찾을 수 있다. 충암이 이때 지은 시가 전한다.

     

    絶國無相問

    멀리 떨어진 땅 안부 묻는 이 없고 

     

    孤臣棘室圍

    외로운 신하는 가시 울타리 방속에 갇혔네.

     

    夢如關塞近

    꿈속에서는 국경의 관문이 가까웠는데

     

    僮作弟兄依

    어린 종을 형제처럼 의지하며 산다.

     

    憂病共侵鬢

    근심과 병은 귀밑머리 희어지 듯 침노하는데

     

    風霜未授衣

    바람 서리에도 옷조차 주지 않네.

     

    思君若明月

    임금을 생각하니 명월 같구나.

     

    天末寄遙輝

    하늘 끝에서 멀리 빛을 비추네.

     

     

    동문시장 가는 길의 제주성
    동문시장 입구의 적거터 푯돌 (푯돌과 주변이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하다. 관리가 절실해 보인다)

     

    충암의 적거지 주변에는 귤과 유자나무가 자라는 넓은 과원이 있었던 듯, 가을에 황금빛으로 변하는 밭 풍경이 대단히 장관이더라는 기록을 <제주풍토록>에 남겼다. <제주풍토록>은 충암이 제주에 머무는 약 1년 반 동안 이곳의 지리적 환경과 기후, 가옥 구조, 문화 풍속, 토산물, 관원의 횡포 등에 대해 기술한, 제주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후세에 편집된 문집 <충암집>에 실려있다. (<제주풍토록>은 16세기 제주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제주성 인근에  세워진 귤림추색 비문. 제주성 부근 귤밭의 가을 풍경은 제주 10경의 하나로 꼽혔다. 

     

    충암은 유배 기간 동안 김양필을 비롯한 제주 유생들의 훈학에도 힘쓴 듯 보이니, <제주풍토록>에는 정통 유학과 유도(儒道)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한마디로 무식한) 제주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울러 제주 사람들이 당신(堂神)과 같은 미신에 천착하고 박수무당이 많다, 뱀을 무서워해 숭상한다, 행동거지가 거친 반면 목소리는 가늘고 높다는 등의 세세한 것까지 기록했다.

     

     

    충암집/국립제주박물관

     

    그가 유배된 직접적인 이유는 중종의 부인이었다가 폐비가 된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었는데, 그 복잡한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이른바 중종반정이 성공하여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곧 중종이었다. 이에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는 자연히 왕비(단경왕후)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단 7일만에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인데다 반정에의 가담도 거부하였던 바, 괘씸죄가 씌워져 처단되었고, 딸 신씨 역시 폐비되어 축출된 것이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중종은 새 왕비(장경왕후)를 맞았으나 약 10년 후인 1515년 사망했다. 그러자 충암이 폐비 단경왕후의 복위를 청했다. 이제 세월도 흘렀고, 따지고 보면 단경왕후는 아무런 죄도 없이 폐비가 되어 남편과 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충암은 당대로서는 보기 드문 페미니스트인 셈이었다. (더불어 폐비를 주도한 박원종 등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를 기회로 반대파들이 우르르 들고 일어서니 결국은 유배까지 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나아가 반대파들은 이 기회에 개혁파를 모두 제거하려 마음 먹었던 바, 조광조를 사사한 후에는 충암에게도 자진(自盡)의 명을 내렸다. 그가 금산 유배시절,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유배지를 벗어난 죄를 뒤늦게 물은 것이다. 1521년 10월 말, 적거지에 있던 충암은 제주목사가 이운(李耘)이 가져온 명을 받들어 술에 독을 타 마시고 숨을 거두니 당시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대단한 것은 그의 부인 송씨가 남장을 하고 제주도로 건너와 가락천 곁에 가장됐던 충암의 유해를 뭍으로 옮겨 갔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부인 송씨는 남편의 유해를 연고지가 있는 충청도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 장사 지낸 후 남편을 따라가고자 곡기를 끊었다. 필시 페미니스트인 그의 남편에게 많은 사랑과 대접을 받았던 듯하였다.(그렇지 않고는 이렇게까지 할 리가.....)

     

    하지만 시부모의 만류에 차마 죽지는 못했고, 대신 자신의 시부모를 죽을 때까지 공경하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결의를 실행에 옮기니 8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세상과 하직했다. 송씨는 1803년(순조 3) 정려되어 비와 비각이 세워졌는데, 그에 250년 앞선 1545년(인종 1) 충암은 사면 복관(復官)되어 문간공(文簡公)의 시호가 내려졌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보은의 상현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귤림서원의 별사인 향현사(鄕賢祠). 최근 오현단 내에 복원되었다.  
    충암 김정의 묘
    부인 은진송씨 정려각.  1978년 대청댐 건설로 대덕군 동면 일대가 물에 잠기자 충암의 묘와 함께 별묘(別廟)인 산해당, 무덤 곁의 정려각 등이 지금의 대전시 신하동 대청호오백리길 안쪽 200m 지점으로 옮겨졌다.

     

    ▼ 아래 시는 글은 충암 김정이 제주에 유배 왔을 때 제주판관의 처남 방순현이 제주 동쪽에 있는 섬 우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듣고 흥을 붙인(聞方生談牛島歌以寄興) 칠언율시 형식의 '우도가'이다.

     

    瀛州東頭鼇抃傾
    영주산 동쪽머리 산을 졌던 자라(남생이) 춤추면서 기울더니

     

    千年閟影涵重溟     

    천년 비궁의 모습 깊은 바다에 잠겼어라

     

    群仙上訴攝五精

    뭇 신선들 상제께 호소하여 오정을 끌어들이매

     

    屭贔一夜轟雷霆

    하룻밤 힘써 일을 내니 벼락 천둥소리 요란했다네

     

    雲開霧廓忽涌出

    구름 개고 안개 걷히자 홀연히 솟아나니

     

    瑞山新畵飛王廷

    상서로운 산 다시 그려내어 급히 조정에 보고되었네

     

    溟濤崩洶噬山腹

    성난 파도 높이 솟구치며 산허리 잡아채고   

     

    谽谺洞天深雲扃

    툭 트인 산골짜기 깊게 구름 빗장 걸렸어라

     

    稜層鏤壁錦纈殷

    깎아지른 절벽 온통 비단무늬 아로새겨 놓아

     

    扶桑日照光晶熒

    부상(동쪽바다)에 해 비치니 수정처럼 반짝거리고

     

    繁珠凝露濺輕濕

    흩어진 물방울 이슬 맺혀 물기 촉촉한데

     

    壺中磘碧躔列星

    호중(항아리 속) 별천지의 푸른 구슬 별자리를 심어놓았네

     

    瓊宮淵底不可見

    옥 궁전 수궁 속 물 깊어 볼 수 없고

     

    有時隱隱窺窓櫺

    때로 언뜻언뜻 그 창살만 어렴풋이 보인다네

     

    軒轅奏樂馮夷舞

    황제 훤원씨의 풍악에 수신(水神) 풍이는 춤을 추고

     

    玉簫竅窱來靑冥

    그윽한 옥퉁소 소리 먼 하늘에서 들려오네

     

    宛虹飮海垂長尾

    휘어진 무지개 바닷물 마시느라 긴 꼬리 드리우고

     

    麤鵬戲鶴翎翅飄

    거친 대붕새 학을 희롱하며 날개 짓 펄럭이네

     

    曉珠明定塵區黑

    영롱한 샛별 밝게 빛나건만 세상은 아직도 깜깜밤중


    燭龍爛燁雙眼靑

    촉룡의 부릅뜬 두 눈에선 푸른 기운 뻗혔네

     

    驂虯踏鼲多鞸婷

    용이 끄는 수레 타고 잉어 밟고 놀아도 아름답고

     

    天吳九首行冷鵧

    머리 아홉 달린 천오귀신 어슬렁대며 가는구나

     

    幽沈水府囚百靈

    물속 깊고 으슥한 궁전에 온갖 바다 영령들 가둬놓아

     

    邪鱗頑甲毒風腥

    고약한 물고기 딱딱한 조개 독한 비린내 풍기니

     

    太陰之窟玄機停

    태음의 기운 서린 굴에 현묘한 이치 머물고

     

    仇池禹穴傳神蹟

    구지산 우 임금의 무덤에선 신의 자취 전하는데

     

    惜許絶境訛圖經

    애석하게 절경이라 도경(圖經)에 빠졌구나

     

    蘭橈拏入㩳神形

    조각배 노 저어 들어가니 심신이 쭈뼛하고

     

    鐵笛吹裂老傀聽

    날라리(태평소) 요란히 부니 늙은 용이 듣는구나

     

    水咽雲暝梢愁人

    물은 오열하고 구름 짙어져 사람 근심 속 빠뜨리니

     

    歸來怳兮夢未醒

    황홀한 돌아옴이여 아직 꿈속인 듯 몽롱하기만 하네


    嗟我只道隔門限

    아, 나는 문이 막혀있어 나갈 수 없다고 말해야 하나

     

    安得列叟乘風泠

    어찌하면 열자(列子)처럼 맑은 바람 타고 맘껏 날아볼까

     

     

    우도가 노래비
    위 노래비가 있는 후해석벽은 우도 8경의 하나이다.
    파도 치는 후애석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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