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외동 수정사 터와 삼별초의 흔적
    탐라의 재발견 2021. 10. 24. 15:36

     

    제주시의 서쪽에 위치한 외동(행정구역상의 정식 명칭은 외도동)은 제주시의 바깥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중심권이었던 듯하니 이곳에 있었던 수정사(水精寺)는 고려시대 건립된 이후 조선초까지도 130명의 노비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앞서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法華院)를 설명할 때 언급했거니와 절에 그렇듯 많은 노비가 필요했던 이유는 고려시대에는 제주도의 절이 역원(驛院, 공공 여관)의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제주 법화사 불상을 가져간 명나라 영락제')

     

    그만큼 수정사에는 종교적 믿음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가 있었을 터이다. 까닭에 수정사는 법화사, 원당사(元堂寺)와 더불어 제주도 3대 사찰로서의 명성을 누려왔지만 그 두 절은 존재하는 반면 수정사는 흔적조차 남은 게 없어 그저 세월의 무상함만을 안겨준다. 다만 이 절에 있던 탑의 부재가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바, 국가적 차원의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제주도 유일의 불탑인 원당사지 탑에 견줄 수 있는 유적이 되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기황후와 제주 불탑사')

     

     

    수정사지 탑 몸돌/국립제주박물관
     수정사탑 몸돌 중의 '인왕상음각탑면석'의 그림 
    수정사지 출토유물

     

    그 탑에 연연하는 이유는 발견된 몸돌에 새겨진 '인왕상음각탑면석'의 표현기법 때문이니, 이 그림은 인왕의 표현에 있어 음각기법을 도입한 드문 예이기도 하지만, 회화적으로도 뛰어나 제주도 최고(最古)의 미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외 수정사에 관해 짐작할 수 유물은 전하는 게 없다. 이곳에서 오래 거주한 주민의 말로는 이곳 절물마을 전체가 절터였으나 가로 세로로 도로가 나며 절터마저 나뉘었고, 20년 전까지는 주춧돌 같은 돌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없다고 했다.  

     

     

    절터였던 어린이 공원
    공원에 세워진 수정사지 안내문

     

    ▼ 안내문의 내용

    <태종실록>에 전하는 고려말~조선초의 수정사는 비보사찰(裨補寺刹)로 노비 130인을 거느리는 대사찰로 알려져 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절터 규모는 남북 120~150m, 동서 50~60m 정도이며 건물지가 가장 밀집해 있는 곳은 이곳(외도동 376번지)이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3단으로 이루어진 축대, 문루를 포함한 건물지 12동, 도로, 보도, 탑지, 석등지, 담장지, 폐기와무지, 적석시설물 등이다. 수정사지의 출토유물은 지금까지 도내사찰에서 나오는 유물 내용면에서 가장 화려하다. 

     

    출토된 기와는 '이월수정선사(二月修正禪師)', '만호겸목사(萬戶兼牧史)' 명문기와가 있다. 막새는 6~8 잎(葉) 연판문 수막새, 연판문 암막새 등이 있으며 평와는 수지문, 사방문기와 등과 복합문 기와가 주종을 이룬다. 자기류는 송·원대의 중국 청자와 백자, 11세기 순청자, 향로, 조선청자, 백자 등이 보인다..... 이처럼 발굴자료, 문헌기록, 출토유물로 종합된 옛 수정사의 변천은 13세기 이전에 창건되고 1500년대 원나라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중종 16년(1521년) 재차 중수되었다. 그리고 숙종 20년(1694년) 이전에 훼철되었다. 

     

     

    중심 절터에 세워진 제주 성지교회. 지향점은 다르지만 성지(聖地)의 의미는 상통하는 것도 같고.....
    절물마을 표석
     절물마을 유래 안내문
    수정사지에서 수습된 주춧돌들은 애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가 조성되며 그곳으로 모두 옮겼으나 뜻밖에도 실내수영장 앞에서 몇 개의 초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건립 시기나 기타의 언급이 없이 수정사가 도근천(都近川) 서쪽 언덕에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도근천은 원래 지명인 조공천(朝貢川)이 제주 사투리로 변환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수정사가 조공을 받는 대찰이었다는 것까지 유추되는 바, 고려말의 유명한 학자 이제현이 채록한 도근천가에는 번영에 따른 폐단도 엿보인다. 다른 고려가요에서처럼 노골적인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담겨 있는 까닭이다. 

     

    都近川頹制水坊  
    水精寺裏亦滄浪  
    上房此夜藏仙子  
    社主還爲黃帽郞  

     

    도근천 제방이 허물어져

    수정사 앞이 물바다가 되었구려

    상방엔 오늘 밤 선녀를 숨겨두었으니

    주지는 오히려 노 젓는 뱃사공이 되겠구려 

     

    또 하나의 조공이 연상되는 것은 진도에서 쫓겨온 삼별초의 김통정이 1271년 항파두리 성에 근거지를 마련하며 이곳 도근천을 해상보급기지로 이용했다는 항몽의 역사이다. 제주도 항파두리의 김통정은 조공이라는 명목 하에 연해에서 해적질을 일삼았던 바, 개경으로 올라가야 할 조공품이 도근천을 거슬러 올라 항파두리 성으로 옮겨졌다. 아래 외도동 10경(景) 중의 하나인 대포귀범(大浦歸帆, 큰 포구로 돌아오는 범선)을 읊은 노래는 아마도 그 시절에의 반영이리라. 

     

     

    도근펀 안내문 속의 대포귀범 노래
    외도동 앞바다 풍경
    외도동의 수중 방사탑
    도근천
    삼별초 조공포 유지 표석
    표석에서 바라본 포구 쪽 풍경

     

    그 삼별초의 활약상이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고려 원종13년(1272) 고려 이유비가 원에 보낸 편지글이다.

     

    "탐라의 역적들이 금년 3월과 4월에 회령·함포·해남 3현의 포구를 침공했으며, 5월에는 회령·탐진의 2현을 공격했습니다. 이때를 전후로 약탈당한 선박이 25척, 양곡이 3천 2백여 석, 피살자가 12명, 피랍자가 24명입니다. 노효제라는 자가 역적에 붙었다가, 14일 만에 도망쳐 와  말하기를, 역적 390명이 11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미 운반선박을 빼앗고자 연안 포구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장차 전라도의 전선 만드는 곳을 침공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이렇게 빼앗은 물자들은 조공포 포구로 들어와 애월읍 광령3리를 거쳐 항파두리 성에 도달했는데, 그때 삼별초군이 닦은 길이 지금도 조공포 길로 불리며, 애월읍 광령리 길은 지역 주민들의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당시를 짐작해볼 수 있는 유적이 또 하나 존재하니 바로 외동 연대마을에 위치한 조부연대(藻腐煙臺)이다. 연대는 불을 피워 신호를 하는 작은 봉수대와 같은 구조물로, 현재의 것은 서쪽의 남두연대와 동쪽의 수근연대와 교신하던 조선시대의 유적이나 삼별초가 항파두리 성과 교신하던 통신시설이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조공포길 표지판
    조부연대
    백호 임제 등의 시인묵객들이 방문한 외도천 월대(月臺). 은어, 뱀장어, 버들치. 밀어, 길문망둑, 숭어, 참개 등이 서식하는 곳으로 근방에는 대상어종의 금어(禁魚)기간이 표시된 표지판이 서 있다.  
    월대 표석
    250년 된 월대 해송
    금강신문에서 발췌한 개성 헌화사7층석탑의 사진이다. 남아 있는 부재로 보자면 수정사 석탑은 필시 이와 같은 형태에 규모만 좀 작았을 것 같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