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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법화사 불상을 가져간 명나라 영락제
    탐라의 재발견 2021. 9. 3. 07:48

     

    서귀포시 하원동 소재 법화사(法華院)는 고려시대 건립된 사찰로, 상원(上院, 위의) 존자암, 중원(中院, 중간의) 수정사와 더불어 제주도 명찰(名刹)로서의 유명세를 누렸다. 하원동이란 지명은 그래서 생겨났을 터이다. 제주에서는 절이 역원(驛院, 공공 여관)의 역할도 한 까닭이니, 한때 382명이나 되었다는 노비는 필시 역원에 딸린 자들이었을 것이다.(그밖에는 그렇게 많은 노비가 존재할 이유가 없을 터)

     

     

    법화사 원경/비짓제주 사진

     

    앞서 '장보고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에서도 잠시 언급했거니와 지난 2015년 이곳을 찾았을 때는 입구에 '해신 장보고(海神 張保皐)'라고 적힌 거대한 석상과 사적비가 서 있었다. 산동 법화원을 세운 장보고와의 연관성을 내세워(사찰 이름이 비슷하며, 하원마을 포구의 옛 이름이 당포·唐浦로 불렸다는 이유로써) 절의 연혁을 끌어올리고 미화시키기 위한 수작일 터였겠는데, 이번에 다시 가보니 다행히 사라지고 없었다.(하지만 아직 인터넷에는 장보고가 세운 절이라는 소리가 돌아다닌다)

     

    법화사의 창건에 대한 사적기(事蹟記)나 역사적 기록은 전하는 게 없다. 이에 창건시기를 알 수 없으나 1992년 발굴조사 때 절의 중창연대를 알려주는 '至元六年己巳 始重□ 十六年己卯畢'(지원육년기사 시중□ 십육년기묘필)의 명문(銘文) 기와가 출토되었다. 즉 '지원 6년(至元 六年, 원종 10년)인 1269년에 중창을 시작해서 지원 16년(충렬왕 5년)인 1279년에 끝마쳤다'는 기록이니 1269년 이전부터 존속했고 10년의 긴 중창불사에 거쳐 대가람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화사지 출토 명문기와. 지원(至元)은 원세조 때의 연호이다/국립제주박물관  

     

    아울러 기와의 명문은 또 다른 정보를 함께 제공해주는 바, 제주도에 웅거한 삼별초(1270~1273년)에 의해 공사가 지연되었음과, 이후 남송(南宋) 공격과 일본 정벌(1274~1281년)에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는데, 2차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운봉문막새(구름봉황무늬 기와) 및 운용문막새(구름용무늬 기와)는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와 같은 기와들은 원나라 황궁에서만 사용되었고 사찰 건축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명나라 주원장에 쫓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혜종(재위 1333∼1370)이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우기 위해 황궁 공사를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떠돈다. 그러면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젊은 시절 원 황실의 권력다툼에서 밀린 그가 제주도로 유배 왔다가 서해 대청도로 이거(移居)된 일과 고려인 기황후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인데, 그가 대청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주도에 왔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법화사지 출토 와당과 청자/국립제주박물관  
    법화사지 출토 운봉문·운용문막새

     

    위 사진처럼 국립제주박물관에서는 법화사지에서 나온 구름봉황름무늬 기와와 구름용무늬 기와 등을 볼 수 있으며, 법화사 뒤편에서는 발굴조사 당시 드러난 옛 건물터와 초석, 석탑 부재 등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부재들만 보아도 황궁에 버금갔던 위세가 증명된다. 그것들이 모두 제주 화산석이 아닌 육지 화강석인 까닭이다. 쉽게 말해 부재들을 육지에서 실어올 만큼의 위세를 지닌 절이었다는 얘기다.  

     

    법화사의 영화는 발굴이 거듭되며 더욱 드러났던 바,(8차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옛 건물은 10동이고 대법당지의 규모는 무려 347㎡(105평)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법화사는 조선초까지 노비 280명을 거느리던 거찰이었으나 태종 8년 억불책에 의해 30명으로 줄어들었고, 1653년 편찬된 <탐라지> '대정현 불우조'(大靜縣 佛宇條)’에서는 '단지 초가 암자 몇 칸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53년 이전, 제주도의 다른 사찰과 함께 폐사됐다는 방증이다. 

     

    근세 들어(1920년대) 법화사는 그  터에 포교소(布敎所)가 들어서며 재건의 기미를 보이나 1948년 4·3사건 당시 중산간 인구 소개령으로 불타고,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절 터가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의 숙영지 겸 훈련장으로 사용되며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지금의 법화사 당우와 구품연지 등은 지난 1980년대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그래도 경내를 걷다 보면 과거의 흔적이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아스라이 다가온다. 

     

     

    법화사 법화루와 구품연지. 2001년 복원된 약 3천 평의  최대 규모 구품연지다. 고려말 혜일선사의 '법화암반물화유'(法華庵畔物華幽)라는 싯구에서 연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양식으로 지어진 법화사 구화루
     구화루 앞 드무 속의 연꽃
    구화루에서 바라본 대웅전. 1987년 옛 법화사 법당 초석 위에 지어졌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구품연지 수로로, 육지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구품연지의 오리
    요사채 순둥이
    옛 법화사 건물지의 계단과 기단, 초석 등이 제주도기념물 13호로 지정돼 있다.(이상 Kr.WorldOrgs.com)

     

    오늘 정작 말하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는 조선 태종 6년(1406년) 명나라 영락제가 가져간 이 절의 '금동아미타삼존여래상'에 관해서이다. 그놈은 대체 왜 남의 나라 불상을 제멋대로 가져갔는가 하는..... 혹시 다른 무엇이 숨어 있지는 않나 하는..... 하지만 법화사에 관한 이야기가 늘어졌던 바, 천상 다음 편에서 얘기해야 할 것 같다.

     

    *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도 제주도를 탐냈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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