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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를 구한 법화사 아미타삼존불은 어떻게 생겼을까?
    탐라의 재발견 2021. 9. 5. 06:11

     

    명나라 홍무제와 영락제가 제주도를 껄떡댄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만일 이것이 현실화됐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반면 중국으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니 제주도 땅 자체를 넘어 동지나해의 반을 먹을 수 있는 찬스를 놓친 셈이다. 중국은 막대한 영토에 비해 의의로 바다의 지분은 적다. 그래서 손바닥 만한 섬이라도 더 가지려 바닷속 암초에다 시멘트를 들이붓는 좀스럽고 안쓰러운 짓을 지속하고 있는데 아래의 영토분쟁 지도를 보면 그 딱한 사정이 이해도 된다. 

     

     

    의외로 협소한 중국의 바다
    이 지도를 보면 중국이 왜 댜오위다오에 목을 거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댜오위다오는 일본이 실효지배 중으로 우리에게도 센카쿠 열도로 익숙하다. 9월 11일은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한 날로, 며칠 후 이곳은 다시 뜨거워진다. / 연합뉴스 사진

    ※ 여기서 국유화란 그전에 실효지배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개인 소유로부터의 국유화를 말한다. 2012년 8월 15일 중국인 시민단체가 이 섬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9월 11일에 개인 소유였던 섬 3개를 20억 5천만 엔에 구입해 국유화하였다. 이후 두 나라는 전쟁 일보 직전 상황까지 치달았다. 

     

     

    센카쿠 열도 상공을 비행 중인 오라이언 대잠초계기 / 일본 해상자위대 사진
    일본 자위대 초계기는 현재 신형 가와사키 P-1으로 대체됐다. / 일본 해상자위대 사진
    2017년 선 보인 가와사키 중공업 건조 신형 구축함
    동지나해 해상훈련에 참가한 중국 항공모함 랴오닝

     

    또 이야기가 새려 한다. 얼른 주제로 돌아가자. 앞서도 말한 대로 1406년(명나라 영락 4년, 조선 태종 6년) 음력 4월 20일,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 사신 4명이 찾아와 제주도 법화사(法華寺)에 있는 아미타삼존불을 요구한 것이다. 이유인즉 황제(영락제)가 수도 금릉(남경)에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원찰 대보은사를 건립했는데 그곳에 봉안할 불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국인 명나라에서 겨우 불상 3구를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안 되지만, 아무튼 불상을 요구하는 사신의 변(辯)은 이러했다. 

     

     "제주 법화사의 미타삼존(彌陀三尊)은 원나라 때 양공(良工)이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곧바로 가서 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濟州法華寺彌陀三尊 元朝時良工所鑄也 某等當徑往取之)

     

    갑자기 찾아온 명나라 사신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태종 임금은 요구의 가벼움에 크게 안심한다. 그리고 그 안도감에 농담까지 곁들이며 허락해 마지않는다. 

     

    "정말 마땅하고 말고. 다만 부처 귀에 물이 들어갈까 두렵소."(上戲曰 固當 但恐水入耳)

     

    그러자 사신인 첩목아 등이 모두 크게 웃었다.(帖木兒等皆大笑) 명나라가 제주 법화사의 불상을 거리낌 없이 요구한 이유는 사신의 말대로 그것이 원나라 장인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앞서도 말한 바 같이 법화사는 탐라가 원나라의 직할령일 때 흥왕한 절이었다. 따라서 몽골인들의 절이었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데, 이에 불상도 원나라 기술자가 와서 만든 (혹은 원나라에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명나라 사신의 요구인즉, 중국사람이 만든 불상이니 우리가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었다. 

     

    태종 또한 흔쾌히 내주었다. 고려 때라면 얘기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책(抑佛崇儒策)을 국시로 내건 조선이었던 바, 불상 따위야 오히려 가져가면 땡큐였다. 그런데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명나라의 요구 속에 숨어 있는 음모를 캐치해내고 이를 태종에게 고한다.(그 영민한 신하가 누구인지는 실록에도 안 나와 있다)

     

    "황제가 황엄 등을 보낸 것은 (불상을 얻으려 함이 아니라) 탐라의 형세를 살피려는 것입니다. 필시 (숨은) 뜻이 있습니다."(帝使儼等觀耽羅形勢 意有所在) 

     

    태종은 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탐라가 원래 원나라의 직할령(탐라총관부)이었다는 이유로서 홍무제(명태조 주원장) 때부터 탐내 온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그였다. 이에 심히 걱정한 태종은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명나라 사신들이 제주도에 가지 못하도록) 김도생(金道生)과 사직(司直) 박모(朴謀)를 선전관으로 임명해 제주에 급히 가서 법화사 동불상을 모셔 오게 하였다.(上憂之 謀諸群臣 急遣宣差金道生 司直朴謨 馳往濟州 以法華寺銅佛像來)

     

     

    그 중요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4월 20일 경진 4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 박은(朴訔)의 장계에는 당시의 화급함이 실려 있다.

     

    "국가에서 박모 김도생 등을 보내어 동불(銅佛)을 제주에서 가져오게 하오매, 신은 먼저 제주 목관에 이문(移文)하여 법화사의 동불 3좌(座)를 급히 수출(輸出)해서 배로 실어 보내게 하였더니, 제주 목관에서는 신의 이문을 보고 즉시 이졸(吏卒)들을 동원하여 그 동불을 운반하여 바닷가에 막 도달할 무렵, 그 이튿날 박모 등이 잇달아 이르렀습니다. 마침 쾌풍이 불므로 즉시 싣고 나와서 겨우 해안에 이르렀는데, 바람과 물이 순탄치 못하고....."(國家遣朴謨 金道生等 取銅佛於濟州 臣卽先移文濟州牧官 法華寺銅佛三坐 作急輸出 載船送來 濟州官見臣移文 卽發吏卒 輸其銅佛 將至海濱. 翌日 朴謨等繼至 會有快風 卽得押載出來 纔到岸 風水不順.....)

     

    이후 상황 또한 순탄치 못했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황엄(黃儼)·한첩목아(韓帖木兒)·양영(楊寧)·기원(奇原)의 목적은 단순히 불상을 운반해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 방비(防備)와 같은 상황을 염탐하기 위함이었을 터, 목적을 이루지 못한 그들이 불상에 만족한 채 조용히 돌아갈 리 없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불상과 함께 돌아갔고, 이후 제주도를 먹으려던 영락제의 욕망은 급변한 국제적 상황에 의해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 있다.(☞ '탐라의 재발견ㅡ명나라 영락제(永樂帝)도 제주도를 탐냈다')

     

     

    서귀포 법화사의 구품연지
    구품연지의 백련(白蓮) / '제주의 소리' 사진
    서귀포 강정마을에는 3구의 법화사 불상이 떠났다는 전설의 세불포구가 있다.(사진은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장군에 관한 유적지임) / '제주의 소리' 사진

     

     

    어찌 됐든 법화사의 금동아미타삼존불은 조선을 구하고 제주도를 구했다. 이후 그 불상이 어찌되었다는 말이 없는데 목적대로 남경 대보원사의 법당에 봉안되었으라 여겨진다. 하지만 당시의 삼존불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니, 대보원사가 크게 파괴되었던 태평천국의 난 때나 혹은 이후 문화혁명기의 광풍에 상실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에 그 영험한 부처님의 모양새 파악은 그저 막연하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다. 국내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아미타불로부터 유추해 보는 길이니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아미타불좌상(유물번호: 덕수 71)과 금동관음보살입상(덕수 3천363) 및 금동대세지보살입상(덕수 3364)은 가장 적합도가 높은 불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13년부터 실시한 금동불상 조사사업의 보고서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 조사보고 2>에 의하면 위 불상의 복장물(腹藏物)과 금속 성분을 분석한 결과, 3구 모두 1333년, 한 공방에서 제작된 일습의 삼존불상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이 금동아미타삼존불은 원나라가 신봉한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알려져 있는 바, 원나라 장인이 만들었다는 법화사 아미타삼존불의 모각(模刻)은 아닐지라도 당대의 유행을 담은 고려말 불상임은 움직일 수 없는 팩트이다. 법화사 중창연대가 새겨진 아래의 명문기와의 연대(1269~1279년)와 매우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라마 풍의 불상이라는 얘기다.  

     

     

    중창연대를 말해주는 법화사지 출토 명문기와 / 국립제주박물관
    언급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세 불상
    금동아미타불좌상
    금동관음보살입상
    금동대세지보살입상

     

    그 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3세기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14세기 금동관음보살좌상(유희좌상), 호림박물관 금동대세지보살좌상(보물 1047호),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1547호), 국립춘천박물관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1872호), 2016년 3월 17일 발견된 서울 옥수동 미타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 등도 라마불교 양식의 수작(秀作)들인데, 최근 파주시 탄현면 소재의 검단사(黔丹寺)라는 작은 절에서 우연히 보게 된 목조 관음보살좌상도 범상치 않아 차제에 소개하려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3세기 목조관음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세기 금동관음보살좌상
    검단사 오르는 길
    검단사에서 바라본 한강
    검단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검단사와 목조관음보살좌상 설명문

     

    검단사 :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이 내려다 보이는 경승지에 위치한 이름난 옛 절이다. 신라 때 검단조사가 처음으로 세웠다고 전한다. 검단조사의 생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검단산에 검단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전 안에는 19세기 말에 그려진 불화 3점이 있으며 그중 검단조사상은 이 절의 창건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검단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탄현면 성동리에 위치한 검단사의 법당인 법화전에 모셔져 있다.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이 불상은 비교적 작은 크기로 고개를 약간 숙인 정삼각형 꼴의 둔중한 모습이다. 살찐 얼굴에 늘어진 귀, 짧은 목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불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서 두 손으로 정병을 감싸든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양쪽 다리의 주름은 결가부좌한 발목 부분에서 부채꼴로 벌어졌는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되었다. 

     

    검단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주불전에 봉안되기 위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얼굴과 의습선에서 부드러운 감이 남아 있고 대각선 형의  표현을 볼 때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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