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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조 주원장은 제주도를 명나라 땅으로 생각했다탐라의 재발견 2021. 8. 18. 06:11
국립제주박물관 전시관 벽면에는 세계사 연표와 제주도 역사연표가 정연하게 마련돼 있다. 그러면서 중요 사건을 돌출시킨 그 연표들을 바라보다 문득 작은 글씨의 문장 하나에 눈길이 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81년. 명, 운남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솔을 제주에 안치.
이게 무슨 소린가? 명나라가 운남 양왕의 가족을 왜 제주도에 유배 보내는가? 제주도가 제 땅인가? 그렇다면 그때 고려 정부는 어떤 대응을 했으며, 또 양왕의 가족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국립제주박물관 연표의 위 글을 읽은 사람은 당연히 이와 같은 생각을 할 터, 이에 상황을 조금 상세히 알아보았다.
명태조 주원장은 1328년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잘 알려진 그대로 주원장의 어린 시절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으니, 전염병으로 부모 형제를 잃은 후 비렁뱅이 고아로 떠돌다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러다 서른 살 무렵 자포자기의 심정으로서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마을을 휩쓸던 도적의 무리에 합류했는데 바로 홍건적이라는 무리였다.
백련교라는 신흥종교에 뿌리를 둔 그들 홍건적의 무리는 세력이 커지며 어느덧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항하는 한족(漢族)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고, 그 무리 중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은 아예 명(明)이라는 나라를 건국해 한족의 중원 수복 전쟁에 나섰다. 그가 1381년(명 홍무 14년, 고려 우왕 7년) 운남의 양왕(梁王)을 공격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당시 주원장은 홍건적의 다른 세력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한편으로는 원나라를 공격해 몽골의 세력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몰아낸 상태였다. 이에 원제국의 번왕들은 거의가 손을 들었으나 운남의 양왕은 명나라 사신을 오는 족족 죽여버리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피력하였던 바, 그해 9월 부우덕을 남정장군으로 임명해 운남을 정벌케 하였다. 양왕은 27만의 대군을 맞아 분전했으나 12월 백석강(白石江) 전투에서 패한 후 자결하였고, 이듬해 정월 운남은 평정되었다.
1382년 4월, 주원장은 이때 붙잡힌 양왕의 아들 백백태자(伯伯太子)와 가솔 60여 명에 대한 탐라 유배를 결정하는데, 그해 7월 고려 정부는 명나라 사신이 데려온 몽골인들을 보고 그때 비로소 운남이 떨어진 것을 인지했고 아울러 긴장했다. 주원장은 그전부터 고려가 북원(北元, 만리장성 이북의 원나라)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침공하겠노라 누차에 걸쳐 겁박하였던 바, 다음 타깃이 고려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고려의 우왕은 주원장이 보낸 죄인들을 순순히 탐라에 안치했다. 명나라의 힘에 굴복해서라기 보다는 과거 탐라총관부 시절에도 원나라에서 유배 온 죄인들을 받아들인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니, 대표적으로는 황실의 권력 싸움에서 밀린 황족 타권첩목리(妥懽帖睦爾, 토콘테무르)나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 등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탐라총관부가 동녕부, 쌍성총관부와 함께 원나라 직할령인 때였으니 동류(同流)로써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왕은 주원장의 뜻에 따르긴 했으되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비록 제주도를 100년 간 원나라에 빼앗기긴 했어도 선왕(先王)인 공민왕 때 무력으로써 되찾았던 바, 이제는 엄연한 고려의 영토였다. 그런데 주원장은 그곳이 마치 제 영토인 양 제멋대로 양왕의 가족들을 유배 보낸 것이었는데,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1388년(우왕 14) 자신의 북벌 때 투항한 막북(漠北, 외몽골)의 달달친왕(達達親王)과 그의 가솔 80여 명을 다시 제주에 안치했다.
이와 같은 일을 벌인 주원장의 생각은 간단했다. 탐라는 원래 원나라가 다스리던 곳이었으므로 이제는 명나라 땅이라는 논리로서, 다만 지금은 바빠 그곳까지 지방관을 파견할 짬이 없으니 임시로 너희들이 맡아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참에(1388년 북벌 때//주원장은 북원을 멸망시키기 위한 총 8차례의 북벌을 단행했다) 과거의 동녕부 땅은 본토(명의 영토)에 편입시키고 쌍성총관부 땅에는 철령위를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삼겠노라 포고했다. 그는 쌍성총관부에 대해 이렇게 조치했다.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그 밖의 개원로(開元路)① 심양(瀋陽)② 신주(信州)③의 군민(軍民)은 다시 원래의 생업으로 복귀시키도록 하라."
① 지금의 중국 지린성과 랴오닝성 동남부 지역.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에는 "당시 쌍성 이북은 개원로에 속했으며"(時雙城以北屬于開元路) "등주(登州, 산동반도 북단 도시)와의 거리는 2백여 리"(登州距雙城二百餘里)"로 되어 있다.
②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17세기 만주족 땅일 때는 성경(盛京), 청나라 말기에는 봉천(奉天)으로 불리다가 1950년 이름을 되찾았다.
③ 지금의 중국 장시성 상라오시('나무위키' 참조)
④ <고려사> 우왕 14년조에 실린 주원장의 위 조칙과 <태조실록> 1권 등을 보면 철령이 개원로, 심양, 신주와 같은 요동지방에 있었음이 자명하다. 기존의 학설대로 철령이 함경남도와 강원도 사이의 고개이고 쌍성총관부가 그 위에 위치했다면 주원장은 개마고원 너머의 그곳을 요동에 귀속시키라고 했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아울러, 그렇다면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결성된 요동정벌군은 당연히 함경도로 갔어야지 왜 압록강을 향해 갔는가?
그러자 우왕의 참고 참았던 분노가 드디어 폭발했다. 우왕으로서는 이와 같은 주원장의 행동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북원 장수 나하추가 명나라가 요동지방에 설치한 정료위(定遼衛)를 함께 치자고 졸라대는 것을 혹시 저들만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닐까 하여 애써 참고 있는 마당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쉽게 말해 뚜껑이 개봉된 것인데, 가뜩이나 우왕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왕은 즉시 최영으로 하여금 요동정벌군을 꾸리게 했다. 어차피 한 번은 붙어야 될 싸움, 선방을 날리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1388년(우왕 14년) 음력 4월, 최영을 총사령관(팔도도통사)으로 하는 기병 2만 천명을 포함한 도합 5만 명의 요동원정군이 결성되었다.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와 지용수의 1, 2차 원정에 이은 3번째 요동원정군이자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였다. 좋게 말하자면 우왕은 고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었다.
그러나 용장 이성계는 유명한 사불가지론(四不可之論)을 들어 원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뚜껑 열린 우왕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하였소?"(卿不見李子松耶?)
이자송은 이성계에 앞서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처형된 신하였다. 하지만 이성계도 지지 않았다.
"이자송이 죽긴 했으되 후대에는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미 전략상 큰 실책을 범했으니 살아 있다 해도 죽은 자만 못합니다."
우왕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을 터, 계속 출정을 재촉해대자 이성계는 그렇다면 조금 늦추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전하께서 꼭 이 원정을 실현하시려거든 일단 서경(평양)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공격을 개시하십시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인즉 사기 높은 가운데 진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적기가 아니오니, 비록 요동의 성을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할 것이며, 진격하더라도 지칠 것이며, 군량의 보급 또한 원활히 이루어지기 힘드니 결국 참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하지만 우왕은 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던 바, 결국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우왕은 고령의 최영이 혹시라도 선봉에 섰다 어찌 될까, 그를 서경에 머물게 했다. 그러자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선봉에 서게 되었는데, 그는 이번 싸움을 승산 없다고 보는 자였고, 그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이 장마철 군사 운용의 어려움과 식량 보급의 문제였다. 그런데 그가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결국 우려하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장맛비를 기다려 느릿느릿 행군한 덕을 봄)
그는 위화도에 이르러서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았는데,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던 이성계가 뭔가 결심한 얼굴로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5만 군사의 회군이 일어났다. 이성계는 그 대군을 이끌고 수도 개경을 향해 질풍같이 내달았다. 거의 모든 군사를 차출해 보낸 개경에 그들에 맞설 병력이 있을 리 없을 터, 5천 명의 도성방위군은 곧 와해되고 궁성으로 쿠데타 군이 밀려들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각, 우왕은 폐위돼 강화도로 유배가고, 최영은 붙잡혀 합포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처형되었다.
이성계는 9살 창왕을 왕으로 세웠다가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웠다. 그리고 1392년 7월, 이번에는 자신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제 왕씨의 고려는 망하고 이씨의 새로운 나라가 선 것인데, 이성계는 그 사실을 명나라 주원장에게 알리고 나라의 국호를 물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과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던 듯하였다
"제가 대국 명나라에 기어오른 싸가지 없는 고려국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신하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국호를 뭐라 하면 좋을까요? 옛날 이름인 조선을 다시 쓸까요, 제 고향 이름인 화령으로 할까요?"
신하의 나라를 자처해 국호까지 물은 놈이 연호를 가질 리 없었으니, 연호는 당연히 명나라의 '홍무'(洪武)를 받들어 썼으며 기타 대소사를 일일이 명나라에 물어 행했던 바, 나중에는 명나라에서 사신 좀 그만 보내라고 사정할 지경이었다. 그 사신 중에는 문장이 건방지다는 이유 등으로 처형당한 사람들도 있었다.(주원장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은 정총, 노인도, 김약항인데, 그중 김약항의 아들은 통곡 끝에 미쳐버렸다)
주원장은 그해 3월에도 양왕의 손자 애안첩목아(愛顔帖木兒) 등의 4명을 제주에 보내 백백태자 등과 함께 안치토록 하였다. 그때는 아직 공양왕이 재위에 있던 때로(공양왕 4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몇 달 전이었는데, 우연찮게도 조선이 건국된 후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주원장의 입장은 다음과 같지 않았을까 한다.(물론 추측이다)
"고려의 원정군이 쳐들어온다고 했을 때 나는 목욕 재계(齋戒)를 하고 친히 태묘에 나가 사흘 동안이나 점을 쳤다. 점괘가 계속 나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하마터면 요동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도 권지고려국사(이성계)가 군을 물렸다. 하마터면 넓은 요동 땅이 전부 고려로 되돌아갈 뻔했는데, 그까짓 작은 섬쯤이야....."
* 주원장은 땡중 때인 황각사(皇覺寺) 시절에 익힌 주역과 백련교도(白蓮敎徒) 시절 익힌 사술(邪術)로써 큰일에 앞서 스스로 점을 쳤고 점괘를 신봉했다. 탁발승으로 떠돌던 그가 홍건적에 합류를 한 것도 스스로 본 점괘의 결과를 따른 것인데 이후 승승장구하였던 바, 스스로 신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편 제주도에 유배 왔던 백백태자(伯伯太子)와 일족은 어찌 되었을까? <조선왕조실록> 중의 백백태자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조 4년(1395) 5월 8일 : 백백태자에게 쌀과 콩 4백 곡(斛)과 저포(紵布)·마포(麻布) 30필을 내려주고, 양왕(梁王)의 손자에게 쌀과 콩 1백 곡과 저포·마포 10필을 내려주었다.
정종 2년(1400) 9월 16일 : 제주의 백백태자가 내시를 보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쳤다.(※ 자신이 유배 올 때 챙겨온 금붙이와 제주에서 키우던 말을 감사의 선물로 올림)태종 4년(1404) 10월 4일 : 백백태자가 제주에서 죽었다.
세종 26년(1444) 3월 3일 : 병조(兵曹)에 전지하기를, "백백 태자의 처(妻)가 늙고 빈궁하여 살아가는 것이 불쌍하니, 제주목사로 하여금 해마다 의복과 양식이며 혜양(惠養)할 물건을 주어 특별히 존휼(存恤)을 더하라. 또 사위 임울(林鬱)에게는 군역(軍役)을 시키지 말고 오로지 봉양만을 맡도록 하라" 하였다.'탐라의 재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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