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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 마지막 성주의 무덤을 아시나요?탐라의 재발견 2021. 8. 15. 05:12
언필칭 반만년이라는 우리의 역사다. 반(半)만년, 즉 우리의 역사가 5천 년이라는 것인데 세계 최고(最古) 문명이라는 이집트 역사에 필적한다. 그런데 (한국사가 함께 표기된) 세계사 연표를 보자면 이상한 역사의 기록들이 발견되니 로마의 카이사르가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에 원정했을 때 신라의 박혁거세가 박(바가지) 모양의 알에서 태어난다. 시기는 기원전 57년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완전 점령했을 때 가야국의 김수로도 알에서 나오고,(AD 43) 네로 황제가 즉위할 즈음 신라의 석탈해 역시 알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렙틸리언(파충류 인간)이었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될 즈음 다행히도(?) 김알지가 금 궤짝으로부터 나온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서기 64년 무렵이다.
내가 이런 황당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알이나 금궤에서 태어난 그들은 모두 한반도로 이주한 외래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알이나 금궤 등은 그 후손들이 현지인과의 차별성과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어낸 천강(天降)설화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생각해보니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도 알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굳이 외면하고 있지만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가야 땅에 먼저 도래한 용성국(龍城國) 출신 석탈해가 나중에 도착한 김수로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다 패배한 기록도 있다. 이상을 보면 과거 외래인의 한반도 이주는 큰 사건도 아니었던 듯하니, 앞서 '제주 삼성혈의 비밀'에서 말한 그대로 삼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씨의 세 신인(神人) 역시 외래객이었다. 다만 그들은 천강신화 대신 땅 속으로부터 출현했다는 스토리가 선택되었을 뿐이다.
아무튼 신화는 그러한데, 어찌 됐든(우리의 역사에 과장된 내셔널리즘이 존재하든, 탐라국의 시조가 삼성혈의 구멍에서 나왔든 중국에서 온 보트피플이든) 탐라의 첫 통치자가 고·을·부 씨의 3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중의 고씨가 탐라국의 왕위를 세습했음 또한 분명하니, 다음 <고려사>의 기록은 그 사실이 일목요연하다.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 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者),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하였다.
신라 '성시'는 신라의 전성시대를 말하니 곧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치세로서, 이는 '신라 문무왕 2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상통한다. 즉 탐라국은 그간 백제의 속국으로서 국주(國主)는 백제 왕으로부터 백제 제1관등인 좌평의 직을 하사 받았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문무왕에게 찾아가 정식으로 항복을 한 것이다.
이후 탐라국 국주의 호칭은 '성주(星主)'로 불리며 강국의 속주(屬州) 혹은 번국(蕃國)으로서 역사를 이었을 터, 어쩌면 약소국의 처지와 처신을 보여준 교과서적인 예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처신을 다시 고려국에 보여주니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자 고려 태조 8년인 925년 11월 사신을 파견해 조공한다.
이어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고말로(高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도 성주와 왕자의 작위를 받아 번국으로서의 자치권을 인정받게 된다. 다만 이때부터는 대내외적으로 사용하던 국주나 군주라는 명칭을 쓸 수 없게 되고 궁실(宮室)도 성주청(星主聽)으로 격하된다.
하지만 그나마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으니 숙종 조인 1105년에 이르러서는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인 군(郡)으로 편입되고, 1153년에는 탐라현으로 격하된 뒤 중앙으로부터 관리가 파견된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탐라국은 해체되었던 바, 성주와 왕자는 제1관등과 제2관등을 지칭하는, 그러나 실권은 없는 허직(虛職)의 명칭으로 남게 된다.
이후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고 탐라를 근거지로 한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뒤 제주도는 탐라총관부라는 이름의 원나라 직할령이 되지만 1294년 공민왕이 이를 철폐시킨다. 그러나 원나라 잔존 세력인 목호(牧胡)의 난이 발발하고, 1375년 최영이 토벌하고 나서야 완전히 수복돼 고려의 영토로 복귀된다.(☞ '제주사람들에게는 삼별초 역시 침략자였다')
그렇지만 고려는 곧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고 조선이라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는데, 이 혼란의 와중에 성주는 일시 실직(實職)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아 제주도를 통치한 것으로 보이니, 제주시 거로동의 쌍분은 탐라국 마지막 성주 고봉례의 무덤이다. (※ 서귀포시 하원동의 속칭 왕자묘로 불리는 분묘는 탐라국 왕자와는 무관한, 운남 양왕의 아들 백백태자의 묘로 여겨진다. ☞ '명태조 주원장은 제주도를 명나라 땅으로 생각했다')
사서를 보면 성주 고봉례(髙鳳禮, ?∼1411)는 이와 같은 과도기를 틈타 국권의 회복을 기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그를 회유하려 1386년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과 대호군 진여의를 탐라에 파견하여 위무하고, 1388년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이라는 작위를 내린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고봉례는 과거의 탐라 왕들이 그러했듯, 수 차례 군마를 바치며 번국 국왕으로서의 지위 회복을 기도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았으니 1404년(태종 4)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다. 고봉례는 실질적으로 탐라의 마지막 성주였던 셈이다.
고봉례는 1411년 8월 한양에서 죽은 후 고향인 제주 땅에 묻혔는데, 한양 생활 시절, 태종 이방원의 은총을 입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태종의 은총에 힘입어 아들 고상온(高尙溫)에게 제주도주관 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이란 세습직을 받게 만들었던 바, 허명(虛名)으로라도 탐라 왕족의 명예를 이어보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으니, 좌·우도지관이란 직함마저 1445년(세종 27) 6월 폐지되며 탐라의 왕손은 모두 평민이 되고 말았다.
올여름, 탐라국 마지막 성주 고봉례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고봉례의 무덤은 사진으로도 확인했고 1996년 제주대 박물관이 발굴조사 후 세운 표석도 사전에 사진으로 확인했다. 그렇지만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도 찾을 수 없었던 바, 이리저리 숲길을 헤매야 했으며 중간에 소나기 샤워까지 해야 했다. 그러기를 반나절, 산을 내려와 허기를 채운 후 재차 올라가서야 겨우 능묘를 찾을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군주였으니 능묘라 할 수 있는 무덤일 터, 하지만 차마 그렇게 부르기 민망했으니 마구 자란 무성한 수풀에 덮혀진 무덤 같지도 않은 무덤은 비운의 군주의 그것에 더도 덜도 아닌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금강산 비로봉 아래에 있는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 묘는 천년 사직의 마지막 왕손이라는 의미 하나로서 전설만으로도 유명세를 떨치는데, 그보다 더 오랜 사직을 이어온 탐라국의 마지막 성주 무덤은 역사임에도 왜 잊혀져 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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