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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황후와 제주 불탑사
    탐라의 재발견 2021. 8. 16. 00:42

     

    다시 말하거니와 언필칭 반만년 역사라는 우리의 장구한 역사다. 그런데 조금은 부끄럽게도 그와 같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임에도 -5천년이면 세계 최고(最古) 문명이라는 이집트 역사에 필적한다- 세계사에 내놓을 이렇다 할 인물은 드문데, 그래도 그중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와 고려 출신의 기황후, 이 두 사람은 세계사를 움직인 인물로서 드러낼 만하다. 

     

    고선지에 대해서는 앞서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 II' 편을 통해 그가 간 길을 밟아봤고, 기황후에 대해서도 '원나라 장인이 만든 최고의 걸작 경천사 10층 석탑'에서 족적을 조명한 바 있다. 물론 그것이 대제국 당나라와 원나라의 힘에 편승한 발자국이지만 개인의 역량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선지의 경우는 선악을 가리기 힘든 반면 기황후의 경우는 확실히 악녀 쪽이다. 그리고 그 악에 빌붙고자 했던 불쌍한 중생들의 몸부림이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의 경천사 10층석탑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원나라 장인이 만든 최고의 걸작 경천사 10층 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을 들어서면 곧바로 만나게 되는 높이 13.5m의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한국 대표 박물관의 얼굴 같은 문화재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보물이다. 그래서 국보 제86호로 지정돼 있는

    kibaek.tistory.com

     

    잘 알려진대로 기황후(奇皇后, 1315-1369년)는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고려 처녀였으나 이후 신데렐라의 꿈을 이뤄 원나라 황제 혜종의 부인으로 입신양명한 인물로서, 고려 개경 경천사에 있던 10층의 대리석 석탑은 그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탑이다. 그 탑에 숨겨진 명문(銘文)을 다시 보자면 다음과 같다.

     

    "대 화엄사찰인 경천사(敬天寺)에서 황제폐하와 황후마마의 만세(萬歲) 장수를 축원드리오니..... 부디 현세(現世)에는 만복과 장수를 누리시고 내세(來世)는 성불하소서." 

     

    大華嚴敬天祝延皇帝陛下壽萬歲皇后皇□□ 秋文虎協心奉□□調雨順國泰民安佛日增輝 法輪常輪□□現獲福壽當生□□覺岸至正八 年戊子三月 日大施主重大匡晋寧府院君姜融大施主院使高龍鳳大化主省空施主法山人六怡□□普及於一切我等與衆生皆共成佛道.(출전: <한국 금석 전문>) 

     

    여기서 황제폐하는 원나라 혜종 토곤 테무르이며 황후마마는 기황후이다. 즉 이 탑은 원나라 황제와 기황후에게 아첨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인데, 크게 시주를 하여 탑을 세운 자들의 관직과 이름 또한 새겨져 있다. 그 기막힌 면면은 다음과 같다.

     

    대시주(大施主) 중대광(重大匡) 진령부원군(晋寧府院君)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院使) 고용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法山人) 육이(六怡)  

     

     

    경천사 10층석탑
    위 글자가 탑신 건물 창방에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여기서 중대광은 종1품에 해당하는 고려 최고위 관직으로 그 감투를 쓴 진령부원군 강융(?-1349)이란 놈은 개경부(開京府)의 관노(官奴)였으나 충선왕과 충렬왕의 왕위 쟁탈전 때 충선왕에 붙어 공을 세워 부원군까지 오른 자였다. 좋게 말하자면 흙수저에서 금수저 이상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나 그 과정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원나라 승상인 늙은 탈탈(脫脫)에게 첩으로 보내기도 했는데,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그자의 화룡점정이 기록돼 있다. 사대주의의 극치인 이 탑을 세우기 위해 국고(國庫)를 털었고 그 돈으로 원나라의 이름난 기술자들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탑을 세운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봉(?-1362) 또한 못지않은 놈이니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에 노비로 끌려갔다 스스로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된 자였다. 그 후 고려에서 공녀로 받쳐진 자 중 얼굴이 반반하고 영특했던 기(奇)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황제의 두 번째 부인이 되게 만들었던 바, 그 권세가 당연히 하늘을 찔렀다.(사서의 고용보·高龍普와 동일인이다)

     

    고용봉은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져 고려로 금의환향하는데, 이때 충혜왕이 늦게 마중 나왔다 하여 구타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그는 결국 충혜왕을 끌어내려 원나라로 유배 보냈고, 기황후의 친정 오빠 기철과 손잡고 전횡을 일삼다 공민왕에 의해 암살된다) 그밖의 성공(省空)과 육이(六怡) 등은 경천사의 승려로 보이는 바, 논외로 하겠다.

     

    그 엄청난 위세의 흔적이 제주시 원당봉에도 남아 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1273년 1월 원세조 쿠빌라이는 홍다구로 하여금 탐라의 삼별초를 정벌하게 하고, 그해 3월 삼별초의 항파두리성이 함락된다. 이후 제주도는 탐라총관부라는 이름의 원나라 직할령이 되는데, 1375년 공민왕이 수복하기까지 꼬박 100년이 걸린다. 즉 100년 동안 제주도는 원나라 땅이었으니 그곳에 기황후의 흔적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제주시 원당봉 불탑사의 5층석탑은 바로 그때의 일을 증언한다. 원나라의 당(堂)이 있었다 하여 원당봉이라 불리는 제주시 삼양동의 이 오름에는 제주도 유일의 석탑이자 세계 유일의 현무암 탑인 5층석탑이 현존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기황후가 혜종의 부인이 되기 전, 두 사람 사이의 득남(得男)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원당사(元堂寺)의 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불사(佛事)가 정말로 효험이 있었는지 1339년 아들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를 얻으니, 그가 곧 북원(北元)의 소종 황제(=순제)다. 기황후는 득남의 여세를 몰아 1340년 드디어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지만 크게 지나침이 있었던 바, 국정이 문란해지고 내분이 일어나 국세가 기울어진다. 이에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 세력에 1368년 수도 대도(大都)를 빼앗기고 피난길에 오르니 그 와중에 혜종은 죽고 북쪽으로 쫓겨 간 원나라는 망국의 수순을 밟게 된다. 

     

     

    불탑사 대웅전
    불탑사 입구의 원당사지 표석 / 쌍성총관부 시절 세워진 원당사는 17세기까지 존속되다 폐사되었고 그 자리에 1914년 불탑사라는 이름의 절이 재건됐다.
    옛 원당사 5층석탑(보물 제1187호) / 현 불탑사 5층석탑으로 앞에 보이는 잔디는 당대의 건물지이다.
    불탑사 5층석탑 / 원당사 건립과 함께 세워진 높이 4m의 현무암 석탑이다. 세워졌던 위치가 본래 이 자리였는지 후대에 옮겨졌는지는 불분명하다. 1998년 실측조사 과정에서 탑신 내부의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이미 도굴꾼의 손을 탄 듯 비어 있었다.
    불탑사 안내문
    불탑사의 전신인 옛 원당사 금당지
    원당사지 출토 청자편 / 국립제주박물관
    원당사지 출토 기와편 / 국립제주박물관
    삼양동 선사유적지 부근에 복각된 불탑사 5층석탑 / 기단 세 면에 새긴 안상(眼象)의 형태와 1층 탑신 남쪽의 감실을 보다 잘 살필 수 있어 이 사진을 실었다. 경천사 10층석탑에는 크게 못 미치나 밝은 현무암 소재로 세장(細長)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수작이다.
    원당사 관음보살상 / 불탑사 맞은 편에 태고종에서 옛 원당사의 이름과 같은 사찰을 세웠는데 대웅전 옆의 관세음상은 무척 수작이다.

     

    ※ 이 그림은 기황후가 아님.

    인터넷에서는 타이페이 고궁빅물관의 이 초상화를 기황후의 얼굴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그림의 주인공은 기황후가 아니라 원나라 순종(順宗)의 부인인 소헌원성황후 다기부인이다. 기황후의 남편 혜종이 죽자 명태조 주원장이 순제(順帝)라는 시호를 내렸던 바, 순종과 순제가 헛갈린 듯하다. 평론가 사이에서 명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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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