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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장인이 만든 최고의 걸작 경천사 10층 석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4. 29. 23:57

     

    국립중앙박물관을 들어서면 곧바로 만나게 되는 높이 13.5m의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한국 대표 박물관의 얼굴 같은 문화재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보물이다. 그래서 국보 제86호로 지정돼 있는데 조선시대 이를 충실히 모방해 만든 원각사지 석탑이 국보 2호인 것을 보더라도 이 탑의 무게가 짐작된다. 본래 있던 곳이 개성의 폐사지가 아니라 서울이었다면 국보 2호를 넘어 Top을 넘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 탑은 가치는 그렇게 갈음된다.  

     

     

    국보 제86호 경천사지 10층 석탑

     

    말한 대로 원래 이 탑은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敬天寺) 절터에 있었다. 경천사는 고려 예종 8년(1113)에 완성된 국찰(國刹)로서 낙성식에는 왕이 몸소 행차했다. 절은 조선조에 들어서도 국찰의 위용을 이었으니 태조 이성계가 정기적인 예불을 들일 정도로 대접을 받았으나 숭유억불의 시대적 파고를 넘지 못하고 폐사되었다. 그 후 그곳에 홀로 남았던 탑은 1902년 세키노 다다시라는 사학자에 의해 일본에 알려지게 됐고, 1907년 순종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 미쓰아키에 의해 해체되어 일본으로 실려갔다.

     

    이에 조선인 교육을 위해 초빙되었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와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은 이 사실을 <대한매일신보>, <뉴욕 타임스> 등에 알려 일본의 만행을 고발했고 결국 142조각으로 나뉘어진 채 건너갔던 탑은 그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복원할 장소도 인력도 마땅찮았던 탑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가 해방 이후 경복궁 영추문 근처에 세워졌는데, 즈음하여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산성비와 풍화작용에 의한 문제점이 드러나며 보존처리를 위해 해체되었고, 이후 10년간의 보수를 거친 후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개장에 맞춰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07년 헐버트가 일본 고베(神戶)의 영자신문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에 기고했던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Vandalism in Korea)'. 일본 내의 반환 여론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복궁에 있을 때의 모습

     

    이상의 파란만장한 사연은 익히 알려져 있어 여기서 따로 추가해 설명할 것은 없다. 대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탑에 얽힌 조금은 불편한 진실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탑이 과연 우리 선조의 작품이 맞나 하는 것이다. 물론 외국인이 만들었다 해도 가치만 있다면 얼마든지 문화재가 될 수 있겠으나 마치 우리가 만든 것인 양 하는 짓은 옳지 않다는 것이니 우선 두루뭉술한 박물관 안내문을 보자.(아래는 경천사지 10층 석탑 기단부 전면에 놓인 안내문의 앞 부분이다) 

     

     

    아(亞)자 형의 기단부에는 사자와 나한상, 그리고 재미 있게도 <서유기> 장면이 묘사돼 있는데 당대의 소설 <서유기>의 인기를 짐작케 해준다. 정면이 밋밋한 이유는 마모와 훼손이 심해(재질이 대리석인 관계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다른 돌로 대체했기 때문으로 원래의 돌은 박물관 지하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 안내문

     

    이것을 보면 이 탑을 마치 고려인이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세운 듯하다. 교과서를 비롯한 다른 모든 책에서도 이 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글로벌한 고려시대 걸작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탑신에 기록된 명문(銘文)은 이와는 사뭇 다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이 역시 일단 그 명문부터 살펴보자.

     

    大華嚴敬天祝延皇帝陛下壽萬歲皇后皇□□ 秋文虎協心奉□□調雨順國泰民安佛日增輝 法輪常輪□□現獲福壽當生□□覺岸至正八 年戊子三月 日大施主重大匡晋寧府院君姜融大施主院使高龍鳳大化主省空施主法山人六怡□□普及於一切我等與衆生皆共成佛道.(출전: <한국 금석 전문>)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대 화엄사찰인 경천사(敬天寺)에서 황제폐하와 황후마마의 만세(萬歲) 장수를 축원드리오니..... 부디 현세(現世)에는 만복과 장수를 누리시고 내세(來世)는 성불하소서"라는 내용으로, 여기서 황제폐하는 원나라 11대 황제 혜종이며 황후마마는 고려인으로 그의 부인이 된 기황후(奇皇后, 1315-1369년)이다. 즉 이 탑은 원나라 혜종과 기황후에게 아첨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인데, 때는 지정(至正) 8년 무자년(戊子年) 3월, 즉 1348년(고려 충목왕 4년) 3월로 그 날짜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크게 시주를 하여 탑을 세운 자들의 관직과 이름 또한 정확히 기재돼 있으니 그 기막힌 면면은 다음과 같다.

     

    대시주(大施主) 중대광(重大匡) 진령부원군(晋寧府院君)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院使) 고용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法山人) 육이(六怡)

     

     

    위 글자가 새개져 있는 1층 탑신 건물의 창방
    壽萬歲皇后皇의 글자
    명문은 남쪽면을 시작으로 창방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새겨졌다.

     

    여기서 중대광은 종1품에 해당하는 고려 최고위 관직으로 그 감투를 쓴 진령부원군 강융(?-1349)이란 놈은 개경부(開京府)의 관노(官奴)였으나 충선왕과 충렬왕의 왕위 쟁탈전 때 충선왕에 붙어 공을 세워 부원군까지 오른 자였다. 좋게 말하자면 흙수저에서 금수저 이상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나 그 과정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원나라 승상인 늙은 탈탈(脫脫)에게 첩으로 보내기도 했는데,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그자의 화룡점정이 기록돼 있다. 사대주의의 극치인 이 탑을 세우기 위해 국고(國庫)를 털었고 그 돈으로 원나라의 이름난 기술자들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탑을 세운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봉(?-1362) 또한 못지않은 놈이니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에 노비로 끌려갔다 스스로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된 자였다. 그후 고려에서 공녀로 받쳐진 자 중 얼굴이 반반하고 영특했던 기(奇)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황제의 두 번째 부인이 되게 만들었던 바, 그 권세가 하늘을 찔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져 고려로 금의환향하는데, 이때 충혜왕이 늦게 마중나왔다 하여 구타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이후 그는 기황후의 친정 오빠 기철과 손잡고 전횡을 일삼다 공민왕에 의해 암살된다) 성공(省空)과 육이(六怡) 등은 경천사의 승려로 보이는 바, 논외로 하겠다.

     

     

    드라마 속의 기황후. 그녀는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해 최유를 대장으로 하는 원나라 군대로써 고려를 침략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나 미화되었다.
    예쁘면 다 용서되는 케이스?
    드라마 속의 덕성부원군 기철. 하지만 넌 용서할 수 없어!

     

    간단히 말하자면 경천사 탑은 원나라 최고의 장인이 만든 세계 최고의 탑이다. 당시의 몽골제국은 세상을 거의 석권했고 원나라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계 제일의 나라였다. 따라서 원나라 최고 장인이 만든 탑이라면 가히 세계 최고의 탑이 될 수 있는 것이니 이 탑은 그렇게 불려도 별 하자가 없다. 하지만 기황후의 고국인 고려에 세워졌다는 것 외에 고려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탑이다. 어쩌면 재료가 된 질 좋은 대리석도 원나라에서 가져왔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탑은 고려의 친원파 신하들이 원나라 황제 부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한 탑인 바, 쉽게 말하자면 일제시대의 친일파 이지용과 이완용이 일본 천왕을 위해 황국신민서사의 탑을 세운 것과도 진배없다. 만일 그런 탑이 있었다면 광복과 동시에 허물어졌겠지만, 지금과는 시대가 달라서였을까, 아니면 이성계도 그들에 못지않은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이었을까. 탑은 조선왕조에 들어서도 사랑을 받았고, 세조는 그 탑을 모방한 탑을 한양에 세우기까지 했다. 글쎄. 이 또한 예쁘면 용서되는 케이스일까?

     

     

    유리 보호각 안에 갇히기 전의 원각사지 10층석탑
    국보 제2호 원각사지 탑의 하단부
    그럼에도 우리는 기념우표와
    금·은으로 된 기념메달까지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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