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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촌의 모던보이 정세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 14. 23:57


    몇 해 전 북촌 열풍이 불었을 때 나는 오히려 관심 밖이었다. 북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우연찮게 들어 알고 있던 까닭이니, 그래서 북촌에 몰려드는 내외국인들을 볼 때면 '저 사람들, 혹시 저기를 조선시대 유적 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는가'하는 생각에 좇아가 내막을 가르쳐주고 싶은 괜한 노파심이 들기도 했다. 아울러 이 북촌을 만든 한 남자의 아름다운 일생을 말해주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북촌이 여느 관광지보다도 더욱 붐빌 무렵,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무척이나 괴로웠을 터, 지금도 '조용히 해달라'거나 '집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거나 '계단 위에 오르지 말아달라'는 한글 혹은 일본어 글귀를 써 붙인 집이 눈에 띈다. 



    북촌이 비명을 지르던 때(뉴스핌 사진) 



    북촌은 서울 북쪽에 위치한 한옥동네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왕족, 양반, 관료들이 살았던 고급주택가였다 한다. 동네 주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궐이 산재하니 그랬을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서 당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건 세종조의 재상 맹사성의 집터 정도이다. 물론 그가 살던 집은 없고 집터 뿐이다.(만일 그때 가옥이 존재한다면 국보급임에 틀림없다. 현재 세종, 성종조의 목조건물은 안동 봉정사 대웅전 정도로, 민가와 궁궐 건물 중에서는 임진왜란 이전 건물은 남아 있는 게 없다. 숭례문 누각이 그때 것으로는 유일했는데 그나마 불타서.....)




      카페로 변한 맹사성 집터


    맹사성 집터 가는 길



    과거에는 어쨌을런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북촌, 즉 종로구 가회동, 삼청동, 계동 일대의 한옥(형)건물들은 일제시대인 1920년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건축 개발업자)이자 모던보이였던 정세권이 일대에 개량한옥단지를 조성하며 무더기로 지은 것들로서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의 대규모 재개발 아파트단지에 비견할 만하다. 당시 서울의 팽창과 더불어 창출된 중산층 주택에의 시대적 요구를 경남 고성에서 올라 온 이른바 '집장사'로 불리던 한 청년사업가가 주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청년사업가가 주목한 건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양 유수의 전통 주택가가 일본인에 점유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 또한 강했던 바, 이미 남촌(예장동, 남산동, 필동, 명동, 충무로 일대)을 점거한 왜식 주택들이 청계천 너머 북촌까지 점령할까 노심초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인의 토지 소유 비중은 경성 전체의 16%도 되지 않는 마당이었는데, 반면 일본인이 점유한 토지는 72%에 이르렀다. 아직까지 북촌은 옛 양반들의 세력이 미미하게나 남아 있어 힙겹게 버티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 일본인의 경제력에 쓸려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실제적으로 북촌 소재의 주택들이 시장에 나오는 족족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당시의 <동아일보>는 일본인의 북촌 진입으로 인해 매물이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보도했다.(1927. 5. 30) 

     

    조선이 일본이 강제로 합병된 1910년 이후 1920년까지 10년 동안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5만 5천 명에서 6만5천 명으로 10% 정도가 늘었다. 그런데 1920년 일제가 회사령을 철폐하여 회사설립을 자유롭게 한 뒤로 수도 경성에는 그야말로 우후죽순격으로 회사와 공장들이 설립되었던 바, 1920년 20여 개에 불과했던 회사가 1930년에는 900여 개로 무려 45배가 늘었다. 물론 경영주들의 대다수는 일본인이었다. 그 회사와 공장들은 당연히 노동력을 필요로 했을 터, 많은 인구를 서울로 끌어들였다. 그중에는 일본인들도 있었지만 거의가 일본인들에게 예속된 조선인 노동자들로서 그들의 대부분은 도시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다. 당시의 신문에는 이와 같은 우울한 시대상이 오롯이 배어있다.  


    경성은 조선의 모든 중심이었다. 금일까지도 조선사람에게는 경성은 조선의 중심과 같이 생각될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 같다. 그러나 경성은 벌써 조선의 중심이 아니다. 조선인의 중심이 아니다. 즉 경성은 조선의 중심이 아니라, 게이조의 중심이며, 조선인의 경성이 아니라 일본인의 경성이다. 경제면으로 보아서 그러한즉, 다른 방면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경성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비록 3배 가량 많이 있다 하더라도 경성이라는 곳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그 집의 고용인사역자(일본인 토지주 또는 기업주에 고용된 조선인)밖에 되지 못하며, 벌써 그 집의 주인은 아니다. 경성은 벌써 '경성'이 아니다. 경성은 '게이조'(경성의 일본 발음)다.(<동아일보> 1927. 1. 5)


    일본인이 경성의 경제를 주름잡고 있지만 그들이 다 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3.1운동 후 민족계몽운동으로 의식이 높아진 조선인은 북촌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웠고 그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경제력 있는 중산층으로 편입됐으며, 발전하는 경성에 매력을 느낀 지방 부유층들도 속속 서울로 진출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살 마땅한 주택이 없다는 거였다. 조선인이고 일본인이고를 떠나 사람이 살 집에 대한 대책 없이 마구잡이로 인구만 증가하였던 바, 경성이 주택난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정세권은 그와 같은 조선인이 살 곳을 마련하고자 했고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북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1920년 이후 남산 왜성대에 있던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오고 경성부청(서울시청)이 덕수궁 옆에 신청사를 지어 옮겨오자 적선동, 통의동, 청운동, 효자동 일대에 일본인 관료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고,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직원들의 숙소도 이 일대에 지어졌다. 청계천 너머 옛 조선의 향기가 밴 땅도 이제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대를 개발하는 일본인 건설업자들은 막강한 자금력과 정치력을 지닌 카르텔을 형성하여 담합과 로비를 일삼았던 바, 총독부가 주는 관급공사와 개발 편의로 조선의 건설시장을 쉽게 장악해갔다. 아울러 금융권에서도 차별은 당연했으니 조선인 디벨로퍼가 대출금을 얻어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같은 현실이 당대의 신문에 투영돼 있다. 


    총독부가 남촌으로부터 북촌으로 옮아온 지가 겨우 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에 벌써 총독에 따라다니는 관공리(官公吏, 관공서 직원)는 물론, 상인들까지 날마다 남촌에서 북촌으로 올라오고 있어 날이 갈수록 그 수가 격증하여 이제는 조선사람 대부분이 살던 북촌에도 일본인의 그림자가 점점 농후해 간다..... 과거에 시가미(市街美, 시가지를 가꾸는 일)나 도로 확장 등에 별 큰 힘을 들이지 아니하던 북촌 일대에 경성부는 갑자기 재정에서 무리를 하면서 거액의 돈을 넣어 일을 진행하고 있다.(<조선일보> 1928. 11. 22)



    당시의 서울을 유추해볼 수 있는 사진



    이상의 상황은 자칫 북촌이 왜식 주택이나 문화주택(서양식 주택)에 뒤덮일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조선식 주택(한옥)은 문화주택에 비해 담보가치가 20~30% 이상 낮았다. 이는 한옥을 짓는 디벨로퍼의 경우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은행 대출도 여하히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대규모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매우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정세권은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 북촌 개발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했는데, 아래의 춘원 이광수가 쓴 글을 보면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바, 그것이 사업의 기틀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아래 글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돌아온 춘원 이광수가 정세권의 가회동 주택에 싸게 얻어 쓰고 있을 무렵에 쓴 글이다) 


    나(이광수)는 그의 소유인 가회동 가옥을 전세로 빌려서 3, 4개월을 살았지만 그가 어떠한 인물인 줄을 잘 몰랐다. 다만 가끔 그가 토목 두루마리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짝 깎고, 좀 검고 뚱뚱하며,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조선식 가옥의 개량과 사업의 개량을 위하야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기타 설계 · 변소 · 마루 · 토역재료(土役材料) 등 내가 안 것만 하여도 정 씨의 개량한 점이 실로 작지 않다. 미닫이 밑에 굳은 목재를 붙이는 것도 아마 정 씨의 창의(創意)라고 믿는다.....


    또한 한편으로는 운도 따랐으니 당시 경성의 급증하는 조선인 인구는 지속적인 수요를 창출했다. 그래서 그는 한옥 주택단지를 대단지로 개발할 수 있었는데, 그 방법으로는 일제침략으로 어려워진 권세가들이 내놓은 큰 집들을 효율적으로 쪼개 여러 채로 만들어 공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를테면 전통한옥의 구조를 ㅁ자 안에 집약하고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개선한, 요즘으로 말하자면 똑같은 실내 구조를 지닌 아파트와 같은 형태의 집들을 지어 공급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북촌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한옥과 익선동 166번지 한옥단지로, 특히 익선동 단지는 조선왕조의 종친 이해승 소유의 누동궁을 68채로 쪼개 효율적 공간이용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가회동 31번지는 친일파 민영휘의 아들 민대익 소유의 땅으로 그는 가회동 31번지 외에도 일대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부동산의 대부분은 정세권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여겨진다.  



      건축 천재의 절묘한 필지 분할 (자료 출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가회동 31번지 길


    북촌의 지붕

    아마도 몇 개의 표준설계도 같은 것을 가지고 동일한 구조의 집들을 겉 모양만 조금씩 달리해가며 지었던 것 같다. 


    내부 역시 거의 비슷하다.


    북촌 '청연재' 사진이다.

     

    아주 다른 형태의 외관은 훗날 집주인이 손본 것이다. 


    북촌에는 문화주택(서양식 주택)도 있다.

    '가회동 이준구 가옥'으로 불리는 이 집 역시 가회동 31번지에 있던 민대익의 집이 필지 분할될 때 떨어져 나간 땅에 지어진 것이다. 건축연대는 1938년으로 서울시 문화재자료 2호로 지정돼 있다.  


    출처가 궁금한 북촌의 계단돌



    정세권은 북촌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개발한 까닭에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공급할 수 있었고 시대적 상황과도 맞물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정세권의 회사인 건양사는 한 해 평균 300채의 한옥을 공급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1920년대 경성의 연간 주택공급량은 1700채 정도였던 것을 보면 정세권은 그 공급의 20%를 담당한 셈이었다. 그는 북촌 한옥단지개발로 사업에 뛰어든 지 10년도 안돼 부동산 재벌이 되었고 '건축왕'이라 불려졌다. 
    당시 경성의 대자본가들은 무슨 무슨 왕이라는 타이틀로 불렸는데, 조선최고 갑부 소리를 듣던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은 '유통왕'이라 불렸고 최창학은 '광산왕'이었다. 정세권은 그들과 더불어 '경성 3왕'으로 통했으나 그 두 사람과 달리 일제에 부역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니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자 경성지회의 설립을 주도하였고, 신간회 운동에도 참여해 재정 담당을 맡아 지원했다. 아울러 조선어학회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하였으니, 이로 인해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때는 그 역시 체포되어 고문받았다. 해방 후에도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사업을 후원하였던 바, 이광수는 그에 대해 또 이렇게 썼다.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 장산사라는 조선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 의복과 양복울 장려하고 <실생활(實生活>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조선물산장려를 선전하는 인물인 줄을 알았다..... 나는 정 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큰 영향을 미칠 있다는 것, 이것도 내가 그의 집에서 얻은 큰 소득 중의 하나다.

     한옥과 한글을 지킨 민족운동가 정세권


     조선어학회에 2층양옥 회관을 기증한 기사


     위 글을 쓰는 데 참고한 책


    이 책의 첫째 문장 

    많은 사람이 북촌에 열광하고 있지만, 정작 누가 이런 동네를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문장

    정세권은 한국전쟁 이후 왕십리 행당동 지역을 개발한 후,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로 낙향해 생을 마감했다. 유족들은 그가 고향에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고 하나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활동적인 행동가였고 경성을 만든 기백으로 고향 덕명리에서 자급자족적 주거환경이 가능한지를 열심히 실험했다. 그리고 죽은 뒤 40년간 가려져 있고 국가보훈처에서 사망일을 모를 만큼 잊힌 것에 대해 애석해하지 않으리라 본다. 이를 아까워했을 인물이라면, 평생 모은 거대한 자본을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에 쏟아붓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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