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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열단원 김익상이 폭탄을 던진 남산 조선총독부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2. 18. 23:38

     

     

    1995년 조선총독부로 쓰이던 중앙청 건물의 철거가 결정 났을 때 보존이냐, 철거냐를 두고 다시 설왕설래, 갑론을박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가차 없이 집행했고, 결국 폭파 해체되어 이 땅에서 사라졌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잘한 일로서 건물 뒤에 가려졌던 경복궁 근정전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아마도 해체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는 조선의 법궁(法宮)을 부수고 그 자리에 식민통치기구를 세웠던 것이니 그와 같은 수모를 겪어야 했던 당시를 돌아보면 그저 참담할 뿐이다. 

     

     

     

    이렇게 경복궁을 가로막았던 건물은
    그 첨탑만 독립기념관 한켠에 남았다.

     

    그런데 이 건물은 사실 총독부 설치 당시의 것이 아니고 1926년에 새로 지은 청사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며 총독부를 설치했으나 청사를 신설하지는 않고 1906년 남산 왜성대에 건립했던 통감부 건물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다. 이것이 1926년까지 17년 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는데, 사람들이 돈을 좀 벌면 새 집으로 이사하듯 조선에서의 수탈로 재정이 나아진 일제는 옛 경복궁의 문과 전각들을 허물고 르네상스풍에 바로크 양식을 얹은 웅장한 신축건물을 지어 1945년 패망 때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의열단의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은 우리가 흔히 아는 광화문 뒤 총독부가 아니라 남산 왜성대에 있던 총독부였다.   

     

     

    남산 조선총독부
    남산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후 일제는 구 총독부 건물을 은사(恩賜)기념과학관으로 사용하였는데, 해방 후까지 남아 국립과학관으로 쓰였으나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됐다. 만일 그것이 남았다면 치욕을 돌아보는 배움의 현장으로 보존됐을지도 모르나(경복궁을 가로막고 섰다 철거된 중앙청과는 입지가 다르므로) 어찌 됐든 지금은 없고, 굳이 옛 모습을 찾자면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근방에 있는 방송대 역사관이 같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되겠다. 이 건물은 일제가 지은 공업전습소의 본관이라 잘못 알려져 있으나(사적 279호) 실은 1912년에 건립된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로 공업 제반에 관한 시험과 연구를 행하던 건물이었다.(물론 규모는 총독부 건물이 훨씬 컸다)

     

     

    대학로 구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
    지금은 방송대 역사관으로 쓰인다.

     

    아래 사진은 남산 중턱 쯤에서 본 조선총독부로서 왼쪽으로 일본 절인 동본원사와 명동성당이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건물은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1957년 KBS 사옥이 들어섰다. 이후 KBS가 여의도로 옮겨간 다음에는 국토통일원, 안기부, 영화진흥공사 사옥 등으로 쓰이다가 1999년 서울산업통상진흥원이 운영하는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가 건립돼 2018년 7월까지 존속했다. 현재 그 건물은 완전 철거되어 그 뒤편에 자리했던 노기(乃木)신사( ☞ '우리 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 서울의 노기 신사') 터와 함께 지금껏 정비 중인데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지 궁금하다. 

     

     

    남산 쪽에서 본 조선총독부(화살표)
    남산을 배경으로 한 조선총독부 사진
    남산 총독부 자리는 지금 공사 중이다.

     

     

    옛 왜성대 축대 

     

    국치길 동판 / 지금 남산 조선총독부의 흔적은 총독부 건물이 들어섰던 왜성대 축대와 그 앞 보도블록에 끼워진 국치길 동판뿐이다.

     

    예전에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가 있었을 당시, 건물 부근에는 1995년 9월에 세운 '김익상 의사 의거 터' 표석과 2003년 12월에 세운 '통감부 터' 표석이 있었다. 일대가 정비되면 그 표석들 또한 제 모습을 드러낼 터인데 그때는 김익상 의사도 제 모습을 드러낼지.....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건물 안에 두 발의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 의사의 의거는 그 역사성에 비추어 덜 조명된 느낌이 여전한 까닭이다. 일단 채록한 사실을 대강 설명하자면.....  

     

    추산(秋山) 김익상(金益相)은 1895년에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서 태어나 인근의 삼호보성 소학교를 다녔다. 김익상이 살던 집은 동아일보 발굴 기사(1922년 4월 6일자)와 재판 기록 등을 볼 때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286번지(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 래미안 3차 아파트 입구) 홍재수씨 가(家)였던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평양 숭실학교 졸업 후 교원이 되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채록에 따르면 그는 전형적인 흙수저로 13살 때 모친을, 21살 때 부친을 잃었으며, 까닭에 평양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어려운 환경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김익상에 대해서는 어릴 적부터 왜소하고 얼굴이 까맸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인데, 대신 강단이 센, 시쳇말로 깡다구가  좋은 소년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소학교 졸업을 앞두고 부득이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으니, 처음 들어간 곳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마포의 철공소였다. 그는 그곳에서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험한 일을 이어가야 했으나 다행히 깡다구만큼이나 손재주가 좋았던 바, 일찌감치 기술자가 되었고, 24살 되던 해 서울의 연초(담배) 회사인 광성상회의 기능공으로 이직(移職)했다.  

     

    김익상은 1년 후인 1920년 6월, 중국 봉천(심양) 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났다. 조선을 떠나 만리타국으로 가야 된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오히려 부푼 꿈을 안고 중국으로 갔다.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비행사의 희망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몰래 궐련을 빼돌려 조금씩 돈을 모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비행학교가 있다는 광동으로 갔으나 그의 꿈은 학교 문전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학교가 폐교된 것이었으니, 그해 심화된 국공내전으로 운영이 여의치 않아진 학교가 결국 문을 닫은 것이었다. 그는 상해로 가 새로운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 정비 기술이 뛰어났던 그였던 바, 상해 전차 회사의 엔지니어로 취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입사한 당해에 돌연 회사를 사퇴하고 북경으로 가는데,(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던 듯싶다. 나가사키 형무소 시절의 증언에서는 '중간에 감동되는 바가 있었다'라고 했다) 그곳에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조선 의열단에 가입한다. 조선 의열단은 3.1운동 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원봉, 밀양 3.1운동의 주도자 윤세주, 상해의 독립운동가 곽경이 의기투합해 만주 길림성에서 만든 무장 독립단체였다. 

     

    의열단은 다른 독립운동단체와는 달리 일제의 주요 시설 파괴와 요인 암살을 전면에 내건, 요즘 말로 화끈한 사나이들의 집합체였다. 까닭에 단장인 김원봉에게 걸린 현상금은 자그마치 100만원(320억원)이었으니, 그것이 김구에게 걸린 60만원보다 높았다는 사실이 영화 '암살'의 흥행과 더불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015년 영화 '암살'과 2000년 영화 '아나키스트'는 조선 의열단의 활약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암살'
    '아나키스트'

     

    언뜻 의외로 여겨지는 이 사실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1920년 9월),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1920년 11월),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1921년 9월), 상해 황포강 일본군대장 저격 의거(1922년 3월),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1923년 1월), 동경 일왕 폭살기도 의거(1924년 1월)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선 굵은 활동을 주도한 의열단 단장에게 합당한(?) 금액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김익상은 이 중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와 상해 황포강 일본군대장 저격 의거의 주인공이었다. 

     

     

    의열단의 주요 단원 / 오른쪽 아래 김익상의 사진이 덧붙여졌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영화 '암살'의 스틸컷) 

     

    김익상은 1921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라는 김원봉의 지령을 받고 그를 폭사시키기 위한 폭탄 2발을 품고 경성으로 향했다. 중국 안동(단동)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온 김익상은 어릴 적부터 생활하며 익힌 일본인과도 진배없는 일본어 실력으로써 수차례의 검문을 통과해 그해 9월 11일 무사히 경성에 도착, 동생 김준상의 집에서 동생과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아침, 기계 수리공으로 변장해 2발의 폭탄을 지닌 채 남산 조선총독부에 잠입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경비병의 검문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역시 어릴 때부터의 짬밥이 통했던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김익상이  청사 내부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2층으로 올라가 내부를 기웃거리던 그는 그중 어느 방의 문을 열고 준비해온 폭탄 1발을 던졌다. 제법 으리으리하게 보였던 그곳을 총독 집무실로 판단하고 폭탄을 투척한 것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곳은 비서실이었고, 게다가 폭탄마저 불발탄으로써 터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다른 방에 폭탄을 투척했다.  

     

     

    김익상의 총독부 의거에서 모티브를 얻은 '암살'의 폭탄 투척 장면


    두 번째 폭탄은 굉음과 함께 터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에 아무도 없어 요인 살상에는 실패했다. 아무튼 난리는 났을 터, 일본 군인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는 이때 그들을 향해 "아부나이요! 니카이에 앙아루나!"(위험해! 2층으로 올라오지 마!)라고 소리친 후 유유히 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사이토 총독에 대한 암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제는 자신들의 심장부까지 침투한 조선 의열단의 대담함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런데 김익상의 활약은 이에 그치지 않았으니 이듬해인 1922년 3월, 중국 상해를 방문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에 다시 뛰어들었다. 

     

    1922년 3월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첩보 하나가 접수됐다. 필리핀 방문을 마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해를 들러 귀국한다는 것이었다. 김원봉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의열단 단원들 또한 손쉬운 먹이감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자원했는데, 최종적으로 제1선은 명사수 오성륜(<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이 저격술을 배운 것으로 알려진)이 맡되, 실패할 경우 제2선의 김익상이 나서고, 마지막 제3선을 이종암이 담당하기로 하는 만반의 계획을 세웠다. 

     

    3월 28일 오후 3시 반, 오성륜은 상해 황포탄(黃浦灘)에서 수많은 환영 인파에 둘러 쌓인 다나카를 저격했으나 그 순간, 뜻밖에도 인파 가운데 있던 미국인 관광객 스네트 부인이 끼어들며 대신 절명했다. 이에 2선의 김익상이 차에 오르려는 다나카를 쏴 머리를 맞췄지만 불행히도 모자만을 꿰뚫었으며, 3선의 이종암이 차를 향해 던진 폭탄도 불발됐다. 그들 3명은 모두 체포됐고 김익상은 나가사키로 호송돼 취조를 받았다. 그 취조 과정에서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당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던 바, 일제를 다시 한번 경악시켰다. 

     

     

    김익상(1895-1942)
    다나카 기이치(1864-1929)
    거사가 있었던 상해 황포탄 풍경
    황포탄의 현재 모습
    상해 황포탄의 어제와 오늘
    영화 '암살'의 명사수 상하이 피스톨

     

     ~ 김익상은 저격에 실패한 후 도망치다 앞을 가로막는 중국경찰과 영국군인을 쏘았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았다. 이것만 봐도 그는 영화 '암살'에 나오는 상하이 피스톨 급의 명사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다나카가 목숨을 건진 것을 보면 그자의 말 그대로 그저 천우신조라고 할 밖에.....

     

    그 혹독한 조사의 과정에서도 김익상은 잘 먹고 잘 자며 즐기듯 조사에 임해 일본인 간수들을 질리게 만들었던 바, 자신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당사자임을 밝힌 것도 일제를 우롱하자는 수작의 일환일 터였다. 그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2심에서 감형돼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20년을 복역했다. 일왕 암살을 기도한 박열 의사의 복역 기간 22년 다음으로 긴 기간이었다. 그는 1942년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찾아온 일본 경찰과 함께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됐다. 필시 살해되어 유기되었을 터이다. 까닭에 그의 기일을 알지 못하며 무덤 또한 알 길 없다. 

     

     

    총독부 폭탄 투척을 보도한 신문기사 / 1921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사진은 폭탄 투척으로 기물이 파손되고 바닥에 구멍이 난 회계과장실이다.
    총독부 폭탄 투척범이 상해 의거의 김익상임을 보도한 기사
    김익상의 재판 내용을 보도한 기사 / 192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호송 중 태연자약했으며 침식 또한 태연해 일본 순사가 혀를 내둘렀다는 내용, 재판 중에도 조선이 독립을 이룰 때까지 운동을 계속하겠노라 기염을 토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김익상의 사형 판결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김익상이 살던 공덕리 286번지
    그 지번은 지금 없어졌으나 현 공덕동 래미안 3차 아파트 자리는 그가 살던 곳으로 확실시된다. 그럼에도 그 흔한 푯돌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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