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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라국의 시조도 보트피플이었을까?
    탐라의 재발견 2021. 8. 13. 00:08

     

    앞서 신라 경주김씨 및 가야국 김해김씨의 시조가 전한(前漢)과 신(新)나라 교체기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상도 지역으로 건너온 흉노족 출신의 보트피플임을 누차에 걸쳐 말한 바 있다.(☞ '경주 월성에서 나온 흉노족의 인골' 外) 그리고 이것은 본래 나의 주장이 아니라 과거 KBS '역사추적'에서 말한 내용에 살을 덧붙인 것이라는 사실도 말한 바 있는데, 이후 흉노족 설을 반박하는 글들(신라 김씨 왕실은 흉노의 후예였나/최경선 外)도 읽었지만 썩 와닿지가 않아 계속 흉노족 설을 신봉(?)하고 있는 마당이다.

     

    말한 바대로 내가 경주김씨의 조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나의 조상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족보상으로는 원성왕 계열의 왕손인 바, 나의 조상이 흉노족이었다는 사실은 진위를 떠나 일단 흥미롭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문무왕이나 그의 동생 김인문의 비석에 자신들의 조상을 흉노족으로 적은 이유가 '멋진 족보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반대 주장이 설득력 있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려면 진시황이나 초패왕의 후예로서 조작하는 게 더 낫지 왜 '흉측한 노예' 흉노(凶奴)족을 갖다 붙였겠는가?

     

     

    국립경주박물관의 김인문 묘비명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가 흉노계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져온 독특한 묘제(돌무지덧널무덤)나 금세공기술로 증명된다. 즉 신라 땅에 전에 없던 문화가 출현한 것으로, 그 문화를 갖고 온 시기가 전한과 신의 교체였다는 사실은 그들 보트피플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화천(貨泉)이라는 동전이 증명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화천이란 돈은 신나라 왕망이 화폐 개혁을 단행하며 만든 신나라의 대표 통화이나 신나라가 단명하는 바람에(서기 8~23년까지 단 15년만 존속) 서기 14~40년까지 짧게 통용되었다.

     

    그래서 화천은 중국에서도 발견 빈도가 극히 낮다. 화천은 크게 중국 창안(長安) 바오지(寶雞)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화폐와, 기타 지역(장소 불명)에서 만든 2종류가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타 지역에서 만든 화천이 훨씬 고(高) 퀄리티였다.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 화천은 후자에 속하며 아마도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래의 바오지 화천은 중국 박물관의 것으로서 보다시피 다듬질이 뒤떨어지며 철·구리의 함량도 들쑥날쑥하다고 한다.  

     

     

    바오지 화천
    고 퀄리티 화천/한국은행 화폐박물관
    해남 군곡리 패총 출토 화천
    제주 산지항 출토 화천/국립제주박물관

     

    흥미로운 점은 이 화천이 한반도 남부에서 다수 발견되었다는 사실로 광주, 나주, 해남, 김해 등에서 꾸러미로 혹은 1점씩 발견되었다.(기타 규슈 지역에서도 발견됨)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한반도 남부의 마한, 변진(弁辰) 등의 세력이 중국과 교역한 증거로 제시한다. 용어도 거창하게 '고대의 해상 무역'인데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내용은 얼뜻 그럴싸하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억지춘양식의 해석임을 알 수 있으니, 우선은 이와 같은 화폐 교역인즉 다분히 근대 상업적 발상일 뿐더러 26년이라는 짧은 시기에만 통용된 화폐가 교역의 수단이 되었다는 건 말이 안 돼도 보통 안 되는 게 아니다.(게다가 다른 시기의 화폐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1928년 일제강점기 제주 산지항에서 발견된 화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항만 축조공사를 위한 암석 채취 중 바위 밑에서 우연히 발견된 화천은 모두 11점으로, 화천 뿐 아니라 오수전(五銖錢) 4점, 대천오십(大泉五十) 2점, 화포(貨布) 1점 등 총 18점이 무더기로 나왔다.

     

    해방 후의 학자들은 이 유물들도 어김없이 1세기 초 제주도를 근거로 하는 해상세력의 활발한 대중(對中) 무역의 증거로 분류하였다. 학자들이 그 시기를 1세기 초로 잡은 것은 화천, 대천오십, 화포가 오직 신나라 시기에만 쓰였고 후한에 이르러서는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대천오십은 8~14년, 화천·화포는 14~40년)

     

    당연히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대천오십과 화포가 남해안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면 혹 모르겠거니와 그 두 종류의 화폐는 한반도에서 오직 산지항에서만 전무후무하게 발견되었으며,(화천은 제주 금성리·종달리에서도 1점씩 나왔다) 신나라 때도 크게 통용되지 않은 화폐이다.(왕망은 화천, 대천오십, 화포 등의 화폐들을 만들어 3차례 화폐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시중의 반발이 심했던 탓에 결국 화천과 기존의 오수전이 화폐로써 병용되었다)

     

     

    산지항 출토 화천과 오수전/삼양동유적전시관
    산지항 출토 화포, 화천, 대천오십/삼양동유적전시관
    자세히 보기ㅡ 왼쪽이 화포. 위 두 줄은 화천. 아래는 오수전과 대천오십
    거문도 출토 오수전(위)과 산지항 출토 화천(아래)/ 국립제주박물관

     

    이렇듯 중국에서도 초 단기간만 통용되었고 게다가 쓰이기도 꺼렸던 값어치 없는 화폐가 활발한 대중(對中) 무역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노릇이다.(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앞뒤가 좀 맞아야 들어줄 맛이 나는데, 이쯤되면 듣고 흘리는 게 옳을 법하다. 1세기 초 제주도를 근거로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던 그 해상세력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굳이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문무대왕비나 김인문 묘비, 흥덕대왕비와 같이 구체적인 물증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꿰맞추자면 그들 탐라 이주자로 생각되는 사람은 당연히 고·을·부 씨의 세 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들 세 사람(혹은 세 씨족)은 삼성혈이라는 구멍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한·신나라 교체기의 김씨 성을 가진 흉노족처럼 바다로부터 배를 저어 온 사람들로서 긴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제주시 산지항이었다. 물론 그들이 가져온 구리 거울도 한대(漢代)의 것이다.

     

     

    산지항 출토 1세기 구리 거울/국립제주박물관

     

    그렇게 생각하면 화천, 오수전, 대천오십, 화포 등의 화폐들에 대한 설명도 어려울 게 없으니 당연히 그들 보트피플이 가져온 돈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리가 피난길에 가장 먼저 챙길 것은 돈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더욱 흥미롭게도 제주 심방(무당)들은 살풀이 가락 속에는 그 시기가 정확히 등장하니 바로 후한 영평(永平) 8년이다. 그 내용대로라면 즉 서기 65년 어느 날, 동한(東漢)의 어느 포구에서 떠난 망명객의 배가 먼 항해 끝에 제주도 산지포구에 도착한 것이다. 

     

    * '제주 삼성혈의 비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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