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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다하는 날까지 제주도의 오름을 사진에 담았던 사진작가 김영갑 씨는 "제주도를 참 모습을 알려면 오름에 오르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말 뜻을 모르겠지만 제주 오름을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불가의 돈오(頓悟)처럼 깨닫게 된다"고 했는데, 나는 나름대로 그 뜻을 깨닫기 위해 일몰의 고개길을 오르는 수도승이요 그러다 돌아본 노을에 감격하는 순례객이었다.
* 김영갑에 대해 (<한산신문>에서 발췌)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일군 사진작가 김영갑은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이래 20여 년 동안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서울에 주소지를 두고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그곳에 매혹, 1985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아예 섬에 정착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 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쳤다.
창고에 쌓여 곰팡이 꽃을 피우는 사진을 위한 전시관을 마련하기 위해 버려진 초등학교를 구해 초석을 다질 무렵, 언제부턴가 사진을 찍을 때면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이 왔다.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 됐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손수 몸을 움직여 사진 전시관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렇게 ‘김영갑갤러리두모악’ 미술관이 2002년 여름 문을 열었다.
하지만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그가 손수 만든 두모악에서 고이 잠들었고, 그의 뼈는 두모악 마당에 뿌려졌다.
이제 김영갑은 그가 사랑했던 섬 제주, 그 섬에 영원히 있다.하지만 깨달음을 얻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 이제껏 순례한 제주 오름 중의 으뜸은 이름까지 아름다운 사라오름이라는 주관적 판단을 굳힌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일 텐데, 이 주관적 판단에 대해서는 김영갑 선생이 살아 돌아와도 할 말이 있을 듯하다. '미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바움가르텐(Baumgarten, A. G.)도 미(美)의 기준에서 중요한 가치로 삼은 것이 '개인적 미의식'/aesthetic consciousness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도 사라오름은 2010년에야 금족령이 풀려 그도 들어가지 못했을 법하기에.....
사라오름이 아름다운 것은 그 꼭대기에 물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오름은 모두 368개라 하는데, 그중 분화구에 물이 있는 곳은 몇 안 되니 사라오름, 물영아리오름, 물장오름, 물찻오름 정도이다.(그밖에도 화구호를 가진 오름은 꽤 있으나 물이 없거나 혹은 우기에만 물이 조금 고이고 건기에는 바닥을 드러낸다) 오름에 물이 있어야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별함은 제공하니, 우리가 백두산이나 한라산을 특별히 여기는 데는 그것이 각각 남북한 최고봉이라는 점도 있지만 정상에서 만날 수 있는 신비스러운 호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최근 "어!" 하며 놀란 오름 분화구가 있다. 심산유곡의 오름도 아닌 제주시의 도심인 삼양동에 위치한 원당봉오름(제주시 삼양동 산 1-1번지)이다. 산의 높이도 170m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름 내에 세 곳의 사찰과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어 '삼첩칠봉'이라고도 불리는 특별한 곳으로서 원당봉의 이름은 원나라 때 세워진 절 원당사(元堂寺)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의 일곱 봉우리 이름은 앞오름, 망오름, 펜안오름, 도산오름, 동부나기, 서부나기 등이나 봉우리를 식별하는 것은 전문 지질학자도 어려울 법하고, 다만 세 절은 확실하니 중턱의 원당사(태고종)와 불탑사(조계종), 그리고 정상 분화구 내에 위치한 문강사(천태종)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각 절까지는 모두 시멘트 도로로 포장돼 있어 탐승의 재미는 떨어지나 의외로 숲이 울창해 해송의 깊은 피톤치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내가 놀란 것은 문강사의 연지(蓮池)로서, 그것이 지형상 오름의 분화구 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어쩌면 화구호(火口湖)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연못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섰는데, 내려오는 도중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만났다.
이 오름은 대형의 원형 분화구와 분화구 북쪽(바다쪽)으로 용암류 유출에 의해 말굽형 화구를 이루며, 용암유출구의 전면에는 크고 작은 3개의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주봉에 문강사(천태종)라는 절이 위치해 있으며, 절 앞에는 커다란 원형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절이 있기 전에는 이곳에 자연연못이 있었으며 논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알려진 그대로 제주도는 현무암 지대라 물빠짐이 쉽다. 따라서 수답(水畓)의 벼농사가 불가능해 논이 있는 곳은 서귀포의 하논 분지 정도이다.(하논은 평지에 이루어진 이른바 마르·Maar형 분화구라 산의 형태를 보이지 않으며 동서 1.8Km, 남북 1.3Km의 넓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그런데 이곳에 논이 있었다는 건 어떤 성인(成因)으로든 물이 빠지 않는 화구가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삼양동유적전시관 관리자 분의 말로는, 원당봉은 화산폭발이 일시에 일어나 형성된 단괴(單塊)의 화산체이며 화산재가 급격히 식으며 북쪽으로 무너진 채 굳어졌다고 하는데, 분화구 바닥에 물빠짐이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산책 삼아 오른 원당봉오름에서 사라오름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완벽한 화구호를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셈인데 문득 생각해보니 그곳에 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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