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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 김정희도 관심 없었던 이양선
    탐라의 재발견 2021. 8. 10. 01:32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로 정배된 이유는 이른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된  때문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윤상도라는 사람이 호조판서 박종훈 등의 관리를 탐관오리로 탄핵했다가 역공을 받아 국문 중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문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前) 세도가의 좌장인 경주김문의 김노경을 지목했던 바, 바로 김정희의 아버지였다. 이에 김노경은 전라도 절해고도인 고금도로 유배가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는 윤상도가 제출한 탄핵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죄로 뒤늦게 잡혀갔는데, 안동김문은 그의 죄가 아비 김노경보다 더 깊다 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문 과정에서 관련된 증인들이 모두 고문치사하는 바람에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었다.(김정희도 6차례의 고문을 당했다) 따라서 요즘 기준으로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야 정상이었겠으나 그때는 통하지 않았으니 다만 사형만이 면제되어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때가 1840년(헌종 6) 쉰다섯의 나이였다. 36대의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오른 김정희가 전주, 남원, 나주, 해남, 강진을 거쳐 도착한 곳은 제주도 북쪽의 화북포구로서, 그는 당대의 문사답게 포구에 닿자마자 시 한 수를 지어 소회를 읊었다. 서울에서 온 중죄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현지 어린이들을 보며 착상한 시로서 훗날 '영주화북진도중'(瀛州禾北鎭途中, 제주도 화북진 가는 길에서)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村裏兒童聚見那

    逐臣面目可憎多

    終然百折千磨處

    南極恩光海不波

     

    촌구석 아이들 구경거리에 난리가 났구나

    쫓겨난 신하의 꼴 가히 증오스럽도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다다른 곳

    하해 같은 임금의 은혜에 파도도 치지 않도다.  

     

     

    화북포구 전경
    옛 화북포구임을 알리는 표석
    화북진은 지금 성벽만 남아 있다.

     

    곧이 받아들이기는 힘들고 아마도 비틀어 쓴 시(詩)이리라. 이후 김정희는 제주목 관아에서 형식적인 조사를 받고 대정현으로 이송돼 대정혀 군교(軍校) 송계순의 집에 위리안치된다. 섬으로 가는 절해안치에, 제가 사는 집 울타리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위리안치 형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러다  2년 뒤 그는 대정현 갑부였던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제법 자유로워졌던 듯 대정현 향교에 현판 글씨도 써주고 후학들도 키우고 하니 현지인으로는 조천 사람 이한우와 이시형, 박계첨, 강도휘 등이 문하였고, 육지에서 찾아온 소치 허련, 강위(姜瑋), 남병길(南秉吉), 민규호(閔奎鎬) 등이 추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소치 허련은 설명이 필요없는 화가이다. 강위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한성순보>를 발행했으며, 남병길은 이조참판 한성판윤을 지낸 천재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다. 민규호는 명성황후 척족의 좌장으로 이조판서 겸 도통사, 의정부 영의정 등을 지내며 구한말 개국 정책을 이끌었다.  

     

    유배 시절의 제자는 아니지만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 신헌,(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조선측 대표) 이상적,(추사가 세한도를 그려준 역관) 이하응(흥선대원군) 등도 추사의 문하이다. 공통점은 이하응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화론자라는 것이니 그중에서도 강위, 신헌, 민규호는 개화를 넘어 개국을 주도한 자이며, 박규수 역시 강력한 개국론자로서 박영효를 비롯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모두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다.(☞ '박영효와 홍영식')

     

     

    대정읍성 성벽
    대정읍성 역시 지금은 성벽만 남았다.
    대정향교 동재(東齊) 현판 '의문당'. 추사의 유배시절인 1846년에 쓴 글로 대정 훈장 강사공이 간청해 받았다. 의심이 있으면 당연히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제주 추사관)
    '유제'(留齊) 현판 탁본. 유제는 제자 남병길의 아호이다. 추사는 제주도에 와 5년간 가르침을 받은 남병길에게 당호 현판을 써주며 "기교를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글을 덧붙였다.(제주 추사관)
    제주 추사관의 세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여균사청' 현판 탁본. "푸른 대나무 같이 청렴함" 이란 뜻의 현판 글씨이다. 원본은 개인소장품으로 제주 추사관에서 탁본을 볼 수 있다.
    은광연세 편액. 추사가 유배 중에 김만덕의 선행에 대해 듣고 그녀의 김만덕의 손자인 김종주에게 써준 편액이다. '은혜로운 빛이 세세토록 빛나라'는 뜻을 담았다.(국립제주박물관)
    완당선생해천일렵상. 소치가 그린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기의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
    대정읍에 복원된 강도순의 집/추사의 편지에 나오는 송계순의 집을 바탕으로 했다.
    추사가 후학을 가르치던 강도순의 집 밖거리
    추사가 유배 생활을 한 강도순의 집 모거리
    유배 생활 중 찾아왔던 초의선사와 방담 광경을 재현해놨다.
    추사유배지 안내문

     

    여기서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추사의 가르침은 훗날 많은 개화론자를 낳았지만 정작 본인은 외부 세계에 둔감했다는 사실이다. 아래의 일화는 이에 대한 방증이다. 

     

    1845년 6월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유배지 대정현에서 온 섬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을 알았다. 영국배가 정의현 우도에 정박했다는 사실 때문에 전도(全島)의 민심이 요동을 쳤고, 추사는 유배지 대정현에서 조용히 한라산 너머 사마랑호가 정박했다는 정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국의 조선 침입과 제주 환해장성')

    마파람에 묻어오는 소문이 연일 끊이지 않았지만, 추사는 사마랑호가 그저 지나가는 배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추사는 평상시처럼 행동하지 않으며 군사들을 움직이고 주민들을 동원하는 제주지방 관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추사는〈동생 명희에게 보낸 편지(與舍仲命喜)〉에 이 사마랑호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지난 20일 이후에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배가 정의현의 중도(中島, 우도)에 정박하였지만, 여기서 200리나 되고 저들의 배는 별로 다른 일이 없이 다만 한 번 지나가는 배였을 뿐인데 이 때문에 제주도 전역에 소요가 일어 지금까지 무려 20여 일 동안이나 진정되지 못하여 제주성(濟州城)은 마치 한차례의 난리를 겪은 듯하네.

    그런데 이곳(대정현)은 가까스로 백성들을 타일러서 다행히 제주성과 같은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네. 서울로 가는 사람(景得) 편에 서신을 보내려 했으나 이 소요 때문에 뱃길이 막혀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출항시킨다 하니 방금 그가 급하게 포구로 내려갔는데 때를 놓치지나 않았는지 마음이 쓰이네."

    다시 추사는〈권돈인에게 보낸 편지(與權彛齋敦仁)〉에서도

     

    "서양배(番舶)들이… 1년 중에 출항하는 배만도 1만 척에 가까운 숫자가 천하를 두루 떠돌아다니는데, 중국에서는 모두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최근 영이(英夷)사건(아편전쟁)은 특히 별도의 사단(事端) 때문이지만, 우리에게는 누(累)가 미칠 것이 못됩니다. 또 그 10여척의 배가 과연 영이(英夷, 영국) 입니까. 불란서(佛蘭西, 프랑스), 반아(班口牙에스파니아), 포도아(葡萄亞, 포르투갈)입니까…

    어느 나라 배인지는 분간할 수 없으나 결코 한나라의 배는 아닐 것입니다. 설령 분간이 된다 하더라도 정처 없이 언뜻 재빠르게 가버린 것을 또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사정을 물어보지 못해 걱정되고 답답한 것에 대해 혹시라도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외국의 수천 수백척에 대해서도 모두 하나하나 사정을 물었습니까? 이 또한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배들의 출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추사와는 달리 그즈음 조선의 정세는 빈번한 이양선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 매우 변화무쌍한 장마철 날씨와도 같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이상 제주문화연구소장 김유정의 글에서 발췌)   

     

    그 배들이 원했던 건 통상이요 개국이었다. 이양선들은 여러 형태로써 조선의 개국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이후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철저히 문을 걸어 닫았다. 그리고 국정의 모든 면에 있어 아버지의 뜻에 반(反)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던 고종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해가 졌다.

     

     

    1871년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아시아함대의 콜로라도 호. 1795년부터 1855년까지 조선을 방문한 이양선은 수십 척으로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배는 1832년 내한한 영국의 무장 상선 로드 암허스트 호이다. 하지만 저들이 원한 통상에 성공한 배는 없다. 반면 일본은 1853년 메튜 페리의 무력시위 한방에 개항을 했고 이후 열강의 반열에 들었다. 그렇게 볼 때 조선은 너무도 많은 기회를 상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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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