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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의 조선 침입과 제주 환해장성
    탐라의 재발견 2021. 8. 8. 00:34

     

    19세기, 세상의 1/4을 점령해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조선과는 그리 큰 인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나쁜넘과의 인연은 인생을 꼬이게 만들며 나아가서는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니 애초부터 맺지 않는 게 상책인지라 조선이 제국주의 영국과 인연이 없었던 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국으로서는 한반도가 'Far East', 즉 '극동'에 위치하다 보니 멀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국주의 프랑스가 조선에 자주 껄떡거린 것을 보면 단순히 거리상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이후 더 이상의 동진(東進)은 하지 않았다. 당시의 영국은 인도를 빼앗고 버마를 점령한 것이 동쪽으로의 최대 진출이고, 그 이상은 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에 그쳤다. 물론 그 너머엔 일찌기 프랑스가 선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있어 그 이상 진출하는 것이 힘들 법도 했다.(아무튼 이 덕에 태국은 두 강대세력의 완충지대가 되어 아시아 유일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견지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 영국군이 조선에 주둔한 적이 있으니, 유명한 '거문도 사건'이 그것이다. 1885년 3월 1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주둔하던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도웰 제독이 군함 3척으로 남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인데, 부동항을 노려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즉 영국의 동양함대는 여차하면 러시아 극동해군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갈겨 러시아의 남진 의지를 꺾겠다는 생각이었으나, 이후 러시아 정부가 조선의 영토를 점거할 의사가 없다고 피력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거문도를 철수하게 된다.* 그것이 1887년 2월 5일이었으니 영국군은 근 2년간이나 조선에 주둔한 셈이었다.

     

    * 러시아도 처음에는 영국에 맞서 제주도를 점거하려 했다는 자료가 2006년 일본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거문도(해밀튼 항)에 정박 중인 영국함정  
    거문도에 상륙한 영국군. 영국군은 거문도 주민들을 젠틀하게 대했으며 여성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거문도에 건설 중인 영국군 막사. 이 공사에 거문도 주민 300여명이 동원됐으며 이들은 노동에 대한 응분의 보수를 지불받았다.  
    영국군함에 승선한 주민대표 
    거문도 주민들과의 단체 촬영. 한마디로 조선인과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이 영국의 생각이었다. 이 사진 중의 영국인 한 사람은 군의관으로 조선인을 치료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제주도 점령 기도를 보도한 일본 신문 기사

     

    즉 거문도 사건은 세계 곳곳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라는 양강(兩强)의 싸움에 조선이 영문도 모른 채 말려들게 된 사건인데, 이때 조선은 국방력으로나 외교력으로나 한없는 무력감을 표출함으로써 세계 열강과 이웃나라 일본에 한없이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선전하게 되었고, 결국은 식민지화를 불러오게 된다. 그 조선을 식민지화한 나라는 영국도 미국도 러시아도 아닌,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일찌감치 서구화의 길을 걸은 이웃나라 일본이었다. 앞서 '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영제국이 시작되다)'에서도 말했지만, 일본은 일찍이 영국을 주목해왔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그 나라를 한번 배워보자. 일본도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저들을 배워 따라 하면 우리도 세상의 패자(覇者)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 전후 일본 선진 사상가들의 생각이었다. 사실 일본은 조선과 똑같은 쇄국정책을 취했어도 17~19세기의 200년 동안 나가사키 항을 통해 서양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인 까닭에 우리나라 조선처럼 서양에 완전 깜깜이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에 두려움 속에서도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고, 보다 빠르게 서양문물을 흡수할 수 있었다.(당시 페리 제독은 협상 테이블에 나온 일본인들이 너무도 유창하게 네덜란드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다)

     

     

    19세기 나가사키 항. 일본 막부는 쇄국주의 속에서도 데지마 섬(그림 아래의 부채꼴 모양의 섬)을 네덜란드에 할양, 217년 간(1641-1859)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도 네덜란드와 데지마를 오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인이었다. 그림에서 보이는 배는 모두 네덜란드의 상선들이다.

     

    그런데 사실 영국은 거문도 사건 이전에도 조선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으니 1795년부터 1855년까지 영국 함대는 수차례 조선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본시 낯가림이 심하고 소극적인 조선인이었던지라 그들과의 통상은 꿈도 꾸지 못했고 오로지 막을 궁리만을 해댔다. 그러다 탈없이 물러나면 그저 다행일 뿐이었다. 그 상황이 <조선왕조실록> 헌종11년(1845) 6월29일 기록에 오롯이 표출돼 있다. 

     

    "이달에 이양선(異樣船)이 호남 흥양(興陽)과 제주의 바다 가운데에 출몰 왕래하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의 배라 하면서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를 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역학 통사(譯學通事, 통역관)가 달려가서 사정을 물으니, 녹명지(錄名紙)라는 것과 여러 나라의 지도(地圖)와 종려선(棕櫚扇) 두 자루를 던지고는 드디어 돛을 펴고 동북으로 갔다."

     

    더 이상의 언급은 없지만, 사관(史官)은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이때 제주에 출현한 이양선은 영국함선 사마랑(Samarang)호로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r) 함장이 인도에서 건조된 배를 타고 제주도와 남해안을 돌아보고 간 것이었다. 사마랑 호는 제주도 우도와 대정현 앞바다에 나타나 한바탕 소동을 불러일으킨 뒤 사라졌는데, 벨처 함장은 다시 거문도에 들러 그곳 포구를 해밀튼 항(Port Hamilton)이라 명명하기도 했던 바, 훗날 영국 동양함대 사령관 도웰이 거문도를 찾아 정박한 것도 벨처 함장의 항해기에 기인한 일이었다.

     

    앞서 '제주사람들에게는 삼별초 역시 침략자였다'라는 글에서 제주도의 환해장성은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조선시대 들어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수축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지금 우도를 비롯한 제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환해장성은 1845년 사마랑 호에 대한 보고를 받은 제주목사 권즉이 그해 겨울 제주도민을 총동원하여 수축한 성이 남아 있는 것이라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1845년  영국함선 사마랑 호의 출현은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  그중에서도 온전한 제주시 화북동, 조천읍 복촌리, 애월읍 고내리 등의 환해장성은 2000년대 들어 시행한 보수공사의 결과물이다.

     

     

    우도 영일동 환해장성
    우도 상고수동 환해장성
    우도 비양도 연대  
    제주시 삼양동 환해장성
    제주시 삼양동 환해장성
    삼양동 환해장성 안내문
    가장 잘 보존된 화북동 별도 환해장성
    화북동 별도연대  
     별도연대 안내문
     별도연대에서 바라본 환해장성과 바다
    1918년에 펴낸 김석익의 <탐라기년>에는 1845년 이양선 출몰로써 환해장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혹자는, 어차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신세였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영국이나 미국에 점령당하는 편이 낫지 않았겠나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19세기 이래 지금까지 영미권 파워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보니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법하다. 실제로 영국과 미국은 조선에 대한 관심이 큰 국가였던 바, 일본 다음으로 조선과 수교조약를 맺었다.(미국과는 1882년, 영국과는 1883년에 수교했다)

     

    하지만 미국의 필리핀 식민정책이나 영국의 인도 식민정책을 조금만 심도 있게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은 쑥 들어간다. 그들의 식민지 정책은 제국주의 일본보다 결코 나을게 없었다. 특히 영국의 대(對)인도 정책은 충격적이니 막대한 인구의 인도를 영국산 면직물의 소비지로 삼으려는 욕심에 인도 방직공들의 손가락을 자르기까지 했다. 수천 년간 다져온 방직기술을 보유한 인도 방직공들이 생산한 직물에 비해 기계에서 대량생산된 조악한 면직물들은 누가 봐도 아니었으니 영국의 상품들이 소비될 리 만무했다. 

     

    이에 영국인들은 그 해결책으로써 인도 방직공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랐다. 총칼로 위협하는 가운데 길게 줄을 서 자신의 손가락이 잘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잘린 손가락들로 채워진 가마니는 (영국이 은폐했기에) 사진으로는 남아 있는 게 없지만 역사의 기억에는 생생히 남아 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의 가난은 그 기억의 산물로서, 영국인들은 특히 면직산업이 발달한 벵골 지방 사람들의 손가락을 집중적으로 잘랐고, 수천 년간 이어오던 벵골 지방의 산업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방글라데시는 벵골이라는 현지어 명칭을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 힘이 없는 나라는 그렇게 당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역사는 지금도 완곡한 형태로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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