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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남명소승> 중의 우도(牛島) 탐방기탐라의 재발견 2021. 8. 6. 00:22
* '시대의 이단아 백호 임제'에서 이어짐.
임제(林梯, 1549-1857)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는데, 스무살이 넘어서 성운(成運)을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횡사하자 그 길로 세상을 버리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던 바, 임제는 나이 28세 되던 1576년(선조 9), 속리산으로 들어간 스승 성운을 뵙고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 아래의 시는 그때 읊은 것인데, 탈속(脫俗)한 도인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쯤은 깨달은 듯 여겨진다.
道不遠人人遠道
山不離俗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
임제는 그 이듬해인 1577년 드디어 문과에 급제하는데, 이 소식을 제주목사로 있는 부친 임진(林晋)에게 알리기 위해 그해 11월 제주를 방문한다. 그리하여 다음해 3월까지 머물며 제주도를 둘러보는데, 그는 이때 제주도 오른쪽 땅 끝에 위치한 우도(牛島) 관람에 집착을 보인다. 그리하여 결국은 풍랑을 헤치고 우도에 도달하는 내용이 <남명소승(南溟小乘)>에 리얼하게 전한다. <남명소승>은 '남쪽 바다에 관해 적은 작은 여행기'라는 뜻이다.
<남명소승>은 임제의 제주 기행문으로 당시 제주의 환경과 풍속을 옅볼 수 있는데, 일기체적 서술인 까닭에 우도에 가고 싶어 안달하는 임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풍랑을 헤치고 우도에 도착한 그는, 나아가 해안 직벽(直壁) 속의 해식동굴인 주간명월(晝間明月)과 동안경굴(東岸鯨窟)을 탐승하기까지 한다. 우도 해안 절벽인 후해석벽(後海石壁) 뒤편에는 탐승의 간절함에 풍파의 위험을 딛고 우도를 방문하는 <남명소승> 속의 한 대목을 적은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아래는 임제가 쓴 <남명소승> 중의 우도 탐승기 전문이다.
사람을 수산방호소(水山防護所)로 보내 배를 대령시키도록 하였다. 우도를 선유(船遊)하기 위함이다. 정의현 현감이 벌써 기다리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성산도(城山島)라는 곳에 당도하니, 그 땅은 마치 한 송이 푸른 연이 파도 사이로 꽂혀 솟아오른 듯 위로는 석벽이 성곽처럼 빙 둘러쳐 있고, 그 안쪽으로는 아주 평평하여 초목이 자라고 있었다. 그 바깥쪽 아래로는 바위 굽이가 기기괴괴하여 혹은 돛배도 같고 혹은 막집도 같고 혹은 일산(양산) 친 것도 같고 혹은 새나 짐승도 같아, 온갖 형상이 다 기록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정의현감을 만나서 함께 배를 타고 우도로 떠났다. 관노는 젓대를 불고 기생 덕금이는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성산도를 겨우 빠져 나가자 바람이 몹시 급하게 일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배를 돌렸으면 하였고, 사공 또한 "이곳의 물길은 과히 멀지는 않으나 두 섬 사이에는 파도가 서로 부딪혀 바람이 잔잔할 때라도 잘 건너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오늘처럼 바람이 사나운 날은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웃으며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렸으니 오늘의 굉장한 구경거리는 저버리기 어렵도다"라 말하고 결연한 뜻으로 노를 재촉하였다. 물결을 타고 바람 채찍으로 순식간에 건너갔다.
우도에 가까이 닿자 물색이 완연히 달라져서 흡사 시퍼런 유리와 같았다. 이른바 '독룡이 잠긴 곳의 물이 유달리 맑다(毒龍潛處水偏淸)'라는 것인가. 그 섬은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인데, 남쪽 벼랑에 돌문이 무지개처럼 열려 있어 돛을 펼치고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안으로 굴의 지붕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황룡선(黃龍船) 20척은 숨겨 둘만 하였다. 굴이 막다른 곳에서 또 하나의 돌문이 나오는데, 모양이 일부러 파놓은 것 같고, 겨우 배 한 척이 통과할 만하였다.
이에 노를 저어 들어가니 신기한 새가 있어 해오라기 비슷한데 크기는 작고 색깔은 살짝 푸른빛을 띤 것이었다. 이 새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어지럽게 날아갔다. 그 굴은 남향이어서 바람이 없고 따뜻하기 때문에 바닷새가 서식하는가 싶었다. 안쪽 굴은 바깥 굴에 비해 비좁긴 하지만 기괴하기로 말하면 훨씬 기괴한데다 물빛은 그윽하기만 하여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위로 쳐다보니 하얀 자갈들이 달처럼 둥글둥글하여 어렴풋이 광채가 났으며, 또한 사발도 같고 술잔도 같으며 오리알도 같고 탄환도 같은 것이 거의 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었다. 대개 온통 굴이 검푸르기 때문에 흰 돌이 별이나 달과 같은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시험 삼아 젓대를 불어보니 처음에는 가냘픈 소리였는데 곧바로 굉굉한 소리가 되어, 마치 파도가 진동하고 산악이 무너지는 듯싶었다. 오싹하고 겁이 나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이에 배를 돌리어 굴의 입구로 빠져나오자 풍세는 더욱 사나워 성난 파도가 공중에 맞닿으니, 옷과 모자가 온통 거센 물결에 흠뻑 젖었다.
하물며 좌하선(坐下船)은 고기나 잡는 작은 배로, 낡아서 반쯤 부서진 배라서 바다 위로 위태롭게 떴다 가라앉았다 하여 간신히 뭍에 닿아 배를 댈 수 있었다. 고을 사람이 성산도의 북쪽 기슭에 장막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원님은 먼저 들어가고 우리 일행 또한 밤길을 걸어 정의현 읍내에 당도하였다.'탐라의 재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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