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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들에게는 삼별초 역시 침략자였다탐라의 재발견 2021. 8. 7. 00:57
흔히들 삼별초는 거점인 진도 용장성이 함락된 후 탐라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나 실은 별장(別將) 이문경(李文京)이 용장성 배중손(裵仲孫)의 명령을 받고 1270년 삼별초의 일군(一軍)을 들어와 점령한 것이 제주도 스토리의 시발이다. 대몽(對蒙) 항쟁의 끝자락을 장식했던 당시의 일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30년간의 대몽항쟁을 이끌었던 최 씨 집권은 교정별감(敎定別監) 최의가 상장군 김준이 보낸 삼별초에 살해되며 붕괴되지만, 새로운 권력자 김준 역시 최씨 정권과 비슷한 정책으로 원나라에 저항했다. 그 역시 권력을 쥔 마당이니 원나라 세력이 고려를 통치하는 것을 원할 리 없었다. 하지만 왕권강화를 꾀하던 국왕 원종(재위 1259-1274)의 생각은 달랐으니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개경 환도를 결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환도를 반대하는 삼별초를 해산시킨다.
그러자 배중손 등은 반몽(反蒙)세력을 규합하여 삼별초군을 필두로 한 1만 5천여 명을 이끌고 봉기하여 진도(珍島)에 입도(立都)하는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를 실행에 옮긴다. 승화후 (承化侯) 왕온(王溫)을 황제로 추대한 반몽세력은 진도에 용장성을 쌓은 후 황도(皇都)로 칭하며 본격적인 대몽투쟁에 들어가니 순식간에 남해안 일대가 점령되었고, 개성으로 향하는 조운선이 삼별초의 해적선에 족족 털렸다.
* 1978년 일본에서 발견된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는 가마쿠라 막부에서 작성한 서류로서 정식 외교문서가 아닌 메모에 가까운 글이다. '고려첩장불심조조'라는 제목을 보면 언뜻 불교와 관련이 있나 싶지만, 해석하자면 '고려에서 보내온 몇가지 이해되지 않는 사항들'이라는 뜻이다. 가마쿠라 막부에서 이 문서를 작성한 이유는 1268년과 1271년에 고려에서 온 두 개의 외교문서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1268년 개경정부에서 보낸 문서는 「일본이 원나라에 항복하지 않으면 정벌해버리겠다」는 위협적인 내용인 반면, 1271년 진도정부에서 보낸 문서에는「고려가 강화도에서 다시 진도로 천도했으며,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니 방어적 차원에서 진도에 (일본)군사를 보내달라」는 내용이 써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진도 정부는 재정이 넘쳐났으나 개경의 진짜 정부는 쫄쫄 타게 되었으니, 마침내 대장군 김방경(金方慶)과 원나라 흔도(欣都)로 하여금 진도를 공격하게 하는데, 그에 앞서 삼별초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일환으로써 1270년 9월 영광부사 김수와 고여림 장군을 제주로 보내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수축하고 방비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배중손은 삼별초 별장 이문경을 제주로 보내 이들을 퇴치하게 하니 명월포로 상륙한 이문경은 지금의 오현고등학교 근방에 진을 치고 정부군과 대립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부군과 세 차례의 전투를 벌이니 고여림과 김수는 전사하고 관군 1천여 명은 전멸했다. 물론 이때 희생된 삼별초 군도 만만치 않았으나 어찌 됐든 이후 제주도 역시 삼별초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던 바, 삼별초는 남해안 전체를 장악한 명실상부한 해양국가를 구축하게 된다.
*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자 1270년 9월 고려군의 영광(영암)부사 김수 장군과 그 휘하의 고려군들(1000명 추정)이 입도한 후 뒤따라 입도한 고여림의 군사 70명과 함께 삼별초의 제주도 진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로 환해장성을 쌓게 되었다.
고려관군의 뒤를 이어 1270년 11월 입도한 삼별초가 관군을 제압하고 제주를 접수한 뒤 역시 환해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환해장성을 일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기록하였다.
<제주통사>(181~182쪽)에 따르면 권직 목사는 그해 겨울 도민들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보수하고 축성하였으며 지금 해안에 남아 있는 자취는 바로 그때의 것이다. 이와 같이 환해장성은 삼별초의 입도와 관련하여 축조를 한 것이지만, 현존하는 장성이 고려 때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실제로는 그후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시대에 수축된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삼양동의 환해장성은 동쪽으로는 검은여 포구 옆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비렁포구 옆까지 이어져 있다. 높이나 형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회곽도가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전체적으로 환해장성임을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즈음하여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도 수차례 진도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이듬해인 1271년(원종 12) 5월, 홍다구(洪茶丘)가 몽골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왔다. 이에 김방경·흔도·홍다구 휘하 1만 2천의 여몽연합군은 격전 끝에 진도를 함락시키는데, 삼별초가 세운 황제 왕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이후 더 이상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바,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삼별초의 진도 정부가 붕괴되자 김통정 장군은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제주에 상륙, 애월읍 고성리에 토성을 쌓고 2차 항전에 나섰다. 일본 원정을 앞둔 고려 정부는 제주도의 삼별초에게 뒤통수를 맞을까, 김통정을 회유했으나 김통정은 사신을 죽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에 1273년 1월 원 세조 쿠빌라이는 홍다구로 하여금 탐라를 정벌하게 하니 같은 해 3월, 홍다구의 몽고군 6,000명과 김방경의 고려군 3,000명은 3군으로 진을 나누어 명월포, 귀일포, 함덕포로 상륙한다.9,000명의 여몽연합군은 고성리에서 합류하여 항파두리 성을 몰아쳤다. 그리고 3일간의 전투 끝에 항파두리 성은 함락되고 김통정은 자결함으로써 삼별초의 긴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되는데, 그 최후가 생각 외로 허망하다. 그로부터 100년간 제주도는 탐라총관부라는 이름의 원나라 직할령이 되는데, 이후 원나라의 세력이 쇠퇴함에 공민왕은 탐라를 돌려받으려 하지만 목호(牧胡)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이 저항은 삼별초의 그것보다 훨씬 길고 강력했던 까닭이다.
목호는 '목장 오랑캐'라는 뜻으로 원나라가 설치한 탐라 목장에 배속되어 말과 소를 사육하던 몽골사람들을 말한다. 흔히 '목호의 난'으로 불리는 이들의 저항은 삼별초의 난보다 훨씬 강력하게 전개되었던 바, 발단은 1374년 명나라가 고려에 탐라 말 2천 필의 징발을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목호들은 적국을 도울 수 없다는 이유로써 거부하고 고려 정부에 저항하였던 바, 결국 고려의 대군이 탐라를 원정하게 된다.
이 원정군을 이끈 사람이 유명한 최영 장군으로 공민왕은 그에게 고려의 정예병 2만 5605명을 내주었다. 최영은 이들을 314척의 배에 태워 탐라로 건너갔는데, 이와 같은 군세는 훗날의 요동정벌군(3만 8830명)과도 견줄만한 대군으로 당시 탐라 전체 인구와도 맞먹는 숫자였다. 이에 비해 탐라에는 이렇다 할 원의 군사가 없었으니 사서(史書)에 기록된 몽골군의 숫자는 기병 1,400~1,700 정도가 전부였다.
그 1,700명을 대적하러 정병 2만 5605명이 배를 타고 건너갔을 리는 없을 터, 이는 당시의 탐라인들이 몽골인의 편에 서서 싸웠다는 뜻이 된다. 당시 탐라인 가운데는 몽골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그중 몽골인 목호와 살았던 정씨 성의 미모의 여인은 남편이 전사한 뒤 고려 장수의 청혼을 거절하고 수절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추정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런데 왜 당시의 제주사람들은 몽골인을 도와 싸웠을까? 100년 간의 지배기간 동안 저들 몽골인과 두터운 정이라도 쌓였던 것일까? 물론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몽골인들이 피지배층인 탐라인들에게 관대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한 이유가 될 터, 이에 탐라인들은 고려민족임에도 원나라 편을 들어 싸우게 된 것이었다.
명월포(현 옹포 포구)에서 목호군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밝은오름, 검은데기오름, 어름비,(애월읍 어름리) 새별오름, 연래,(서귀포시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흥동)까지 이어졌지만 내용은 계속적인 후퇴였고, 결국은 서귀포 해안 범섬에서 끝이 난다. 이후의 한 기록(조선 태종조 제주판관 하담의 기록)은 "우리 동족도 아닌 것이 섞여 갑인년(1374)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 했지만, 사실 이것은 본질을 짚지 못한 말이다. 제주사람들이 고려정부보다 훨씬 관대한 정책을 펼친 목호들을 도운 것은 오히려 당연지사라 할만한 일이었기에.....
삼별초가 처음 제주도에 들어왔을 때 제주도민들은 수탈만 일삼는 고려관리에 대한 반감으로 삼별초를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삼별초군의 도래는 늑대가 내쫓기고 범이 들어온 격이었으니 성의 축성 및 각종 시설의 확충, 무기 및 선박의 제조, 군량미 조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충이 뒤따랐다. 오죽하면, 먹을 것이 없어 제 똥을 주워 먹었다는 말이 생겨났고, 제 똥을 먹으려고 돌아보니 남이 벌써 주워 먹었더라는 말까지도 전해진다.
김통정이 탐라에 들어온 뒤 제주의 민심은 삼별초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결국은 철저히 이반되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대제국 몽골에 항거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제주사람에게 있어 삼별초는 그저 가혹한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주에서 2년을 버틴 김통정의 삼별초군이 불과 3일 만에 소멸된 것은 허망하긴 하되 이상한 일은 못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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