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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귀포 강정마을 해군기지와 조선시대 화북 수전소
    탐라의 재발견 2021. 8. 9. 00:47

     

    10여 년 전, 좌파의 집단 광기가 서귀포를 뒤덮은 적이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미래에 대한 혜안으로써 제주도 해군기지를 입안하고 2007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기지를 착공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큰 암초에 부딪혔으니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일부 주민들과 외래세력들의 시위가 지속되었다. 그때 관광객의 호기심으로 강정마을 민가에 걸린 깃발과 시위대를 촬영하던 나는 '수상쩍은 자'가 되어 그들 시위대로부터 일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때를 더듬자면, 당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시위대의 대형 플래카드에 써 있던 '칼을 잡은 자는 모두 칼로 망하리라'는 성경 구절이었다.(마태복음 몇 장 몇 절이라는 출전도 달려 있었다) 그러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 플래카드 아래 사람들의 다분한 폭력성과(칼을 잡지는 않았지만) 시위대 사이로 보이는 몇몇 수녀님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나눠주던 '제주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문'이란 제목의 유인물도 기억에 남는다.

     

     

    2011년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제주군사기지 반대대책위원회 제공 사진

     

    그들의 주장 가운데는 "우리의 군사력 확충은 오히려 중국을 자극하게 된다"는 정치적 멘트로 있었지만,(다분히 사대주의적인) 시위의 요지는 '평화'였다. 평화로운 해변마을의 군사기지화가 싫다는 것으로써, 해군기지 건설로서 중국을 자극하지 말자는 주장도 어찌보면 평화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으니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불상사가 되풀이되다 결국은 원안이 축소된 '중소형 해군기지'로서 서로 간의 실리와 명분이 타협되었고, 2016년 2월 26일, 드디어 그 '중소형 해군기지'가 완공을 보게 되었다.

     

     

    완공된 서귀포 해군기지

     

    아무튼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는데, 그때의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이 얼마나 혜안이었는가는 지금 동지나해와 남지나해에서 군사력을 팽창시키며 해양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중국이 증명하고 있다. 당시 군당국이 주장하던 '이어도 방어 논리'(중국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어도 해양과학기지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현재 해군 작전사령부인 부산에서 이어도까지는 481km에 달하는데, 이는 중국의 287km보다 훨씬 긴 거리다. 그러나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불과 174km로 그 거리를 대폭 단축시킬 수 있다는 논리)도 지금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서귀포 해군기지의 다른 사진 / 위 사진보다는 규모가 커 보여 제법 있어 보이나 해군에서는 축소되어 완공된 기지에 대해 지금은 더욱 안타까워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 국립해양조사원 제공 사진
    이어도의 위치 / 국립해양조사원 자료
    중국이 아직 비척대던 2000년 초 전격 착공된 이어도 기지는 우리의 해양과학과 해양영토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금 이 같은 기지의 건설은 끔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림으로 보면 이어도 과학기지와 제주도 해군기지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중국은 EEZ가 이어도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마당이다.
    이지스함인 율곡이이함에서 한 승조원이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를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 / 경남신문 사진

     

    의외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에도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있었다. 물에서 싸우는 곳'이란 의미의 수전소(水戰所)가 그곳으로, 화북 조천 어등 애월 명월 열운 서귀 모슬 색 우포의 총 10개 수전소가 있었고, 그중 제주시 화북동에 있던 화북수전소(禾北水戰所)가 가장 컸다. 1653년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이곳에 판옥전선이 중부, 좌부, 우부에 각각 1척씩 배치되었고, 비상 양곡이 6석, 격군이 180명, 포를 쏘는 사포수가 87명이라고 설명돼 있다. 요즘으로 보자면 구축함 3척에 대대급 병력이 배치된 셈이다.

     

    무기고인 식파고에는 궁시(弓矢) 외에 각종 총통(玄字銃 6문, 宙字銃 10문, 勝字銃 8문, 화약 75근, 水鐵丸 9천개)도 구비돼 있었으나 1555년(명종 10) 6월 왜구에 의해 함락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이때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떼가 아니었으니 1543년 규슈(九州)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의 선원으로부터 구입한 서양의 철포(鐵砲, 조총)로써 일부 무장된 규슈 번국(蕃國)의 정규군이었다.(이들은 이후 제주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3일간의 격전 끝에 패배해 물러난다)

     

     

    화북진과 화북수전소의 위치

     

    화북수전소는 1678년 제주목사 최관에 의해 화북진으로 격을 높였다. 제주도의 최고 관방시설인 3성(제주, 정의, 대정) 9진 중의 하나로 포함되어진 것이다. 1702년(숙종 28)에 만들어진 유명한 화첩 <탐라순력도>에는 화북진이 '화북성조(禾北城操)'라는 제목으로 그려졌는데, 동문과 서문,(서문은 바다에 인접한다) 성 밖의 화북 봉수대(별도연대) 등이 표현되었다. 18세기 화북진의 현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이다.

     

     

    <탐라순력도> 화북성조

     

    성 안의 건물은 바다를 감시하는 망루인 망양정(望洋亭), 배의 입출항을 관리하던 영송정(迎送亭), 객사인 환풍정(喚風亭) 등이 그려져 있으며, 녹문(錄文)에 기록된 군사는 172명으로 과거 화북수전소 시절에 비해 많이 줄었음을 알 수 있다. 국방력 약화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화북진성은 둘레 187m의 타원형 형태로서 동서 120m, 남북 75m, 높이 3.5m 내외였는데, 지금 성벽은 잔존하나 당시의 시설은 전혀 살펴볼 길 없다. 화북진의 흔적은 1926년 일제가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며 완전히 사라졌고 현재는 청소년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화북진 성벽/보이는 집은 도내에서 운영하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이다.
    화북진 터
    화북진 터 푯돌
    화북진지에서 보이는 화북포구
    화북포구 터 푯돌 / 조천포구와 함께 조선시대 제주도의 대표적 포구로서 1737년(영조 13) 제주목사 김정이 개축했으며 추사 김정희와 면암 최익현 등이 이 포구를 통해 귀양왔다는 설명이 써 있다.
    화북포구 앞바다
    과거에는 이곳 포구에 비석거리가 있었고 포구 개축으로 인해 과로사한 김정 목사 등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거나 옮겨지거나 하여 남아 있는 게 없다.
    화북포구 해신사당 / 1820년(순조 20) 제주목사 한상묵이 건립하고 1849년(헌종 15) 제주목사 장인식이 '해신지위(海神之位)'라는 위패를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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