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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암 송시열과 제주도의 증주벽립
    탐라의 재발견 2021. 7. 12. 23:55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오백년을 대표하는 당쟁의 아이콘이자 사대(주의)의 아이콘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문제적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I' 등의 글을 통해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으며, 그가 살던 서울 흥덕동 숭교방에 새겨졌던 '증주벽립(曾朱壁立)' 글자를 '임오군란과 진령군​'이라는 섹션에서 조명하기도 하였다.

     

     

    명륜동 주택가의'증주벽립' 암벽. 오른쪽에 송시열의 집 터라고 명시한 안내문이 서 있다.  
    과거에는 이랬다.(증주벽립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지금은 이렇다. 

     

    '증주벽립(曾朱壁立)'은 중국의 증자와 주자의 뜻을 벽처럼 세워 그들처럼 살겠다는 각오를 자신의 살던 동네 바위에 각자(刻字)한 것인데, 놀랍게도 서울에서 보았던 그 글씨를 제주시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서울 명륜동 암벽(지금은 연립주택의 축대로써 글자만 덜렁하지만)에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름없는 글자로서, 제주읍성 안의 오현단(五賢壇)이라고 하는 유적지에서였다. 오현단은 제주로 부임했거나 유배 온 거유(巨儒) 5인을 기려 옛 귤림서원(橘林書院) 터에 조성된 제단인데, 그 다섯 명의 유학자 가운데서도 송시열은 돌출된다.

     

     

    제주 오현단의 '증주벽립' 글자  
    오현단 비석. 오현단에는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의 다섯 유학자를 모셨다. 

     

    신기해 알아보니 서울에 있던 글자를 탁본해 귤림서원에서 보관해 오던 것을 1856년(철종 7) 제주 목사 채동건과 판관 홍경섭이 서원의 서쪽 바위에 복각했다고 한다. 이후 대원군 때 귤림서원이 헐리며 글자만 남게 된 것인데, 그 외도 오현단에는 우암을 기린 흔적이 여러 개다. 

     

     

    오현단 송시열 유허비
    오현단 뒤에 귤림서원의 흉내만 낸 곳 있다.

     

    우암은 당시 사람치고는 꽤 장수를 한 편이어서 83세를 향유하며 인조에서 숙종까지의 네 임금을 모셨다. 그러면서 서인의 영수로서 우뚝 설 때까지 거꾸러졌다 복위되기를 반복하였으며, 유배가기 또한 이웃집 마실 가는 듯 빈번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유배를 간 것은 인생의 마지막 해인 83세 때로, 그것도 가장 먼 제주로로 정배되었는데, 그나마 풍랑으로 뱃길이 여의치 않자 해남 보길도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때 보길도 바닷가 바위에 새긴 '해중유감(海中有感)'이라는 시가 전한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

     

    여든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쫒겨난 이, 과연 힘들었겠구나(춘추시대 노나라 관료 류하혜의 고사) 

    북녘 대궐을 향해 머리 돌려보지만

    남녘 바다엔 바람만이 속절없고 

    담비가죽 옷 내리신 옛 은혜 생각하니

    외로운 충정에 눈물만이 흐르는도다

     

     

    시가 새겨진 보길도 바위/조선미디어 사진
    오현단에 건립된 시비
    우암 77세 때의 초상화(1683년). 효종이 하사한 털모자를 쓰고 있다.

     

    그가 제주도로 유배를 간 이유는 희빈 장씨(흔히 말하는 장희빈)가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을 원자로 정하는 것에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숙종 재위 14년 10월, 희빈 장씨가 왕자를 출생하자 숙종은 이듬해 정월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고 종묘에 고했는데 이에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극구 반대하였다. 결국 우암은 제주도로 정배되었고 그해 6월 다시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올라가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곧 천수(天壽)가 다할 늙은이를 사사(賜死)함도 드문 일이거니와,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는 죄인을 중도에 죽임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를 서인에 대한 남인의 정치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숙종으로서는 또 따따부따 떠들 우암을 다시 상면하기 싫었을 터,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함이 옳은 줄 아뢰오"라는 남인의 말을 옳다구나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우암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마땅히 의금부에서 소신을 밝히고 당당히 죽겠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기력의 쇠함을 느꼈는지, 혹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육지에 닿자마자 장문(長文)의 유서를 썼는데, 유서에서도 그가 외친 것은 주자(朱子)였다.

     

    주자는 음양(陰陽)·의리(義利)·백흑(白黑)을 판단하는 데 있어 용감하고도 엄격하기가 마치 한 칼로 두 조각을 내듯 하여 감히 조금도 의위(依違, 마음이 확정되지 않아 이럴까 저럴까 하는 것)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의 일이다.....

     

    나와 나의 주변은 모두가 그동안 주문(朱門; 주자의 문하)의 정법(正法)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아, 너희들은 힘써야 한다. 법도(法度)를 가까운 데서 보면 공(功)을 거두기가 쉬운 것이니, 너희들이 모름지기 가까이는 선덕(先德)을 지키고 멀리는 주문(朱門)을 본받는다면 나는 죽더라도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ㅎㅎ 이쯤 되면 할 말 없다) 

     

     

    송시열의 글씨. 제주도에 정배됐던 연고로 인해 국립제주박물관에 글씨가 전시돼 있다. 당대의 거유로 이름을 떨쳤지만 글씨는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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