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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성을 점령한 이재수와 난의 결말
    탐라의 재발견 2021. 7. 6. 23:15

     

    드디어 장두 이재수는 1901년 5월 15일, 대정고을과 인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대정읍성을 나와 제주성을 향해 출정했는데, 그에 앞서 강우백이 이끄는 무장봉기군의 동진(東鎭)이 먼저 성문을 나섰다. 이재수가 이끄는 서진(西鎭)의 공격 루트인 명월진성을 거쳐 제주성에 들어가는 코스보다 정의현(旌義縣)을 거쳐 제주성에 이르는 코스가 훨씬 길었으므로 강우백이 먼저 출정을 한 것이었다. 

     

    그 동·서 두 진은 중간에 들른 고을에서 모두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미 제주 전체가 남징(濫徵)과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마당이었으니 봉기군이 환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러면서 고을 장정들이 봉기군에 합류하였던 바, 동·서 두 진이 제주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처음의 배(培)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수에 겁을 먹었음인지 앞서 대정현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던 한림읍 명월진(明月鎭) 성조차 아무런 저항이 없이 입성할 수 있었다. 5월 16일, 이재수는 제주성 공격에 앞서 황사평 너른 들에 진을 쳤다.

     

     

    이재수가 진을 친 황사평

     

    그다음 날, 동진의 강우백이 정의현 성을 점령하고 제주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이재수는 곧 황사평을 출발, 제주성으로 가 강우백과 함께 성을 포위하였다. 이어 성안으로의 모든 물자 반입을 차단시키고, 항구를 장악해 육지에서 오는 모든 물자의 상륙까지 막았다. 성 안의 천주교도들도 이에 대응하였으니 제주목 군기고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성 위에 화포를 장착해 선제 발포하였다. 그러자 봉기군 역시 응사하였던 바, 곧 요란한 총격전이 펼쳐졌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자 성 안에서 먼저 초조함을 보였다. 봉기군이 물자의 반입을 막은 탓에 양곡과 땔감이 딸리기 시작한 것인데, 그러자 5월 23일 제주군수 김창수가 나서 봉기군과 천주교도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다. 김창수는 마르셀 라루크(구마슬) 신부를 구슬려 앞서 명월진성에서 붙잡힌 장두 오대현을 건네받고는 그를 봉기군에게 넘겨주며 포위를 풀고 휴전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재수는 이 제의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오히려 풀려난 오대현을 서진의 대장으로 삼아 더욱 제주성을 압박하고 나섰다.

     

     

    제주성 동문지 부근 전경
    동문지 부근의 제이각(制夷閣). 이 누각은 제주성 침략이 잦던 왜구를 방비하기 위해 세운 누각으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에서 연유되었을 듯하다. 그런데 왜 하필 제이각일까? 제주도 사람도 오랑캐로 여겼던 것일까?
    제이각에서 본 제주성
    남수각은 1599년(선조 32) 제이각과 함께 건립된 유서 깊은 건물이나 1927년 대홍수 때 남수문과 함께 무너진 후 복원되지 않았다.
    제주성의 수문인 남수문과 남수각이 있던 자리

     

    이재수는 낮에는 제주성에 방포하고 밤이면 성 안 사람들에게 고함을 질러 항복을 종용하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식의 공격을 병행하였다. 이 방법은 주효하였으니 성 안의 비(非)천주교인들은 관덕정 광장에 모여 당장 성문을 열어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라루크 신부(왼쪽 사진)가 한 가지 꾀를 냈다. 저들도 지쳐 돌아갈 수 있으니 사흘간만 기다려보고 그래도 돌아가지 않으면 성문을 열겠다는 것이었는데, 실은 이미 조선인 천주교도 장윤성을 육지로 보내 인천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선의 제주 공격을 사주해 놓은 상태였었다. 그는 사흘이면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리라 기대하고 그와 같은 약속을 한 것이었고, 이에 관덕정 광장에 모였던 주민들도 해산을 했다. 

     

     

    하지만 라루크의 기대와 달리 사흘이 지나서도 함대는 도착하지 않았던 바, 부녀자가 앞장선 제주주민들이 성 위로 올라가 방어 중인 천주교도들을 닦아세웠다. 그리고 한 무리는 또 성문으로 몰려가 3개 성문의 빗장을 끄르니 봉기군들이 기다렸다는 듯 공포를 쏘아대며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5월 28일 아침녘이었다. 라루크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들은 도망갈 새도 없었는데, 다행히 정의군수 김희주의 도움으로 관아의 귤림당(橘林堂/목사의 휴식처)에 숨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곧이어 이재수가 서문으로, 오대현과 강우백이 남문과 동문으로 입성했다.

     

     

    봉기군에 의해 접수된 제주관아
    제주관아 내삼문
    절제사(목사가 겸한 군직)의 영리청(營吏廳)인 홍화각 전경
    홍화각 현판. 1437년(세종 17)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판으로 알려져 있다.
    귤림당(오른쪽)과 망경루

     

    장두 이재수는 관아 앞 관덕정(觀德亭)에 정좌했다. 이어 성내의 천주교인들을 남김없이 붙잡아들일 것을 명령하고 그들의 민폐 여부를 낱낱이 따졌다. 그 결과 5월 28일과 29일 양일 간 죄질이 중한 자 300여 명이 피살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봉세관 강봉헌 밑에서 실무를 맡았던 천주교도 악질 징세관 최형순과, 미처 도망가지 못한  신부 1명도 포함되었다. 난이 끝난 후 작성된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 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을 보면 이때 처형된 자는 총 317명으로 이중 천주교도가 309명이었다)

     

     

    군사 훈련장의 전각인 관덕정
    뒤뜰에는 따로 선덕대라는 누대가 설치되었으나 제주도에서 덕치(德治)가 이루어진 적은 별로 없다.
    천주교인 300명이 죽은 관덕정 뜰. 아래는 5월 31일 제주에 입성한 프랑스 해군장교가 찍은 사진이다.

     

    라루크 신부가 기다리던 프랑스 함선은 5월 31일에 이르러 제주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두 척의 군함은 난의 향배를 바꾸었는데 프랑스 군의 개입보다는 그 배에 함께 타고온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의 역할이 컸다. 이재호는 난의 진입을 목적으로 함께 온 강화진위대 소속 조선군 1백여 명의 호위를 받았으나 진위대의 무력행사를 극도로 자제시켰다. 상황은 뜻밖에도 매우 복잡한 지경으로 흐르게 될는지도 모르는 지경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바, 배에는 궁내부 고문인 미국인 샌드도 동행하였고, 프랑스 군함의 뒤를 따라 일본 군함 제원호(濟遠號)도 제주 바다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그중 가장 설친 것은 당연히 프랑스 해군이었다. 프랑스 해군은 천주교도를 학살한 봉기군에 대한 복수로 천주교도를 제외한 나머지 제주도민을 깡그리 죽이겠다고 을러댔고, 또 정말로 행동에 옮길 기세였으나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의 만류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이재수는 프랑스 군과 한판 싸움이 불가피하다 여겨 다시 민군을 모으고 전열을 정비했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재호는 배상금 지불과 난의 주동자를 잡아 처형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함으로써 프랑스 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조정에서는 다시 강화진위대 1백명과 수원진위대 2백명을 제주로 추가 파견시켰다.

     

    그러는 동안 찰리사(察理使) 황기연이 제주에 도착했다. 고종 황제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황기연은 도착 즉시 천주교의 폐해와 세폐를 바로잡겠다는 황제 명의의 방을 걸어 백성들을 진무시켰다. 그리고 장두 이재수를 효유하니, 이재수는 "봉세관 강봉헌을 처벌할 것과 제주도 내의 교회당을 없앨 것, 민란에 참여한 백성들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걸고 봉기군 1만 명을 해산시킨 후 투항했다. 

     

    이어 강우백과 오대현도 투항했고, 7월 18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평리원(平理院) 재판을 거쳐 10월 9일 한성 전옥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때 장두 이재수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봉세관과 천주교인들이 제주 백성들을 심히 괴롭혔던 바, 이들을 어찌 역적이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처단한 것은 그와 같은 역적이지 죄 없는 양민이 아니다. 까닭에 나는 정당하며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이재수가 반드시 처벌해달라 했던 봉세관 강봉헌은 한성 압송 뒤 석방되어 고향인 평안도로 낙향했는데, 차후 무죄방면이 부당하다는 여론에 따라 재압송의 명령이 내려졌다. 강봉헌은 이 소식을 듣고 줄행랑을 놓았으나 끝내 종적이 묘연했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한국 정부에 천주교도 피해에 대한 배상금 5,160원과, 제주성에서 죽은 천주교인의 유택(幽宅)을 요구했다. 이 배상금은 3년 뒤인 1904년(광무 8) 제주도민에게 걷어들인 세금으로써 탕감하고, 유택은 이재수가 진을 쳤던 황사평에 부지를 마련해 주었던 바, 지금도 황사평 성지(聖地)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천주교인은 황사평을 이렇게 말한다.
    황사평 성지 신축교란 순교자 묘역 전경. 그런데 이곳이 과연 성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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