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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4.3사건의 현장을 가다 - 우리가 몰랐던 4.3
    탐라의 재발견 2021. 7. 8. 05:07

     

    해방 후의 좌·우 대립은 지금의 좌·우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으니 좌·우가 해방기념행사조차 따로 열 지경이었다. 비극의 4.3사건은 1947년 개최된 3.1절 기념행사 행렬이 미(美) 군정청과 경찰서가 설치된 관덕정 앞을 지날 때, 군중들의 일부가 좌경 구호를 외치자 이에 과잉 반응한 경찰이 군중들에 발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 최초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3.1절 행사 때 어린이를 밟고 지나간 기마경찰에 항의하는 군중에 대한 경찰의 발포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그 어린이를 밟게 된 이유가 좌경 구호를 외치며 공격한 일부 군중에 말이 놀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4.3은 그 발생 원인부터 좌·우의 주장이 다르다.

     

     

    4.3사건이 시작된 관덕정

     

    이 같은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들도 있었다. 이에 당연히 민심이 들끓었는데, 남로당은 이런 분위기를 조직적 파업으로 연계시켰다. 그리하여 1947년 3월 9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였으니 대부분의 행정기관이 포함된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기타 우체국 및 공공회사가 파업에 참여하였다.

     

    이 파업은 제주 직장인 95%가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으로 번졌고 미군정은 강경대응했다. 그리하여 한 달 만에 경찰 및 (육지에서 파견된) 서북청년단에 의해 500명이 체포되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는데, 이듬해 3월, 체포된 제주 청년 3명이 고문과 구타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꺼져가던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으니 제주도는 다시 폭발 직전의 용광로로 변했다. 미군정에 반대하는 게릴라 단체인 조선인민유격대가 결성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남로당과 조선인민유격대는 1948년 미군정에 의해 확정된 남한 단독 총선거인 이른바 5.10선거를 극렬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외쳤다. 그러면서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던 바, 1948년 4월 3일 새벽, 350명의 무장대가 경찰 지서 12개소와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경찰과 우익단체 또한 강경히 맞서 결국 양측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3사건'이란 명칭은 그 4월 3일의 날짜에서 비롯되었다. 

     

    이렇듯 사건이 커지자  미군정청은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9연대에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9연대장 김익렬은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바, 4월 28일, 무장대 사령관인 김달삼과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의 구억국민학교에서 만나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중요 내용은 '72시간 내에 전투 중지'와 '무장단의 무장 해제와 하산(下山)이 이루어질 경우 일절 책임을 묻지 않는다'였다. 가히 역사적인 '4.28 평화협정'이었다.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 1921년 경남  하동 출생.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 1947년 9월 제7여단 제9연대 부연대장(소령)으로 제주에 부임했다.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 1923년 제주 출생.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며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다가 4.3 사건 발생 후 빨치산 대장이 되었다.  
    '4.28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고 알려진 구억국민학교 터. 학교는 폐교되고 이후 그 자리에 옹기체험관이 들어섰으나 이 또한 몇 개월 전 문을 닫았다. 
    김익렬은 알려진 바와 달리 협상이 구억국민학교 뒷편의 민가에서 이루어졌다고 회고했던 바, 과거 민가가 있었다는 구억국민학교 터 뒷편도 찾아보았다. 
    '4.28 평화협정' 장소라고 전하는 부근의 또 다른 곳
    '4.28 평화협정'을 그린 연극 '협상 1948'. 김익렬은 이 장소에 모슬포 부대로부터 부하 장교 1명만을 데리고 왔으며, 김달삼은 은거지인 한수기오름에서 빨치산 1명과 민간인 길 안내인 1명만을 동행했다. 

     

    '4.28 평화협정'은 두 명의 20대 청년이 목숨을 걸고 벌인 뜨거웠던 애국애족 정신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평화협정은 사흘 뒤에 발생한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우익청년 단체가 저지른 이 방화 사건을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지른 불로 단정했고, 5월 5일 제주시에서 열린 미군정의 수뇌부가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경무부장 조병옥은 좌익 무장단에 대한 강경진압을 결정했다. 선무 귀순을 주장하던 김익렬은 이에 반대해 조병옥과 몸싸움까지 벌었으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것이 4.3 학살의 서막이었다.

     

    김익렬은 이에 대해 훗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 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 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민족적 양심에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 기록이 세상에 발표될 때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 이 글이 빛을 보게 될지 모르지만, 이 국토에 여하한 형태의 정부가 서든, 여하한 정당이 영도하는 정권이 서든, 한국민족의 정부라면 이들로 하여금 역사의 비판을 받게 하여 이 국토에 다시는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후손들에게 유언한다.(김익렬 유고 <4·3의 진실> 중에서)

     

    이후 치러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가부를 묻는 5.10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자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고, 이에 자극받은 이승만 정권은 그해 10월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신설하고 본토의 병력을 증파한 후 대대적인 빨갱이 토벌 작전에 나섰다. 그리하여 1948년 11월부터 제주도 중산간 마을 중 빨치산의 은거지로 쓰일 만한 곳은 모조리 불태워졌던 바, 마을 95%가 사라지고 항거하는 많은 사람이 살상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였으니 1950년 발발한 6.25전쟁과 맞물리며 극대화됐고, 1954년 9월 21일 공식적으로 진압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무려 14,442명의 희생자가 나왔다.(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을 비롯한 민간인 희생자는 최대 25,000~80,000 명으로 추정됨/진압군은 1,091명이 사망하였고 1,500~4,000명 규모의 무장대는 전멸하였음ㅡ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  

     

    1954년 9월 21일까지, 학살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좌와 우도 묻지 않고 마구잡이로 이루어졌으니 이로 인해 없어진 동리도 부지기수이며, 제주시 노형동처럼 아예 사라졌다가 사람들이 모여들며 번화가로 변모된 곳도 있다. 그래서 제주 4.3은 어느 장소를 특정하기조차 송구할 지경인데, 내가 전에 잠시 살았던 서귀포시 안덕면의 '무등이왓'과 성산포 광치기 해변 '터진목' 중의 하나를 고르다 광치기 해변에 주둔했던 서북청년단 홍종만 씨*의 증언을 들은 기억이 나 후자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 해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새긴 돌이 뉘여 있다.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마음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떪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있다. 초록과 검정, 섬의 우수, 우리는 동쪽 끝 성산일출봉 즉 ‘새벽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바위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 검은 절벽이다. 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첫 해돋이의 마술적인 광경에 참석하러 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1948년 9월 25일(음력)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여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이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새벽의 노르스함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4월 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 1)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가족과 함께 바다 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숙청 때 아버지와 삼촌을 잃은 시인 강중훈 씨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그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 그의 시 한편이 그 9월 25일의 끔찍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 그것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다.

     

     ㅡ 유럽 최대 잡지 <GEO> 2009년 3월호에 게재된 "제주 기행문" 중에서. 르 클레지오.(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프랑스 작가)  

     

    * 홍종만은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국가대표 빙상선수 출신의 서북청년단 간부 단원이었다. 그는 훗날 김구 선생의 암살에도 관여해 KCIC(중앙정보부의 전신)가 제공한 권총으로 북한산에서 사격연습을 한 사실을 <동아일보>에 폭로하기도 했다.  

     

     

    광치기 해변의 일출봉과 르 클레지오의 글이 써 있는 돌
    4.3 추모공원의 '성산읍 희생자 위령비'와 성금기탁자를 새긴 돌
    성산 '터진목' 유적지 푯말과 푯돌
     푯돌에 써 있는 글 
    반대로 무장폭도들에 의해 희생된 경찰관을 위한 추모 푯돌들도 볼 수 있다. 위는 성산지서, 아래는 외도지서 추모 표지석이다.
    그래도 해는 떠오르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인디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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