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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제주 유배지를 가다탐라의 재발견 2021. 7. 9. 22:32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이 비범한 군주였다는 사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I' 등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시류(時流)에 역행한 그것이 죄가 되어 인조반정(1623년 3월 13일)으로 왕위를 찬탈당하고 폐위된다. 그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고, 다시 강화 교동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 혹시라도 청나라가 폐주를 복위시킬까 두려워한 조정에 의해 멀리 제주도로 보내진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의하면 광해군은 1637년 6월 16일, 사중사(事中使), 별장, 내관, 대전별감 등의 압송 하에 제주도 어등포(지금의 행원리 포구)로 들어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유배 지역을 대외비에 부쳤던 바, 광해군은 자신이 가는 곳을 알지 못했고, 배의 사방을 가려 밖을 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비밀리에 이송되었다.
배가 어등포 포구에 닿고서야 호송 책임자 이원로(李元老)가 제주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광해는 깜짝 놀랐는데,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배 안에서 자기편이 모두 적으로 돌변함)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냐?"고 묻자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광해군 포구에서 일박한 후 다음날 제주목으로 이거되었다.
광해군은 제주읍성 남문 밖 근방의 적소지에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울타리 안에 가둠)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광해군은 자신을 지키는 병졸들보다 험한 데서 자야 했으며,(속오군 30명이 번갈아가며 숙직했다) 하찮은 늙은 관비(官婢)에게까지 천대를 받았다. 1638년(인조16년) 심연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인조가 여름과 겨울에 각각 의복을 보내주었다 하는데, 그게 위안이 되었을까? 그나마 다행스럽게 1640년(인조 18)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李時昉)으로부터는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시방은 인조반정의 1등공신 이귀(李貴)의 아들이었으니 광해군과는 악연인 사람이었다.(☞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 이시방 본인도 아버지 이귀의 권유로 반정에 가담하였던 바, 2등 공신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며 출세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인 인조의 구원에 소홀했다는 죄로 난리 후 유배되었다가 당해(1640년) 사면되어 제주목사로 부임한 경우였으니 후금(後金)과의 전쟁을 피하려 애썼던 광해군의 혜안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로 인해 이 지경이 된 상대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음직했다.
그렇다고 위리안치를 벗어나지는 못했으니 죽을 때까지 엄중히 격리되었는데, 그렇게 심한 경우는 연산군 이래로 처음이었다. 유배된지 4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 음력 7월 1일, 광해군은 적소지에서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인조는 예조참의를 제주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시신을 옮기도록 했으며, 제주목사 이시방과 제주도민들은 조정의 예관(禮官)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護喪)하였다. 이시방에 의해 흰 적삼으로 염습된 유해는 호송책임자 채유후(蔡裕後)에 의해 8월 18일 화북포구에서 출항돼 상경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공빈 김씨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이 받아들여져 남양주 금곡에 있는 성묘(成墓) 가까운 곳에 묘소가 마련되었다.(공빈 김씨는 후궁인 탓에 남편인 선조를 따라 동구릉에 가지 못하고 남양주에 묘소가 마련됐는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릉 못지않게 꾸며져 성릉으로 불리었다. 성릉은 광해군이 폐위되며 다시 성묘로 강등되었지만 아들 광해군의 묘소보다 훨씬 왕릉답다) 광해군의 유해는 9월 10일 양주에 도착하여 10월 4일 연산군의 예(例)로 장례가 치러진 후 입관되었다.
광해군은 제주 유배시절 하찮은 관비에게 영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천대받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은 속내는 언제나 나라 걱정으로 가득했던 듯, <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風吹飛雨過城頭
瘴氣薰陰百尺樓
滄海怒濤來薄幕
碧山秘色帶淸秋
歸心厭見王孫草
客夢頻驚帝子洲故國存亡消息斷
烟波江上臥孤舟
비바람 흩뿌리는 성문 앞을 지나는데
음산한 기운 풍기는 백 척 누각이 보이네.
푸른 바다 성난 파도치는 가운데 날은 어스름 기울고
푸른 산은 슬픈 빛으로 싸늘한 가을 기운 머금는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왕손초를 지겹도록 쳐다보다
나그네는 먼 제주에서 놀라 꿈을 깨는구나.
고국의 존망에 관해서는 소식조차 끊기고
운무 피어나는 강 위 외딴 배에 눕는다.
<인조실록>에는 이 시를 듣는 자들이 모두 비감에 젖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광해군의 적소터는 찾기도 힘들뿐더러 이 시가 적힌 길가 벽은 초라함을 넘어 방금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롭다. (※ 실제로 그 옆 벽은 무너져 시가 적힌 벽과 함께 보수되었는데, 반면 루소의 풍경화 같다 했던 적소지는 완전 쓰레기 장이 되었다)
앞서 '삼전도비에 관한 불편한 진실'에서도 언급했지만,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이괄의 난과, 그로부터 이어진 정묘호란,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진 병자호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아울러 한민족 최대 치욕 중의 하나인 삼전도의 비극도 당연히 없었을 것인데, 그와 같은 비극을 막고자 애썼던 영주(英主)는 혼주(昏主)로 불리며 유배의 흔적조차 어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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