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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의 기독교와 이재수의 난
    탐라의 재발견 2021. 7. 4. 21:56

     

    "이재수의 난이요? 말은 많이 들어마씨....."

    지난 50년 간 묻혀 있던 제주 4.3사건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진상 규명에 힘쓰며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 이재수의 난은 제주 토박이들도 잘 알지 못한다. 민중봉기까지는 알아도 누구와 싸웠는지 그 상대는 또 모른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재수의 난은 그 성격을 규정하기부터 쉽지 않다. 이재수가 이끈 제주 사람들의 민란임에는 분명해 보이나 그들의 주적(主敵)은 누구였는지 불분명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언뜻 생각하는 것은 제주도민의 등골 빼먹은 탐관오리이겠으나, 그 난이 발발한 대정읍성 언저리 '제주 대정삼의사 비'(濟州大靜三義士碑)에 쓰여 있는 내용은 사뭇 다르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난의 발생지 대정읍에 아래의 옛 비를 대신해 새로 만들어진 '대정 삼의사비'다. 이재수의 난에 희생된 오대현, 이재수, 강우백의 의로운 투쟁 정신을 기려 세운 비로서, 마을사람이 성금을 십시일반해 세운 까닭인지 글자체가 허접한데 공교롭게도 바로 뒤에는 명필 김정희의 기념관이 서 있다. 아무튼 '이재수의 난'의 비석답게 글씨부터 민중(?)스럽다. 1994년 4월 20일 대정고을 청년회가 건립했다.
    뒷면에는 윗 글이 유려하지는 않지만 장려하게 이어진다.
    '대정삼의사비'의 옛 비 / 이재수의 난은 반추되기를 두려워 하다 사건 발생 60주년인 1961년에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이 비를 세웠다.
    대정고을 읍성과 삼의사 비

     

    * 황사영백서사건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베이징에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편지를 써 1801년(순조 1)에 있었던 신유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한 사건이나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 

     

     

    황사영백서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로서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801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 내용은

    100.daum.net

     

     

    이재수의 난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이라 하여 제주민란, 혹은 신축년(1901)에 일어났다 하여 신축민란이라고도 불리나, 천주교에서는 제주교란(濟州敎亂)이나 신축교란(辛丑敎亂)으로 부른다. 이 난이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순이 삼촌'으로 제주 4.3 사건을 처음 부각시킨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은 1980년대 초 <마당>이라는 잡지에 '변방에 우짖는 새'를 연재하며 이재수의 난을 세상에 알렸는데, 그는 자신이 이 소설을 쓴 이유를 '민란이 있게 한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병리현상을 찾아내고 그것을 국사의 문맥에서 파악해보려는 의도'라고 했다.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와 영화 '이재수의 난'

     

    그렇다면 그때의 정치적, 사회적 병리현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당연히 학정(虐政)과 가혹한 징세로, 워낙에 뿌리 깊던 제주도민에의 가렴주구는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더욱 극성을 부렸다. 게다가 여기에 치외법권을 권리를 쥔 제주도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조선인 서학교도(천주교 무리)들 마저도 가렴주구에 동참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예(例)를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제주도에서만 발생했던 상황을 축약하면,

     

    고종은 1897년 근대적 개혁을 표방한 광무개혁을 실시하며 지방 재정도 전부 중앙에서 걷어드리는 일원화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그동안 지방 수령과 향리가 징수하던 세금을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봉세관(捧稅官)에게 일임시켰는데, 그러면서 세금이 3배가 뛰었다. 이에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던 민포(民布)가 다시 징수됐고, 집과 나무, 목장과 가축, 어장과 어망, 소금과 노위(벼과의 작물), 심지어 황무지와 잡초에까지 과세 대상이 되었다. 

     

     

    봉세관 관인(국립제주박물관) / 봉세관의 가혹한 징세에 천주교인들이 동원되어 이재수의 난이 발발했다고 설명돼 있다.

     

    그 지나친 징세에 제주목사도 놀랄 지경이었지만 당시 왕실에서 직파된 봉세관 강봉헌(姜奉憲)의 위세에 눌려 과세에 있어서는 아무런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끔찍했던 건 강봉헌이 채용한 징수관들의 행패였으니,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또 하나의 과도기적 상황을 보고 가야 한다. 

     

    당시 서양세력에 의지하는 바 컸던 고종은 1886년 한·불 수호조약 이후 1896년 따로 교민조약(敎民條約)을 체결하며 프랑스 신부들에게 치외법권과 선교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몸소 "여아대(如我對, 짐을 대하듯이 하라)"라는 패를 지급하였는데, 이 여야대 패는 마패보다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하여 제주목사마저 발아래에 두었다. 이와 같은 호조건이 마련되자 프랑스 신부들은 제주도에서 자유로운 포교활동을 벌이게 되었고 자연히 천주교인에게 특혜가 따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 특혜를 업으려는 사람들이 천주교당으로 몰려들었는데, 1899년 프랑스 신부 페네(Peynet)와 보좌관 김원영(아구스티노/사진) 신부가 제주읍에서 포교를 시작한 이래 2년 만에 영세신자 292명, 예비신자 1000여 명이라는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그들은 프랑스 신부의 비호 아래 세금과 소송 등에서 여러 특혜를 누렸으니 1900년 건강상의 이유로 전출된 페네를 대신하여 온 프랑스 파리 외방전도회 소속의 마르셀 라루크(Marcel Lacrouts/한국명 구마슬) 신부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해져 죄를 지어 감옥에 간 자마저 방면되었다. 이유는 오직 천주교도라는 것뿐이었다.  

     

     

    1899년 4월 22일 건립된 제주 최초 천주교당의 기념표석
    1930년 이후 위의 자리에 건립된 제주 중앙 주교좌 성당

     

    그렇게 입교한 자 가운데는 평소 놀기 좋아하던 건달들이 태반이었다. 문제는 그 건들거리는 건달들에게 봉세관 강봉헌이 이용 가치를 느꼈다는 것이었으니, 그들을 세금 걷는 마름으로 채용하였다. 졸지에 세리(稅吏)가 된 그들 불량 천주교도들은 그 위세를 남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바, 빠른 시간 내에 제주도 전체가 무법천지가 되어 버렸다. 1901년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찰리사(察理使) 황기연의 보고서 <교폐사실성책(敎弊査實成冊)>에서 밝힌 그자들의 중요 악행은 다음과 같았다.

     

    ㅡ. 개인적 복수를 위한 폭행과 살인이 자행되었고, 그와 같은 사형(私刑) 및 부녀자 강간 및 강탈,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질러도 관가에서 체포하지 못했다.

     

    ㅡ. 교도들을 비방하거나 언쟁을 벌이면 "천주교를 모독했다"며 성당에 끌어다가 매를 치거나 가두고, 관에서 체포한 사람을 천주교도라고 하여 도중에 빼돌리거나 관가의 감옥에 갇힌 사람을 강권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ㅡ. 천주교도들은 감옥과 형구를 멋대로 갖추어 놓고 백성들을 끌어다가 매를 치기도 하고 가두기도 했다.

     

    ㅡ. 천주교도가 체포되면 관헌을 윽박질러 빼내거나 옥에 갇힌 죄인도 강권으로 석방시켰다.

     

    ㅡ. 천주교도들은 제멋대로 땅을 빼앗고, 교도들이 이미 팔았던 땅을 되 사들일 때 시세가 올랐음에도 예전 시세만 치르고 우격다짐으로 빼앗는 것도 다반사였다.

     

    ㅡ. 마을의 오래된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우상숭배라 하여) 파괴하며 토속신앙을 해쳤다. 

     

     

    <교폐사실성책(敎弊査實成冊)>

     

    이에 비례해 도민들은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깊어 갔고, 반감을 넘어 현실적인 고통이 되자 마침내 제주도민들이 꿈틀댔다. 그리하여 상무사(商務社)라고 하는 일종의 자경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으니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이 대표를 맡고, 이성교, 송희수, 오대현, 강우백, 강백, 강철호 등이 위원이 되었으며 많은 주민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경단과 천주교도들의 첫 충돌이 곧 발생했다.

     

    1901년 2월, 김원영 신부를 필두로 오달현, 오창우 이하 40명의 천주교도들이 대정군의 유지이자 훈장이던 현유순의 집을 습격해 주민들을 붙잡아 갔다. 서귀포 천주교 본당 건립을 반대하는 등 평소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현유순과 그 아버지 현규석, 대정향교 장의(掌議) 오신락을 본보기로 잡아간 것이었다. 천주교도들은 그들을 서귀포 한논에 있는 천주교 본당에 가두고 린치하였고, 이 과정에서 노인인 오신락이 절명하였다. 천주교인들은 그 시신을 보란 듯 교당 앞 감나무에 매달았다.

     

     

    영화 '이재수의 난' 중에서

     

    천주교도들은 오신락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고 했고, 현유순과 현규석은 천주교도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아 죽었다고 하여 증언이 엇갈렸다. 그러자 대정군수 채구석이 검시관으로 채택되었다. 시신을 벌겨 벗겨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조사고 검시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채구석이 관노 이재수를 데리고 서귀포에 도착했을 때 천주교도들은 모두 교당 안에 숨어 버렸기에 채구석과 이재수는 처참한 몰골의 오신락의 시신만을 확인하고 돌아와야 했다.

     

     

    서귀포시 호근동의 하논성당 터 / 1900년 6월 12일 김원영이 서귀포 한논에 성당을 세우며 이 지역 선교가 본격화 됐다. 성당은 이재수의 난으로 문을 닫고 1902년 서흥동으로 이전했다.
    대정향교에 걸렸던 현판(제주 추사관) /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인 1864년 쓴 것이다.

     

    이후 대정군의 분위기가 아연 긴장되었다. 주민들은 드디어 자신들에게도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통문을 돌려 무도한 천주교도들에게 대항하자고 독려하는데, 4월 29일에는 다시 대정군 신평리 송희수의 집이 습격당했다. 송희수는 상무사 위원이었던 바, 그를 이번 일의 주모자로 여겨 본때를 보일 심산이었다. 천주교도들은 송희수의 상추를 말꼬리에 꿰 끌고 가려했으나, 때맞춰 몰려나온 신평리 주민들 덕분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이쯤 되자 상무사 쪽도 참을 수 없었다. 이에 상무사 위원 강우백, 강희봉, 마찬삼 그리고 향장 오대현 등은 5월 6일 대정의 천주교당을 습격, 교당을 부수고 교인 몇 명을 폭행했다. 이어 이들은 천주교를 성토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였으니 이른바 신축민란의 시작이었다. 이상의 사건은 김원영 신부를 통해 마리 뮈텔(Marie Mutel/한국명 민덕효) 주교에게 보고되었고 뮈텔을 통해 다시 한성 주재 프랑스 공사에 보고되었다. 프랑스 공사 콜랭 드 쁠랑시는 당연히 한국정부에 강력 항의하였다. 

     

    민중대회에서 대정마을 사람들은 봉세관 강봉헌이 천주교도와 결탁해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는 사실을 제주성의 목사에게 알리고 다시는 이런 피해가 없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오대현을 장두(지휘자)로 뽑았다. 민중대회의 개최 소식을 들은 강봉헌은 위협을 느끼고 마침 제주에 정박 중인 화륜선을 얻어 타고 한성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상황이 전투적으로 전개되지 않았고, 오대현 역시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바, 대정군수 채구석에게 판결을 맡겼다.

     

    위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힘없는 군수 채구석은 천주교도 김옥돌을 태형 30대를 때려 가두고, 교인들의 항의를 무마하려 오대현도 태형 15대로 다스린 후 석방하였다. 그렇지만 천주교들은 이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교인 50여 명이 몰려와 채구석에게 항의하고 제멋대로 옥문을 열어 김옥돌을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상무사에 소속된 마을사람까지 제멋대로 잡아갔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충돌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이 교인들을 포위해 붙잡혀가던 상무사회원을 구해내고 교인들의 우두머리인 김옥돌과 김진사 두 놈을 죽지 않을 정도로 패준 것이었다.

     

     

    대정읍성 남문지의 성벽
    대정읍성 북문지의 옹성
    대정읍성 안내문
    대정 삼의사 비와 동문지 돌하르방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대정현 돌하르방은 원래 이렇듯 투박하며 친화적인 모양새였다.

     

    이후 대정고을 사람들은 장두 오대현을 필두로 제주성을 향해 몰려갔다. 그러자 이를 천주교를 타도를 위한 봉기로 여긴 제주 천주교회는 라크루와 무세(한국명 문제만) 신부를 필두로 총칼로 무장한 교도 3백 명이 명월진(明月鎭) 성에 진을 쳤다. 그리고는 접근한 대정고을 사람들에게 해산을 요구하며 위협사격을 가했다.(최초의 발포자는 라크루 신부였다) 때는 1901년 5월 14일 밤으로, 이에 놀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사이 교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오대현 외 5명을 납치해버렸다. 

     

     

    제주 9진 중 가장 철옹성이었다는 한림읍 명월진성
    대정읍과 한림읍의 위치

     

    교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았으니 도망가는 고을사람들을 쫓아 대정군까지 몰려와 주민들을 위협했는데, 이때 이들을 막아서던 신평리 주민 김봉년이 총을 맞아 즉사했다. 이렇듯 장두 오대현이 잡혀가고 고을사람들은 크게 겁을 먹게 되었던 바, 소동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곧 끝이 날 듯 보였다. 바로 그때 대정군의 관노 이재수가 분연히 나섰다. 비록 관노였으나 정의감과 신의를 인정받던 이재수였던 바, 강우백, 조사생, 오대헌(오대현의 형) 등은 그를 새로운 장두로 추대함에 주저함이 없었으며 군수인 채구석조차 그를 지지했다. 

     

    이재수는 비무장 상태의 주민에게까지 총을 쏘는 잔혹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복수와 악질 봉세관의 타도를 천명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온건한 방식으로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투쟁 방식을 강경 무장투쟁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대정고을 각 마을에 격문을 돌리고 장정들을 모집한 결과 불과 이틀 만에 수천 명에 이르는 장정들이 대정읍성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가운데는 총포를 지닌 포수 출신도 40여 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난은 전혀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게 된 것이었다. 

     

     

    영화 '이재수의 난' 중에서
    1702년(숙종 28) 작성된 <탐라순력도>의 대정고을
    대정고을에서 본 산방산. 이재수나 그에 앞서 난을 일으킨 방성칠은 이 산방산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일 터이다.

     

     * '제주성을 점령한 이재수와 난의 결말'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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