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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등대와 도대불탐라의 재발견 2021. 9. 8. 07:10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등대가 생긴 곳은 1903년 6월 점등한 소월미도 등대와 팔미도 등대가 최초이고, 제주도에서는 1906년 점등한 우도 등대였다. 전국적으로는 다섯 번째이다. 이후 약 10년이 지난 1915년 마라도 등대가 불을 밝혔고 이듬해인 1916년 10월, 비로소 본 섬 제주 산지항에 등대가 세워졌다. 제주 본 섬 등대의 역사는 생각보다 꽤 늦은 편이다.
하지만 그 입지는 기능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기가 막힌 곳에 자리하였던 바, 간혹 배를 타고 육지를 오갈 때면 제주항 주차장 뒤편 물 건너 높다랗게 솟은 사라봉 위의 산지 등대를 매번 경탄으로 우러르게 된다. 예전에 한 지역신문에서 산지 등대가 있는 사라봉이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보다 아름답다고 찬(讚)한 구절을 보고 웃은 적이 있는데, 비웃음이 아니라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로렐라이 언덕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음에도. 사라봉과 그 위의 등대는 그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위의 등대가 생기기 전에도 제주도에 등대가 있었다. 마치 봉화대처럼 생긴 누대를 쌓아 그 꼭대기에 불을 피워 주변을 밝혔던 것이니 옛사람들은 그것을 도대불이라고 불렀다. 우도 등대 언덕의 바로 밑에는 우리나라 일곱 곳의 등대와 세계의 유명 등대 10여 곳의 미니어처가 전시된 '우도 등대공원'이 있는데, 여기에 제주시 조천읍 북촌마을 포구에 있는 도대불이 원형 그대로 만들어져 전시돼 있으며, 근방에는 제주 도대불의 사진을 담은 자세한 안내문도 세워 놓았다.
위의 안내문에는
도대불은 제주도 바닷가에 있는 옛 등대로 돛대처럼 높은 켠 불이라는 뜻의 '돗대불'이 어원이라는 설과 길을 밝히는 '도대(道臺)불'이 변해서 굳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도대불은 '신호유적'으로, 각 마을 주민들이 밤에 고기잡이를 나간 배들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 만들어져, 지역이나 마을마다 만들어진 모양이나 불을 켜는 방법이 다르다.
연료로는 물고기 기름 · 솔칼(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의 방언) · 석유 등이 사용되었으며, 도대불의 재료로는 처음에는 돌을 이용하였고 뒤에는 쇠를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부식되어 현재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석축한 도대불의 형태를 구분하면 원뿔형, 원통형, 사다리꼴형, 상자형, 표주박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 써 있는데, 한 향토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남아 있는 도대불은 17개라고 한다. 도대불이 언제부터 만들어 쓰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최근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도대불이 1967년 7월까지 사용됐다는 기록이 확인된 점을 보면 제주 바닷가 마을 전체에 전기가 보급되기 전인 70년 대까지 도대불이 사용되었으리라는 짐작이다. 그밖에도 근대 들어 그 기능이 폐기된 바닷가의 봉수대나 연대(煙臺)의 일부도 도대불로 전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서 말한 조천읍 북촌마을 도대불은 그 형태도 완전하거니와 건조 연대가 기록된 비석이 세워져 있어 여러 가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북촌마을 도대불은 바닷가 선창에 인접한 암반 위에 현무암 잡석을 이용해 축조되었으며, 점등할 때 올라갈 수 있도록 남쪽으로 계단이 만들어졌다. 높이는 260cm, 상·하단 너비는 각각 193cm와 240cm인데 그 상단에 '御卽位記念燈明臺 大正四年十貳月律'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해석을 하면 '대정(大正, 다이쇼) 4년인 1912년 12월에 일왕의 즉위를 기념해 세운 등명대(燈明臺)'라는 것인데 우선 '등명대'라는 명칭을 보자. 뜻은 당연히 '불을 밝히는 대'로서 등대와 매일반이다. 문제는 이 등명대라는 말이 실제로 쓰였냐 하는 것이 되겠으니, 만일 그렇다면 도대불은 위 안내문의 설명과 달리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 일본어에서 파생된 말일 가능성이 높다. 등명대는 일본어로 도메다이, 그 축약으로 여겨지는 등대의 발음인즉 도다이(とうだい)인 까닭이다.
이 비가 세워진 1912년은 일본 메이지 천왕의 아들인 요시히토(다이쇼 천왕, 재위 1912-1926)가 그 위를 계승한 해로서 일제는 그것을 대대적으로 기념하였다. 까닭에 우리나라 곳곳에도 그의 즉위를 기념하는 비석 등이 세워졌으니 그중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는 비석 하나가 2019년 충북 단양에서 재발견되기도 하였다. 즉 그때는 이곳저곳을 가리지 않고, 또 이것저것을 불문하고 기념 명문이 새겨졌던 것인데 그즈음 만들어진 도대불에도 화가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또 등명대란 말은 우리나라에서 쓰인 예가 여기밖에 없지만,(화북포구에서도 '등명대' 비석이 발견됐다 하는데 확인은 안 해봤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사용된 단어이니 일본 막부시대에서 개화기로 넘어가는 19세기 말 서양에서 도입된 등대를 등명대라고 불렀다. 아울러 1870년 2월 22일 외무성에 등대 사업을 관할하는 등명대국이 신설돼 1870년 8월 9일까지 소관업무를 수행하다 내무성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일본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이상을 볼 때 도대불이 '도다이'에서 왔을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이 뒤섞인 이런 예는 솔직히 허다하니, 일례로 닭도리탕이라는 음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닭을 도리친다(?)는 의미의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주장이 있는 마당이고 보면(백파더 외) 도대불이 일본어에서 유래됐다고 못 박기도 어렵다. 도대불이 제주도의 토속품이니만큼 그 용어도 제주도 토속어일 수 있다는 얘기다.
등대의 한자도 일본과 한국이 달라, 각각 灯台와 燈臺로 표기한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 등명대는 확실한 일본어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불보다 등명대란 말이 훨씬 더 많이 쓰이니 표지판도 등명대요, 전통성을 부각시키며 도대불이 지정문화재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등명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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