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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보고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8. 2. 17:22

     

    장보고는 우린 귀에 익숙한 인물이기는 하나 그의 동상을 보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멀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이 장보고 상(像)을 한 달도 안 된 기간에 우연히, 그것도 각각 다른 곳에서 보게 되어 신기해 했던 기억이 있다. 첫번 째는 완도에서 제주도 행 화물차량의 계측을 위해 계측소를 찾다가 우연히 보게 된 동상이었고, 두번 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법화사라는 고찰(古刹)을 찾았다가 그 입구에서 만나게 된 석상이었다.

     

     

    옛 청해진 터에 세워진 장보고 동상

     

     

    법화사는 원나라가 제주도를 직접 통치하던 때인 고려 원종 10년(1269년) 대규모 중창불사를 벌였던 기록이 남아 있는 절로 한창 때는 노비만도 382명이었다는 사찰이다. 지금도 절 뒤편에서는 옛 사지(寺址)에서 발굴된 건물터와 초석, 기타 석재 편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돌들이 제주 화산석이 아닌 육지 화강석인 것을 보면 이 절의 위세가 한때 얼마나 대단했는지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상은 모두 지난 1982년 발굴조사 때 나온 것로 그때 밝혀진 옛 건물은 10동이었고, 대법당의 규모는 무려 105평(347㎡)이었다.

     

     

    옛 법화사 건물지


     

    그런데 그때 법화사 입구에 장보고의 석상과 기념비(특히 거대했던)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이상했었다. 장보고가 제주 법화사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걸 세웠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가 중국 산동 적산지방에 세웠다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과의 무리한 연결짓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는지 지금은 그 석상과 기념비가 다 사라다는 후문이다. 이번에 확인해 보니 정말로 그러했던 바, 갑자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지난 달, 문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니오와이즈 혜성과 오버랩되어진다.('니오와이즈 혜성 인증샷을 기대하며')

     

    장보고는 연개소문과 함께 ·중·일의 역사에 모두 나오는 인물이라고 한다. 다만 연개소문이 명문거족 출신으로 대막리지를 지낸 거물임에 비해 장보고는 신라인이라는 점과 궁복(弓福)이라는 아명 외에는 출신지나 가정환경도 전혀 알려진 바 없는 평민 출신의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당나라에 들어가 서주(徐州)의 청년 장수로 입신한 일이 정사(正史)인 <신당서>, 그리고 당나라명 시인 두목(杜牧)의 문집인 <번천문집>에 실려 있으며, 일본에서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뿐 아니라 유명한 승려 엔닌(圓仁)이 쓴 당나라 유학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에 특히 자세히 기록돼 있다. 뭔가 비상한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장보고는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신라에 돌아와서의 일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대단히 흥미진진한 바, 흥덕왕 3년(828년) 귀국 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신라인에 대한 노예 매매을 일삼던 당나라 해적을 소탕한 일, 그리고 왕실의 왕위 계승 싸움에 개입하여 김균정(金均貞)의 아들 우징(祐徵)을 신무왕으로 등극시킨 일,(839년) 이어 신무왕의 아들 김경응(慶膺, 문성왕)이 왕위를 계승하나 장보고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 한 신라 조정이 염장이라는 자를 시켜 살해한 일(846년) 등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당시의 피비린내 나던 왕위쟁탈전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신라 왕실은 원성왕 때에 이어 또 다시 피바람이 분다. 원래는 흥덕왕의 사촌동생이자 서열상 가장 높은 왕족인 김균정(원성왕의 손자)이 왕위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다른 사촌동생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김제륭(金悌隆)이 제 편을 규합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왕실의 귀족들은 김균정 편과 김제륭 편으로 나뉘어 싸우게 되는데, 이때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양(金陽)은 김균정을, 원성왕의 증손인 김명(金明)은 김헌정을 편들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김제륭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희강왕(僖康王)이다.(김균정은 살해된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던 바, 곧 이어 같은 편이었던 김명이 아찬 이홍(利弘)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니 희강왕은 왕위에 오른지 불과 3년만에 자살로써 왕위를 마감하고, 838년 김명이 새 임금이 되니 곧 민애왕(閔哀王)이었다.

     

    이에 앞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가족들과 함께 간신히 경주를 탈출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김우징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할 때 시중(侍中, 내무부장관)으로 장보고와는 인연이 있었던 바, 그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김우징의 아버지 균정을 살해한 희강왕이 죽자 김해로 피난해 있던 김양이 김우징을 찾아와 반란을 제안한다. 혼란한 참에 군사를 일으켜 김명(민애왕)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굳이 마다할 까닭이 없었던 김우징은 거병을 결심하고 장보고에게 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자위(自位)했고, 이홍은 아버지를 죽인 자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들이오. 원컨대 당신의 군사를 빌려주시오. 왕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싶소."(<삼국사기> 민애왕 원년 조)

     

    그러자 장보고는 다음과 같은 말로 협력을 맹세한다.

     

    "예로부터 이르길, 의분(義憤)함을 보고 참는 것은 용기가 부족한 자라 했소이다. 내 비록 용렬하나 충성을 다짐하겠소이다."

     

     

    * 드라마 <해신> 속의 김우징과 장보고

     

    KBS '역사저널 그날' 캡처

     

    아마도 김우징은 장보고가 사설 군진(軍鎭) 청해진을 설치할 때 도움을 주었던 듯.

     

     

    하지만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다른데, <삼국유사>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실리적이다.

     

    "내겐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갈 수 없는 원수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그 자를 제거해준다면 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삼국유사> 기이 하)

     

    이와 같은 김우징의 제안에 장보고가 마음을 허물고 반역을 일으켜 민애왕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는 가오(?)는 조금 상실되나 장보고가 김우징에게 협조한 보다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된다.

     

    아무튼 장보고는 김우징을 도울 결심을 하고 정년(鄭年)을 지휘관으로 하는 5천 군사를 내주었다. 청해진 군사의 반이었다. 이에 우징은 정년, 김양과 함께 금성(경주)으로 출발, 무진주(광주)를 무혈입성하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으나 남원경(남원성)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청해진으로 회군한다. 청해진의 군사가 제 아무리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중과부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해 음력 10월, 아무도 예상 못했던 일이 벌어지며 반란을 성공으로 이끌게 되니, 그 기적과도 같은 하늘의 조화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그해 겨울에 혜성이 출현하였으니 광채가 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켰다. 이에 군사들이 (김우징에게) 하례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을 상서로운 조짐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아 그해 12월에 다시 출동했다.

      

     

    원성왕릉

    선대왕인 37대 왕 성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내물마립간의 12대손 김경신은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태종무열왕 계의 김주원을 살해하고 38대 원성왕에 등극하는 바, 신라 하대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자라 할 수 있다.(신무왕 김우징을 도운 김양은 김주원의 후손이다)

     

    * 드라마 <해신>에 출연한 여신들

     

    채정안의 리즈 시절

     

    의외로 단역이었던 수애

     

    혜성 같이 등장한 고교생 이연

     

    해진 군과 신라군의 달구벌(대구) 전투

    ※어느 분의 유튜브에서 빌려온 그림으로, 소개해드릴 요량으로써 우선 따왔는데 찾을 길이 없다. 차후 다시....

     

    영국사를 바꾼 혜성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전 나타난 핼리 혜성에 놀라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

     

    핼리 혜성

    1986년의 핼리 혜성을 NASA가 찍은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1682년 혜성의 76년 주기를 예언한 에드먼드 햴리(1656-1742)로 그는 1682년 출현한 혜성이 1758년에 다시 나타날 것을 예측하고 죽었는데 175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데이에 맞춰 정확히 출현했다. 이후 이 혜성에 핼리의 이름이 붙여졌다.(☞ '혜성에 관한 잡담')

     

     

    서영교(<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 글항아리)를 비롯한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혜성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 특히 전쟁과의 상관 관계를 주목해왔다. 서영교는 특히 신라의 희강왕과 민애왕의 죽음(837년) 및 장보고의 암살(841년)을 혜성의 출현과 연관시켜 설명하였던 바, 다음 회에서는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실려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와 혜성과 연관된 장보고의 죽음을 심도 있게 소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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