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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은 진평왕의 무덤이다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8. 20. 00:49
진평왕의 무덤이 서봉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 이유
서문에 스스로 "책의 문장과 내용이 머리말처럼 거칠고 성글며 장황하다"고 언급하더니 과연 그러했다. 국립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임재해 교수가 쓴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다. 임재해 교수는 2008년 신라 금관의 기원에 관한 책을 펴냈는데 그것이 무려 700쪽이나 된다. 뒤늦게 그 책을 접하였지만 '거칠고 성글며 장황한' 매력에 빠져 내리읽었다. 그와 같은 매력은 책을 펴는 순간 곧바로 느끼게 되니 속 표지 다음, 아무런 사설 없이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함께 아래의 설명이 뒤따른다.
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것으로 '곧은 줄기 굽은 가지' 나무 세움장식 3개와 '굽은 줄기 곧은 가지' 나무 세움장식 2개로 구성되어 있다. 김알지 신화의 계림을 나무 모양 세움장식으로 형상화한 김씨 왕실의 의전용 왕관이다. 그러므로 출자(出)형이나 사슴뿔 모양이라는 전제로 시베리아 기원설을 펴거나, 금관을 장례용 부장품이자 데드마스크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앞쪽 좌우에 태환식 귀고리 모양 3쌍을 달고 수식을 늘어놓은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책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이 금관의 기원이 시베리아 샤먼의 관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지금까지의 통설인 시베리아 샤먼의 관에 부착된 사슴뿔 장식으로부터 금관의 디자인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데 그 주장에는 본인도 적극 찬동한다. 금관을 다룬 TV 역사 프로그램이나 기존의 책에서는 매양 시베리아 샤먼의 관이나 아프가니스탄 틸리아테페(Tillya Tepe) 금관, 혹은 흑해 북안 로스토프 지역에서 출토된 사르마트(Sarmat) 금관에서 신라 금관의 시원을 찾았지만, 평소에도 나는 그것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모양도 크게 차이 나고 시기적으로도 크게 차이 나는 그 금관들이 어떻게 신라 금관의 시원이 될 수 있는가? 신라 금관은 그저 신라의 금관일 뿐이다.(다만 의전용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기 힘드니, 알다시피 금관은 1mm도 안 되는 금판을 오려 만든 것으로 1kg의 무게를 차치하고서라도 도무지 흔들거려 쓸 수가 없다. 아마도 서너 걸음을 걸으면 금관의 관식은 그대로 꺾여 주저앉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쪽에는 금관총 금관의 앞면과 옆면 사진을 싣고 아래와 같은 설명을 붙였다.
신라 금관의 전형을 이루고 있는 금관이다. 앞쪽에 '곧은 줄기 굽은 가지' 세움장식 3개와 뒤쪽에 '굽은 줄기 곧은 가지' 나무 세움장식 2개를 갖추고 아래로 한 쌍의 수식을 늘어뜨리고 있다. 줄기와 가지 끝의 봉긋한 모양은 보주나 돔이 아니라 나무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움' 모양이다.
절풍식 속관은 고조선 이래의 전통이지만, 겉관은 김알지 신화의 계림을 상징하는 신수들의 세움장식으로 새롭게 창출된 것이다. 신라 초기 국호 계림국을 형상화한 금관은 신라 김씨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 정체성을 나타내는 왕관으로서 정치적 기능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김알지 신화가 서려 있는 계림의 나무 모양을 금관의 세움장식으로 형상화했다는 임재해 교수의 추정은 옳은 것일까?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서봉총 금관을 지목했다. 알다시피 서봉총은 1926년 발굴 당시 조선을 여행 중이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브 아돌프(Gustav Adolf)가 이 고분의 발굴에 참가한 까닭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이때 금관이 출토된 것인데 금관에 봉황 무늬 장식이 있었으므로 스웨덴의 음차 표기인 서전(瑞典)의 서(瑞) 자와 봉(鳳) 자를 합쳐 서봉총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임재해 교수는 서봉총 금관의 새가 봉황이 아니라 닭이라고 말한다.
다른 금관의 구조와 달리 가운데 십자 모양 궁형 정수리에 나뭇가지를 세우고 가지 끝마다 새를 앉혀 두었다. 김알지 신화를 고려하면 이 새는 봉황이나 삼족오가 아니라 시림(始林=계림)에서 울음소리로 김알지의 출현을 알린 닭을 상징한다. 김알지 신화의 내용을 가장 풍부하게 형상화한 후기형 금관으로 추론된다.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임재해 교수는 <삼국사기>의 내용에 의거, 김알지의 출현을 알리는 알지 신화의 내용을 가장 완벽하게 형상화한 것이 서봉총 금관이라고 말한다. 다른 금관은 계림의 신성한 숲을 풍성하게 형상화하는 데 머물렀지만, 이 금관은 닭을 나뭇가지에 앉힘으로써 아기 알지가 출현할 때 흰 닭이 울었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숲 속에 세 마리의 닭을 앉혀 예사 숲이 아니라 계림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발굴된 금관 가운데서는 가장 발전된 양식이자 김알지 신화의 내용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낸 양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재해 교수는 서봉총 금관 사진의 해설에 있어 더욱 흥미로운 글을 붙여 놓았다.
서봉총 금관과 함께 출토된 은합우(은그릇) 명문의 연호 '연수원년(延壽元年)'을 고려할 때 진평왕의 금관으로 추론된다. 그동안 학계에서 알 수 없는 연호라고 한 '연수'는 고창국(高昌國) 국문태(麴文泰)왕 연호로서 그 원년은 서기 624년이며 진평왕의 재임 시기이다. 그러므로 신라 금관의 하한 연대를 7세기까지 확장해야 할 것이다.
신라 금관의 하한을 무려 100년 이상 끌어내리는 이 같은 획기적인 주장의 근거는 1926년 9월 무덤 발굴 당시 발견된 은으로 만든 뚜껑 달린 그릇으로, 그 몸체 겉면 바닥에 '延壽元年太歲在辛三月中太王敎(敬?)造盒杅三斤'이라는 문자를 새겼고, 뚜껑 안쪽에는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太王敎(敬?)造盒杅三斤六兩'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대체로 "연수 원년, 즉, 간지로는 신묘년(辛卯年)이 되는 해의 3월에 태왕(太王)께서 각각 3근과 3근6량 되는 재료를 사용해서 은합을 만들도록 명하시었다"로 해석된다.
그동안은 이 '연수'라는 연호가 '태왕'이라는 호칭으로 인해 고구려의 연호로 인식되어졌다. 앞서 말한 광개토대왕의 호우처럼 위 은합도 고구려에서 만들어졌으리라 짐작되었던 것이다.('연수'에 대한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논문이 십여 편 나왔으나 모두 추정이다) 그렇지만 임재해 교수는 이것을 고창국 국문태 왕의 연호로 해석했다. 고창국 국문태 왕은 즉위한 지 5년이 되는 해에 연호를 중광(重光)에서 연수(延壽)로 바꾸었던 바, 연수원년은 고창국 국문태왕 5년으로 서기 624년에 해당된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선희 교수 역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설명을 빌리자면, 명문(銘文)의 '太歲在辛’은 덕(德)이 있어 많은 것을 이룬 명군(明君)이 계속하여 재위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명문은 고창국에서 연수원년에 국문태 왕이 계속 명철한 성군으로 재위하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기록이며, 명문의 내용으로 보아 서봉총 은합은 서기 624년에 고창국에서 만들어져 신라에 예물로 보내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은합 덮개 안쪽에 새겨진 명문인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은 국문태 왕이 즉위한 지 5년 되는 연수원년 3월에 만물이 무성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서, 연수원년에 고창국의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어 번영하기 시작한 사실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박선희 교수는 복식사적인 면으로 이상을 설명한다. 신라는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당의 복제(服制)를 따르겠노라 말한 후 실제로 당의 복식제도를 받아들였다. 즉 진덕여왕 때부터는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신라 전래의 복식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전에 신라에 민족 고유의 복식이 있었음은 경주 백률사 석당(石幢)에 양각되어 있는 이차돈이 순교 당시 입은 의복과 모자, 그리고 고깔이나 절풍식 관모를 쓰고 긴 겉옷과 주름 잡힌 바지(혹은 밑을 댄 통이 넓은 바지)와 치마를 입은 토우가 좋은 증거가 된다.
그러나 김춘추가 귀국한 이후로는 모든 것이 중국식으로 변모했으니 진덕여왕 3년(649) 정월부터 문무백관이 전부 중국식 의복을 착용하였다. 이어 650년 6월부터는 그간 사용돼 온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아래)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하니, 자국의 연호인 태화(太和)의 사용이 중지되고 당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가 사용되었다.(이후 신라 조정은 완전히 중국화되었고 문무왕 4년인 664년에는 부인들까지도 중국의 복식제도를 따르도록 했다)
인평 (仁平)
14년 태화 (太和)
원년 2년 3년 4년 647년 647년 648년 649년 650년 정미 정미 무신 기유 경술 관모 역시 중국식 관모인 복두(幞頭)로 바꾸었던 바, 왕의 장례용 관모(우리가 일반적으로 금관이라 부르는 것)도 따라 사라졌으며 고유의 적석목곽분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라의 금관은 그렇게 사라져갔으니, 아마도 선덕여왕 때까지가 금관의 마지막 세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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