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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순수비 개관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8. 23. 23:59
신라 24대 임금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심맥부(金深麥夫)는 법흥왕의 동생이자 지증왕의 차남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로 태어났다.(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에 따르면 540년 7세의 나이로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김입종의 비(妃)가 태후로서 섭정을 했다. 진흥왕은 18세가 되는 551년 친정(親政)으로 전환하며 법흥왕 시절부터 사용해온 건원(建元)이라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신라라는 나라를 새롭게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는 곧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던 바, 남한강 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고 한강 중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백제 성왕과 연합해 한강유역을 공격하였고, 553년에는 백제가 선점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는 이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했다.(김무력은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으로 김유신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1978년 발견된 단양적성비 * 신라가 단양 일대를 정복했을 때 공을 세운 장군들과 현지인을 포상하고 위무한 내용 실린 비문이다. 현존 높이 93cm의 화강석으로 총 21행 430자 가량을 새겼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지표로 나왔던 부분은 망실되었으나 대신 땅속 묻혀 있던 부분은 글자가 또렷하다. 국보 198호로 고속도로 단양휴계소 부근에 위치한다.
단양적성비 탁본 (김)이사부, 비치부, (김)무력 등의 장수 이름이 보인다. 단양비의 김무력은 북한산비에 나오는 신주(新州)의 초대군주 '사탁무력지잡간'과 동일 인물이다. 북한산 순수비 * 1816년 추사 김정희가 신라 진흥왕의 비석임을 확인했다. 1817년 다시 그는 비봉에 올라 이끼를 제거한 후 글자를 판독하고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낸 다. 비신의 높이 155.1cm, 너비 71.5cm, 두께 16.6cm이며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 순수비 전면 탁본 '□흥태왕'(□興太王)과 '순수'(巡狩)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에서와 같이 '태왕'은 황제를 의미하며 '순수'는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일'을 말한다. 즉 '황제께서 신하들과 함께 척경을 두루 둘러본 기록'이 진흥태왕의 순수비이다. 김정희가 오른 북한산 비봉 / 비석의 꼭대기는 지붕돌을 얹을 수 있도록 凸자 형태로 되어 있으나 김정희가 올랐을 때도 지붕돌은 없었다고 한다. 비봉의 비석은 1972년 8월 16일, 보호를 이유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비봉의 복제비 / 비가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가 2006년 10월 19일, 원 모습 그대로의 복제비가 건립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북한산 순수비 / 비가 있던 비봉 사진을 배경으로 세팅됐다. 꼭대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곳이 비가 서 있던 자리다. 지금도 비봉 꼭대기는 가파라 오르기가 쉽지 않은데 비석을 지고 올라간 신라인들이나 비석을 찾아 고증한 김정희나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다. 비봉의 높이는 해발 560m이다. 진흥왕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북진해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 개마고원 입구인 황초령까지 진격하고 다시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운시산(雲施山)의 마운령까지 진출한다.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머물던 작은 나라 신라가 일약 경기·강원 및 함경도까지 아우르는 대국(大國)이 된 것이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북단(北端)까지 순수(巡狩)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비석들을 세웠던 바, 568년에 건립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그리고 같은 해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북한산비가 그것이다.
황초령 황초령비 비각 황초령순수비 / 황초령비는 높이 151.5cm, 너비 약 48cm, 두께 약 21cm로 화강석이다. 전체 글자는 300자가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상부가 망실되어 240자 정도만 판독 가능하다. 김정희가 쓴 비각 현판 / 북한산비에 이어 황초령비를 고증한 김정희는 예의 추사체로 '진흥북수고경(진흥왕이 북쪽의 옛 땅을 순수함)'이라는 현판을 써 비각에 걸었다. 철종 때 중령진(中嶺鎭 )에 옮겨졌던 비석은 북한국보 110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황초령순수비 탁본 / 코베이 옥션에 나온 것으로 지금까지 것 중 최상이다. '(태창 원년) 8월 21일 계미일에 진흥태왕이 영토를 순수하고 돌에 새겨 기록한 글'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이어 칭제건원 후 스스로를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하였다'는 제왕의 치도(治道)를 적었다. '진흥태왕'과 제왕건호(帝王建號) 부분 / '제왕건호'는 황제가 연호를 세웠다는 뜻이다. 마운령 마운령순수비 / 이렇게 버려진 것을 1929년 육당 최남선이 마운령 만덕산에서 찾아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고증했다. 마운령순수비/ 마운령 비는 높이 146.9cm, 너비 약 44cm, 두께 약 30cm로 글자는 화강석 비면 양면에 새겼고 전면은 10행 행당 26자, 뒷면은 8행 행당 25자이다. 북한국보 111호로 현재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마운령순수비 탁본 / 2019년 코베이 옥션에 나온 탁본으로 비문 전체의 글자를 거의 읽을 수 있다. 이 비문에서는 황초령비와 마찬가지로 제왕건호(帝王建號), 짐(朕)이란 용어를 사용해 본인이 태왕(황제)임을 내 세우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서경>( 書經)의 내용이 인용돼 진흥 왕의 자부심이 동이(東夷 )의 우물안 적 사고가 아님을 보여준다. 황초령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며 가장 먼저 등장하는 '태창원년'의 글자가 황초령비의 망실된 부분을 보완해준다. '제왕건호'의 글자 진흥왕이 건립한 비석 / 위의 단양적성비와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는 왕의 순행을 기념한 순수비가 아니라 고구려와 대가야의 영토를 빼앗은 뒤 세운 척경비(拓境碑)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북한산순수비는 도입부의 글씨가 마모되어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비문 내용이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비슷한 점, 그리고 내용 중의 ‘남천군주(南川軍主)’를 근거로써 마찬가지로 '태창 원년'에 세워진 비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 '진흥왕 29년(568) 10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사실 이 내용을 좇으면 진흥왕이 한 겨울에 황초령과 마운령에 오른 것이 되기 때문에 부담스럽기는 한데 그렇다고 진흥왕이 두 번 순행했을 리는 없을 터, 568년에 북한산비가 세워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비문은 다음 회에 판독해보기로 하겠다.
비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복제비가 서 있다. / 그런데 언뜻 순수비나 복제비가 쉽게 세워진 듯 보이지만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험준한 암벽들을 힘들게 올라야 한다. / / / / 그래서 비는 어둠 속에서는 이렇듯 할 말 많은 모습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이 비를 세우는 데 1억1천5백만원이 들었으며, 2006년 10월 19일 제막식 행사 때 지붕돌 찾기 행사가 벌어졌다. 참가인원이 250여 명이 비봉 주변 샅샅히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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