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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황대는 진흥태왕의 무덤이다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9. 27. 03:05

     

    경주 노서동 고분군과 노동동 고분군은 지금은 봉황대 고분 앞의 길을 사이로 구역과 명칭이 나뉘었으나 본래 같은 무덤군이었다. 이곳에서는 일제시대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이 발굴되며 화려한 금관을 선보였고, 이후 '금관=마립간시대'라는 등식을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마련됐다. 일제시대의 학자들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마련한 그 등식을 우리나라 학자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따른 것인데, 해방 후의 첫 발굴이라는 은령총, 호우총 발굴에서도 그 등식은 고찰 없이 그대로 적용되어졌다.

     

     

    경주 노서동 고분군 안내문
    경주 노서동 고분군 안내문
    경주 노동동 고분군 안내문

     

    은령총과 호우총은 같이 붙어 있던 표형분으로 짐작되나 지금 은령총은 없어지고 호우총만 남았다. 호우총에서는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 호우가 발견되며 일대가 5세기 무덤이라는 추정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호우가 광개토대왕의 제사 때 사용된 그릇이므로 5세기 무덤이라는 것인데, 그릇이 그 당시 사용된 것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묻힌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음에도 이 무덤 및 일대의 고분은 5세기의 무덤이 되었다.

     

     

    호우총 / 광개토대왕 명이 새겨진 호우 외 5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이것은 필시 무덤 발굴 당시 지도 교수였던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쓰(有光敎一)의 영향일 터인데(무덤은 1946년 5월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발굴되었지만 총독부 박물관장이던 일본인 고고학자의 지도가 있었다) 이후 1953년에 쌍상총과 마총이 발굴되며 모양이 좀 빠지게 됐다. 그 두 무덤은 7세기 중엽 또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이기 때문이었다.

     

    즉 노서동 고분군 중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은 적석목곽분(돌무지널방무덤)이나, 마총과 쌍상총은 그보다 시대가 훨씬 처지는 7세기의  횡혈식석실분인 바, 노동·노서동 고분을 5~6세기 고분군, 특히 마립간시대의 고분군으로 특정 지움은 그릇된 일이라는 것이 증명되게 된 셈이다.(노서동 고분군 중 1929년 발굴된 우총 역시 7세기 횡혈식석실분이었으나 봉분 없이 그냥 묻혀졌다)

     

     

    마총(앞쪽) / 1920년대 조사에서 말뼈가 출토돼 마총이라 이름 붙여졌다. 발굴 당시 완전 도굴된 상태였으며 1953년 8월 국립 박물관 김원룡에 의해 재조사되었다.
    쌍상총 / 1953년 6월 국립박물관이 발굴하고 봉분을 복원하였다. 완전 도굴되어 유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고, 부부의 무덤이었던 듯 돌침대 형식의 석상(石床) 두 기가 나란히 발견돼 쌍상총으로 이름 지어졌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노동·노서동 고분군은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여러 세대에 걸친 유택이 혼재해 있다는 것이 정답일 터인데, 일제시대에 그 축조 시기를 알 수 있는 고분 하나가 발굴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서봉총이나 고분의 주인이 비정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서봉총은 진평왕의 무덤이다') 그 추측의 바탕은 무덤에서 출토된 은합(銀盒, 은그릇)으로서 그릇 겉면 바닥과 뚜껑에 고분의 연대를 추정할 있는 연호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문(銘文)을 다시 보자면 다음과 같다.

     

    延壽元年太歲在辛三月中太王敎(敬?)造盒杅三斤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太王敎(敬?)造盒杅 三斤六兩

     

    위의 글은 몸체 겉면 바닥에 새겨진 것이고 아래 글자는 뚜껑 안쪽에 새겨진 것으로, 이는 대체로 "연수 원년, 간지로는 신묘년(辛卯年)이 되는 해의 3월에 태왕(太王)께서 각각 3근과 3근6량 되는 재료를 사용해서 은합을 만들도록 명하시었다"로 해석된다. 따라서 '연수(延壽)'라는 연호를 사용한 나라와 왕을 찾으면 서봉총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데, 일단 신라에서는 '연수'라는 연호가 쓰이지 않았다. 

     

     

    /
    '연수 원년' 기명 은합
    은합 뚜껑의 글씨 / 국립중앙박물관
    은합이 발견된 서봉총 / 앞의 봉분이 깎인 낮은 무덤이 서봉총이고 뒤는 서봉황대 무덤이다.

     

    그동안의 유력한 주장은 '연수'가 고구려 장수왕 시대에 사용된 연호라는 것이었다. '태왕'이라는 호칭으로 인해 고구려의 연호라는 개연성이 실릴 수 있었던 것이니 앞서 말한 광개토대왕의 호우처럼 위 은합도 고구려에서 만들어졌으리라 짐작되었다.(실제로 고구려 수도 집안에서도 이와 거의 같은 형태의 은합이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상명대학교 박선희 교수와 안동대학교 임재해 교수는 이것을 고창국 국문태 왕의 연호로 해석했다.

     

    고창국 국문태 왕은 즉위한지 5년이 되는 해에 연호를 중광(重光)에서 연수(延壽)로 바꾸었던 바, 연수원년은 고창국 국문태왕 5년으로 서기 624년에 해당된다. 아래는 서봉총에서 발견된 금관으로, 임재해 교수는 서봉총 금관 사진의 해설에 있어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글을 붙여놓았다.(임재해 저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고창국에 대해서는 '서봉총은 진평왕의 무덤이다' 참조)

     

    서봉총 금관과 함께 출토된 은합우(은그릇) 명문의 연호 '연수원년(延壽元年)'을 고려할 때 진평왕의 금관으로 추론된다. 그동안 학계에서 알 수 없는 연호라고 한 '연수'는 고창국(高昌國) 국문태(麴文泰)왕 연호로서 그 원년은 서기 624년이며 진평왕의 재임 시기이다. 그러므로 신라 금관의 하한 연대를 7세기까지 확장해야 할 것이다. 

     

     

    서봉총 출토 금관

     

    신라 금관의 하한을 무려 100년 이상 끌어내리는 이 같은 획기적 주장은 노동·노서동 고분군이 7세기의 무덤이 혼재된 곳일 수 있다는 데까지 사고를 확장시킨다. 사실 이것은 그리 무리한 생각도 아니니 위에서 말한 마총, 우총, 쌍상총 등의 횡혈식석실분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에 나는 감히 신라 최대의 무덤 봉황대를 신라의 태왕 진흥왕(24대)의 무덤이라 비정하게 되었다.

     

    * 이유는 단순하다. 신라의 가장 위대한 군주였으므로 가장 큰 무덤이 주인이리라는 추정이다.

     

    그리고 서봉황대 고분은 지증왕(22대), 표형분인 134호 고분은 법흥왕(23대)과 보도부인, 금관총은 진지왕(25대), 그리고 표형분인 서봉총은 진평왕(26대)과 마야부인의 무덤이 되겠다.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보강되는대로 2차 설명을 올릴 예정인데, 우선 서봉황대 고분이 지증왕의 것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봉토 상부의 함몰 현상으로 미루어 적석목곽분으로 여겨지는 바, 이는 마립간시대에 조성된 대릉원 대형 적석목곽분의 무덤 형식과 같다. 아울러 이 무덤은 저변이 80m에 달하는 대형분으로 신라 마립간시대의 대미를 장식했던 강력한 왕권의 지증왕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지증왕의 능묘 서 봉황대
    진흥왕의 능묘 봉황대 /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 단일 무덤으로서는 신라 최대이며 가장 아름다운 고분이기도 하다.
    늦가을에 찍은 봉황대
    한겨울에 찍은 봉황대
    도로에서 본 봉황대 / 무덤 위에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자란다. 이것으로 인해 발굴이 더욱 난망이라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무덤이 열리고 주인이 밝혀질 날이 오리라 본다.
    봉황대 표석 /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무덤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풍수지리상 비보(裨補) 차원으로 만든 조산(造山)이라 생각해 대(臺)라 불렀다.
    노동·노서동 고분군 / 괄호 안은 내가 생각하는 무덤의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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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